171회 - 누리웹 탄생
<젤리 러쉬> CBT가 오픈하고 며칠이 지났다. 각종 게임 커뮤니티와 동호회에서는 CBT 참여자들의 반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게임 매체는 대부분 월간지이기 때문에 자세한 <젤리 러쉬> 리뷰 기사를 보려면 월말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자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염기환은 ‘누리웹’이라는 작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2000년에는 개인이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는 일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그는 ‘온누리의 모든 정보를 담겠다’는 의미로 사이트 이름을 누리웹으로 정하고 이런저런 정보나 소식을 모아서 웹사이트에 올렸다. 시사/과학/경제/문화 등 다양한 카테고리마다 게시판이 있었다. 그렇지만 하루 방문자는 수십 명 정도였다.
그러다 염기환도 <젤리 러쉬> CBT 소식을 들었다. 그도 뉴퀘스트와 황제국을 알고 있었다. 2000년 들어서 황제국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혹시나 웹사이트 트래픽이라도 좀 늘릴 수 있을까 해서 각종 게임 인터넷 카페와 동호회를 돌며 <젤리 러쉬> 정보를 몇 개 모았다.
그는 여러 게시판에서 <젤리 러쉬> 정보를 긁어모아 누리웹 문화 카테고리 아래에 있는 비디오 게임 게시판에 올렸다. 동시에 각종 인터넷 게시판 곳곳에 누리웹에 가면 <젤리 러쉬> 최신 정보가 있다고 홍보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홍보 글을 올리고 다닌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누리웹이 트래픽 초과로 다운됐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생전 처음 보는 트래픽 초과 메시지에 반사적으로 모니터를 몇 번 툭툭 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누리웹은 여전히 다운 상태였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염기환은 깜짝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급히 호스팅 업체 관리 사이트에 들어가 하루치 트래픽을 초기화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또 요청하고, 또 요청했다.
그렇게 세 번의 트래픽 리셋을 요청한 끝에 그는 아예 트래픽 용량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터넷 웹사이트와 게시판을 뒤지고 다니면서 <젤리 러쉬> 정보를 찾아다녔다.
염기환은 스스로 인간 웹 크롤러(web crawler, 자동화된 방식으로 월드 와이드 웹의 정보를 탐색하는 봇)가 되어 <젤리 러쉬> 정보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이제 누리웹에는 비디오 게임 카테고리에 [ 젤리 러쉬 ] 게시판이 따로 생겼고, 운영자인 그가 모은 정보가 보기 좋게 편집되어 올라왔다.
누리웹이 처음 다운되던 날, 염기환은 <젤리 러쉬>가 그의 홈페이지를 완전히 탈바꿈시킬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예감은 반만 맞았다. 바뀐 것은 홈페이지뿐만이 아니었다.
[ 젤리 러쉬 ] 게시판은 만들자마자 누리웹 트래픽의 99.8%를 차지했고, 사이트 트래픽은 매일매일 상승했다. 염기환은 곧 웹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수정했다.
본래는 ‘온누리의 모든 정보를 담는 누리웹’이었으나, 이제는 ‘온누리의 비디오 게임 정보를 담는 누리웹’이 되었다. 여러 종류였던 게시판 카테고리도 비디오 게임 하나만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카테고리를 세분화했다. 사이트의 방향성이 바뀌고, 그의 인생도 영원히 변하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성장세에 염기환은 뇌에서 빛이 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그도 엄청나게 바빠졌다. 그는 밥도 컴퓨터 앞에서 먹고, 잠도 컴퓨터 앞에서 자면서 오직 <젤리 러쉬> 정보를 찾아 나섰다.
그러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에는 운영자인 그가 <젤리 러쉬> 정보를 꿀벌처럼 모아서 게시판을 채웠다. 간간이 질문 몇 개가 올라 올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CBT 참여자들이 누리웹에 가입해 아예 누리웹에 <젤리 러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운영자가 열심히 정보를 퍼다 날랐더니, 이제는 누리웹이 정보의 생산지로 변신했다.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젤리 러쉬> 최신 정보를 알고 싶으면 누리웹에 가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트래픽 증가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누리웹은 아무 정보나 퍼다 나르던 개인 웹사이트에서, 순식간에 <젤리 러쉬> 관련 정보가 제일 빨리, 그리고 제일 많은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로 변신했다. 사이트 성격이 바뀌자 게임도 <젤리 러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운영자에게 더 많은 게임 게시판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고, PC 게임은 물론 콘솔 게임, 휴대폰 모바일 게임,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까지 온갖 비디오 게임 관련 자료가 모였다.
염기환은 늘어난 커뮤니티를 더 이상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법인을 설립해 개인 홈페이지는 이제 회사로 변신했고, 보조 운영자도 뽑았다. 각종 비디오 게임을 직접 해보고 리뷰를 남기는 전문 리뷰어도 고용했다. 전문 리뷰어가 하는 일은 사실상 게임 전문 잡지 기자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누리웹에 <젤리 러쉬> 관련 최신 정보가 모이고, 비디오 게임 커뮤니티로 덩치가 커지자 이제는 게임 잡지 기자들도 누리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누리웹을 이용했지만 그때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게임 잡지는 종이 출판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었다. 월간 베이스로 한 달에 한 번 발행하고 총판을 통해 전국에 배포된다.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반면 인터넷 기반인 누리웹에서는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에는 운영자가 퍼다 나른 글만 올라왔지만, 이제는 일반 유저들이 먼저 글을 올렸다. 여기에 사람들은 또 댓글을 달고,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보든, 사람이든, 돈이든 한곳에 모이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힘이 생긴다. 처음 구심점이 되기가 어렵지, 되고 나면 나중에는 저절로 모여들어 힘이 더 강해진다.
“어? 이거 게오동에서 자주 보던 아이딘데? 이분 누리웹 오셨네. 이분도 자음 게임 카페에서 보던 아이디고.”
PC 게이머 남동진 기자는 누리웹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만 해도 [ 젤리 러쉬 ] 게시판을 쓱 훑으면 힘들게 다른 인터넷 게시판 돌아다닐 필요 없이 편하게 자료를 모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그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남동진은 금방 알게 되었다. 누리웹이 점점 비디오 게임 관련 정보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자, 그동안 각종 PC통신에서 활동하던 게임 동호회 터줏대감들까지 누리웹으로 속속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누리웹에는 단순히 해봤더니 재밌더라를 넘어 비디오 게임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깊은 식견을 갖춘 글이 올라왔다. 퀄리티 좋은 글은 게임 전문 기자가 쓴 기사보다 더 방대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런 자료가 전부 무료로 올라왔다.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남동진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우리도 빨리 인터넷으로 뭐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이러다가 우리 밥그릇 다 뺏길 텐데.”
지난 2년은 PC 게이머에게 꿀을 빠는 시기였다. VIP 취재원 황제국은 알아서 중요한 떡밥을 가져다 PC 게이머에 툭툭 던져 주었다. 심지어 남동진은 기사를 미국 게임 잡지에 팔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뉴퀘스트는 커져도 너무 커졌다. 여전히 PC 게이머와 뉴퀘스트 사이의 관계는 좋았지만 옛날의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 딱 그 정도였다. 조윤권도 군대에 가면서 황제국과의 연결 고리는 더욱 약해졌다.
PC 게이머는 이제 2년 동안의 호황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할 때였다. 남동진 기자가 보기에 인터넷 매체로 거듭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종이책 잡지가 하루아침에 웹진로 탈바꿈하기란 쉽지 않았다.
김성진 편집장도 고민이 많았다. 입버릇처럼 “해야지, 해야지”라고 말했지만 선뜻 행동하지 못하고 흰머리만 늘고 있었다. 그럴수록 시작부터 인터넷에 올인한 황제국의 혜안과 용기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엄지원 역시 누리웹의 성장을 포착했다. 그녀는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의 지형 변화를 황제국에게 보고하고, 염기환과도 연락해 <영건 블러드> 게시판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대형 비디오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가 등장하는 건 반길 일이었다. 자잘하게 쪼개진 커뮤니티 열 군데를 관리하는 것보다 한 군데의 여론을 살피는 쪽이 쉬웠다.
황제국은 장기적으로는 자체 게임 포털을 만들고, 그 안에서 뉴퀘스트 게임 팬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관리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대형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의 등장은 인터넷 발달에 따른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의 기억보다는 등장이 조금 빠른 듯했지만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
“어떻게 운영되고 관리되는지 미리 잘 지켜보세요. 분명 나중에 우리한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퀘스트넷에는 지금 이 시각에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로그 데이터와 CBT 참가자들의 각종 피드백 데이터가 계속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게임 개선을 위한 내부 데이터일 뿐 공개되지 않는다. 여론은 퀘스트넷 외부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CBT 여론은 곧 OBT 흥행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황제국은 홍보대행사의 모니터링 보고서를 받아보고 있었지만 직접 누리웹에서 [ 젤리 러쉬 ] 게시판을 둘러봤다.
CBT 참가자들이 그날그날 자기가 플레이한 맵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글이 많았다. 대부분은 캐릭터가 귀엽다는 칭찬과 함께 오늘은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했는지, 맵은 어땠는지, 무슨 장애물을 만나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등을 일기처럼 올렸다.
간혹 게임 화면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올리는 열성적인 사람도 있었다. CRT 모니터를 카메라로 찍으면 화면이 이상하게 나올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황제국은 사내 인트라넷 젤리 러쉬 개선 사항에 ‘인 게임 스크린샷 찍기 기능 추가’라고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젤로의 귀여운 모습이 담긴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황제국은 너무 뻔한 기능인데도 깜빡 놓친 부분을 커뮤니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여론이란 곧 사람들의 숨겨진 욕구이기도 했다. 이를 잘 해석하면 게임 내외적으로 시스템을 개선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서비스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누리웹에서 선착순 3명을 모아 PC방에 모여 하나의 ID로 돌아가며 <젤리 러쉬> CBT를 즐기고 있었다. 만약 돈을 받으면 어떻게든 제재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순전히 재미로, 그리고 더 많은 사람과 <젤리 러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게시물의 말투만 봐도 <젤리 러쉬>에 확실히 여성 게이머가 늘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전 국민이 즐기는 게임을 모토로 한 게임인 만큼 몹시 긍정적인 신호였다.
물론 수없이 발견되는 예기치 못한 버그 리포트도 많았다. 어떤 게이머는 장애물 사이에 끼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빙글빙글 돌았다며 재밌어했다. 그는 버그조차 즐겼지만 플레이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는 위험한 버그였다.
CBT인 만큼 버그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버그마저 게시판의 콘텐츠로 만들었다. 재밌게도 사람들은 심각한 버그가 나왔는데도 웃으면서 오히려 그걸 겪은 사람을 부러워했다. 그만큼 사람들은 <젤리 러쉬>를 궁금해했고, 관련 정보에 목이 말라 있었다.
프로그래머들은 수집된 버그 리포트 중에서 심각한 것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매일매일 수정했다. 그 사이 황제국은 게임 내 결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벤처 기업과 협업 중이었다.
황제국은 PG(Payment Gateway, 온라인 지불/결제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이시스와 계약을 맺었다. 아이시스는 뉴퀘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생긴 금융 벤처 기업이었다.
오프라인에는 카드 단말기를 통해 결제하지만, 온라인 서비스는 단말기 설치가 불가능하다. 아이시스는 소비자가 직접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온라인 결제 시스템을 만들어 수많은 카드사와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거래처와 거래액 늘리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아이시스에게 뉴퀘스트는 포기할 수 없는 대형 클라이언트였다. 그들은 뉴퀘스트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아이시스는 주요 카드사는 물론, 문화상품권 등 각종 지류 상품권, 그리고 휴대폰 및 유선 전화 결제 시스템을 제공했다.
황제국은 아이시스 개발자들과 협업해서 [ 락커룸 ]에 아이시스 PG 서비스를 결합했다. <젤리 러쉬>에서 돈을 지불하면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이버 머니로 교환되었다. 오종석은 결제 시스템을 테스트하며 물었다.
“카드 결제를 온라인에서 바로 하니까 진짜 편하네. 근데 우리 사이버 머니 이름은 뭐로 하지? 골드? 이건 너무 직관적이라 멋이 없나?”
“아무래도 우리 게임하고 안 어울리지. <젤리 러쉬>에 딱 어울리는 화폐 이름이 있어.”
“뭔데?”
“젤리.”
“젤리? 오, 그렇네. 돈으로 젤리를 사서 패션 아이템을 산다. 진짜 딱이네.”
하워드는 젤리와 패션 아이템 가격을 놓고 여러 가지 모형을 시뮬레이션했다.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구매할 수 있으면서, 또 너무 저렴하지 않은 가격을 생각했습니다. 결제는 1,000원 단위로 가능하니까 1,000원에 8개의 젤리를 구매하는 게 최적으로 보입니다.”
“그럼 젤리 하나의 가격이 125원이네요.”
“그렇게 되죠. 가장 기본이 되는 아이템은 젤리 10개를 내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거보다 비싸면 더 복잡하고 화려한 캐릭터를 구매할 수 있고, 이보다 아래는 작은 팔찌 같은 간단한 액세서리류가 되죠. 전체적으로 가격을 4~5단계 정도로 설계할 생각입니다.”
“좋네요. 여기에 함께 있으면 더 좋은 세트 상품도 만들고, 눈길을 끌 만한 미끼 상품도 만들구요. 제일 비싼 건 얼마로 책정할 생각이세요?”
“가장 비싼 캐릭터는 현주 AD랑 얘기해 봤는데 황금마스크를 쓴 파라오 젤로를 비롯해 몇 가지를 뽑아 봤습니다. 가격은 39 젤리입니다.”
“그럼 4,875원이네요. 그래도 5천원 밑으로 맞추셨네요?”
“젤리 40개는 묘하게 비싼 느낌이 있어서요. 젤리 39개랑 40개는 받아들이는 느낌이 아무래도 다르죠.”
“괜찮은 거 같네요. 젤리 화폐랑 가격 구조 정리해서 다음 개발 회의때 공유해 주세요.”
사람들이 열심히 CBT를 즐기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뉴퀘스트는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OBT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