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회 - 카운트다운(1)
“안녕하세요! 인턴으로 입사한 컴퓨터공학과 99학번 민소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민소영이 뉴퀘스트에 인턴으로 합류했다. 그녀는 랩실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앞으로 퀘스트 엔진을 낱낱이 공부하도록 하세요. 나랑 진수 선배가 틈틈이 가르쳐주긴 하겠지만, 전반적인 기초가 부실하니까 전공 강의는 꼭 들어요. 필요하면 학원도 더 다녀요. 학원비는 회사에서 지원해 줄 겁니다.”
“우와! 진짜요?”
민소영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일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서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 업무에 투입될 실력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빨리 선배들을 따라잡겠다고 다짐했다. 황제국에게 처음 과제를 받았을 때보다 몇 배의 투지가 타올랐다.
99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또 하나의 이벤트가 마감을 앞에 두었다. 바로 영건 아레나 시즌 1이었다.
아레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랭킹을 올리기 위해, 혹은 사수하기 위해 열심히 게임을 했다. 아레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과연 누가 최초로 <영건 블러드> 공식 랭킹 1위 자리에 오를지 주목하고 있었다.
게임 잡지 기자들은 모두 퀘스트넷에 접속해서 아레나 랭킹 순위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영건 아레나 시즌 1은 시작과 함께 송진호는 계속 1위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한기석은 꾸준히 순위를 올려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뉴퀘스트 내부에서도 누가 랭킹 1위를 할 것인가 화제였다. 오종석의 주도로 직원들끼리 내기를 걸었다.
“절대 송진호죠. 그 플레이를 눈앞에서 봤으면 다른 사람은 못 골라요.”
“근데 제국이는 한기석을 뽑았던데?”
오종석은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황제국은 반대의 선택을 했다. 뉴퀘스트 멤버 중 한기석에 건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황제국, 이진수, 그리고 차현주였다.
“제국아, 너도 그날 같이 봤잖아. 근데 왜 한기석을 뽑았어?”
“응? 아아, 그냥 왠지 송진호는 이름이 어쩐지······. 2등이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살다 살다 그런 황당한 소리는 첨 들어 본다. 송진호 이름이 왜? 뭐?”
“아니, 그냥. 느낌이라니까?”
황제국도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내기는 마감되었고 결과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 어?”
그런데, 결국 이변이 일어났다. 시즌 1 종료 시각인 밤 9시를 고작 2시간 앞두고, 한기석이 송진호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선 것이다.
오종석을 비롯해 송진호에게 돈을 걸었던 멤버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두 손 모아 송진호가 재역전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그들의 염원과 달리 한기석과 송진호의 점수 차이는 더 벌어져 갔다.
“말도 안 돼!”
9시 정각. 영건 아레나 시즌 1이 공식적으로 마감 되었다. 퀘스트넷은 100위 내 랭커들의 전적과 점수를 다시 계산해서 오차가 있는지 검증했다.
역시 송진호에게 걸었던 전용선은 검증 결과를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다. 오종석도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소용없었다.
황제국은 시즌 1 종료 1시간 후, 퀘스트넷에 영건 아레나 시즌 1 종료를 선언하며, 랭킹 TOP 100위를 공개했다. 그리고 1, 2, 3위에게는 각각 금은동 트로피를, 4~10위까지는 TOP 10 메달을 부여했다.
시즌 1 공식 랭킹이 공개되자 퀘스트넷 공개 채팅창에도 불이 났다. 워낙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들 TOP 10 랭커들한테 쪽지 보내! 누구든 연결되면 인터뷰 따!”
동시에 TOP 10에 선정된 게이머를 향한 게임잡지의 인터뷰 경쟁이 시작됐다. 뒤늦게 TOP 10 게이머에게 친구 추가를 하는 기자도 있는 반면, 이미 상위 랭커가 될 법한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구를 맺어 놓은 발빠른 기자도 있었다. PC 게이머 남동진 기자와 조윤권 역시 퀘스트넷에서 미친 듯이 인터뷰 섭외 쪽지를 보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진호와 한기석은 밀려 들어오는 쪽지를 보며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기석은 PC방에서 모든 손님에게 음료수를 쏘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반면 송진호는 코를 훌쩍이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송진호는 전날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게임에 나섰다. 그러나 무리한 플레이가 오히려 화근이 됐다. 송진호와 함께 PC방에서 게임하는 멤버들은 그에게 뭐라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에이씨, 몰라! 다 죽었어!”
송진호는 밀려오는 쪽지가 성가신 듯 알람을 꺼버렸다. 그는 코를 휴지로 막아버리고 다시 헤드폰을 끼고 퀘스트넷으로 향했다. 영건 아레나는 시즌 2를 오픈할 때까지 할 수 없지만, 일반 게임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상처 입은 건맨은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영건 아레나 시즌 1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도전 정신과 경쟁심을 자극했다. 그 열기는 황제국의 기대 이상이었다.
황제국은 이런 열기에 더욱 불을 붙여 줄 확장판 개발을 이어갔다. 알파 버전 이후로는 계속해서 추가되는 오브젝트와 콘텐츠를 게임에 붙여 업그레이드하고 다듬는 일이었다. 특히 황제국과 이진수는 마지막 챕터에서 검은 황소가 등장하고 컷씬과 검은 황소와 싸우는 장면을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
OST는 이번에도 유희철이 전담했다. 황제국은 그를 동방으로 불러 유철 캐릭터의 모델링과 알파 버전을 보여주었다.
“어때요? 이정도면 OST 작곡 값으로는 충분한가요?”
“햐~, 제국아!”
유희철은 감격한 듯 황제국을 꽉 끌어안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전유진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그 각도가 이진수를 닮아 있었다. 유희철은 황제국의 등을 팡팡 두드리더니 흡족하게 말했다.
“진짜 끝내준다! 이건 내가 나와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게임이야! 분명해!”
“이번에 확장판 나오면 해외 시장에도 진출할 거예요. 올 하반기에 미국부터 도전할 생각이니까 뉴욕에서 공연할 준비 해 주세요.”
“뭐? 센트럴 파크에서 버스킹 말이지? 크하하하하!”
유희철은 유쾌하며 웃었다. 유희철은 황제국에게, 황제국은 유희철에게 서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본편 OST를 작곡했던 유희철은 빠르게 확장판도 작업해 나갔다. 그는 특히 마지막에 검은 황소를 쓰러뜨리고 이록을 죽이는 장면의 감정선을 음악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고심했다.
OST 작업이 진행되는 사이 총소리 믹싱 작업도 새로 들어갔다. 황제국은 총소리의 보고가 담긴 원본 테이프를 다시 활용했다. 본편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총소리 위주로 골라 신규 캐릭터의 총소리를 새롭게 만들었다. 원본 테이프에 워낙 다양한 총소리가 들어있었던 터라 생각보다 작업이 어렵진 않았다.
특히 3단으로 변신하는 이수련의 총소리는 단계에 맞게 총소리도 변형을 가했다. 저격 모드 총소리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마음까지 서늘해질 정도였다.
일반 패키지와 콜렉터즈 에디션 제작 준비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김상혁은 오공실업 완구 제작 부서와 함께 검은 황소의 다양한 동작을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했다. 그냥 네 발로 서있는 모습부터, 앞으로 돌진하는 모습, 고개만 치켜든 모습, 앞발을 든 역동적인 모습 등등.
“이게 제일 멋있긴 한데, 가능한가요?”
황제국은 두 앞발을 치켜든 자세를 가리켰지만, 김상혁은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게 가장 좋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제작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게중심 맞추기도 그렇고 불량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요.”
“아쉽네요.”
“네, 그래서 차선책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김상혁은 검은 황소가 왼쪽 앞발을 구부리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듯한 디자인을 가리켰다. 황제국도, 차현주도 앞발을 치켜든 모양이 어렵다면 달려나가는 자세가 제일 낫다는 데 동의했다.
“그럼 이 포즈로 해서 계속 진행 과정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확장판 제작 일정에 맞추려면 좀 빠듯하네요.”
“네,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콜렉터즈 에디션 판매 방식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나눠서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온라인이라면?”
“온라인, 오프라인 물량을 각각 500개로 나누고 온라인은 뉴퀘스트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는 거죠. 선착순 500명까지 신청을 받아서 배송하고, 나머지 500개는 오공 실업에서 주요 소매점에 물량을 배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거 새롭네요!”
황제국은 한정판을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는 방식이 새롭다는 말에 민망한 듯 웃었다. 아직 믿을 만한 온라인 쇼핑몰이나 오픈마켓이 없는 터라 홈페이지로 신청받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따로 결제 시스템을 붙일 수도 없어 입금 순서와 입금자 이름을 맞춰보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최대한 다양한 게이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온라인 예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김상혁과 콜렉터즈 에디션 구성품을 확인하고, 일반판 패키지도 구성품을 논의했다. 다른 의견은 거의 일치했지만 일반판에 OST CD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콜렉터즈 에디션에 들어가야 한정판 가치가 더 올라가지 않을까요?”
“하지만 콜렉터즈 에디션은 이미 검은 황소 피규어랑 일러스트북, 엽서 등이 있는데, 거기에 OST까지 콜렉터즈 에디션에만 들어가면 일반 소비자들은 너무 소외감을 느낄 거 같아요.”
두 의견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 황제국도 고민에 빠졌다. 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럼 원작자에게 물어보죠.”
황제국은 곧바로 유희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설명을 듣자마자 외쳤다.
“무슨 소리야? 그냥 둘 다 넣어. OST가 한정판으로 들어가면 나 팬들한테 매장당한다. 안 돼, 안 돼! 나 적어도 백 년은 살 거야.”
“네, 알겠습니다!”
OST 논쟁은 유희철이 한 방에 정리했다. 본편과 확장판 배경 음악과 주제가를 꽉꽉 눌러 담을 OST CD는 일반판과 콜렉터즈 에디션 모두에 넣기로 했다.
본편에 비해 스케일이 훨씬 커진 확장판 제작 때문에 뉴퀘스트는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인턴 민소영 포함 고작 10명에 불과한 뉴퀘스트 직원들은 퀘스트넷을 운영하며 <영건 블러드> 확장판을 개발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민소영은 황제국이 당부한 전공 수업이 아니면 교양은 포기하고 뉴퀘스트 랩실과 동방을 오가며 눈치껏 할 수 있는 잔심부름을 하면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했다. 비록 아직 소스 코드에는 손댈 수 없지만 파일과 문서를 정리하고, 동방과 랩실 뒷정리를 도맡고, 물건을 전할 일이 있으면 공대 건물 사이를 뛰어다녔다. 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는 전용선도 사무실 막내 앞에서는 나쁜 소리를 삼가게 되었다.
확장판을 제작하는 사이, 영건 아레나 시즌 2가 열려 게이머들은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아레나 시즌 1이 화제가 되면서 게임 좀 한다는 사람들은 더더욱 <영건 블러드>로 몰려들었다.
99년에 들어서며 PC방은 들불처럼 번졌고, 조금 꺾이는 듯했던 <영건 블러드>의 판매량도 다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전용선은 퀘스트넷 상태를 모니터링하면서 만약 IDC로 옮기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했다. 정말 등골이 오싹한 일이었다.
확장판은 본편과는 또 다른 작업이 필요했다. 해외 진출을 위한 번역 작업이었다. 처음 <영건 블러드>를 만들 때부터 해외 진출을 기획했던 황제국은 게임에 들어가는 모든 텍스트를 따로 언어 패키지 모듈로 구성해 두었다.
<영건 블러드> 본편에는 한국어 패키지만 들어가 있었다. 확장판 한국어판에도 우선 한국어 패키지만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해외 진출을 위해서 우선 영어 번역 작업을 미리 진행하기로 했다.
“혹시 번역 맡길 만한 선배나 아니면 업체 아는 데 있으세요?”
“음, 선배들은 대부분 영문학 쪽이라 구어체랑은 좀 어울리지 않고. 내가 하기엔 아무래도 네이티브의 완벽한 뉘앙스를 살리진 못할 거 같고.”
“선배는 지금 다른 일도 많은데 번역은 힘들죠. 전문 번역가를 한 번 알아봐 주세요.”
“그럼 아는 선배 중에 통번역 대학원 다니는 분 있으니까 그쪽으로 한 번 알아볼게.”
“부탁드려요. 페이는 업계 평균 이상으로 잘 해드릴 테니까 실력있고, 책임감 있는 분으로요.”
“응, 알겠어.”
전유진 입장에서도 거의 연이 끊어진 과 선배보다 일을 맡기기 부담 없는 사람이 좋았다. 일의 성격도 통번역 대학원이 더 적합했다. 그녀는 외교부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 베테랑을 추천받아 번역을 진행하기로 했다.
시간이 총알처럼 지나갔다. 황제국은 바쁜 와중에 뉴퀘스트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고 콜렉터즈 에디션 발매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 10시부터 <영건 블러드> 콜렉터즈 에디션 예약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아직 완제품이 없어 이미지 없이 수록 품목만을 제공했다. 검은 황소 피규어 이미지만 일부 공개했다. 콜렉터즈 에디션 가격은 79,000원으로 잡았다.
25,000원으로 예정된 일반판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지만 피규어 제작비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뉴퀘스트와 오공실업에는 손해였다. 다만 한정판을 통한 화제성과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에서 마련한 상품이었다. 오공실업은 이후 피규어 금형을 다시 활용해 일반 피규어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을까?”
“쫌 걱정 되긴 해. 구성품 이미지도 따로 없는데.”
“500개 다 나가는데 며칠이나 걸릴까요?”
“글쎄? 한 2~3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설마 한정판인데 재고가 남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요.”
뉴퀘스트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어린이날을 기다렸다. 최고의 인기 게임이었지만 79,000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걱정하는 멤버도 있었다.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 오전 10시 정각.
황제국이 설정한 타이머에 맞춰 콜렉터즈 에디션 예약 페이지가 열렸다. 오픈과 동시에 뉴퀘스트 홈페이지는 다운되었다. 접속자 폭주에 의한 서버 다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