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 수강 신청
“뭐?”
“나 사실은 미래에서 왔다고. 아주 먼 미래는 아니고. 20년쯤 뒤에서. 그래서 아는 거야. 앞으로 인터넷 게임 세상이 될 거라는 걸.”
“너 진심이냐?”
“응.”
오종석이 심각하게 묻자 황제국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종석이 잠시 말없이 황제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황제국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너가 미래에서 왔다 이거지?”
“그래.”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겠네?”
“대충은. 그게 내가 기억할 만큼 큰 사건이라면 말이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거 한 번 대답해 봐.”
“물어봐. 뭐든.”
황제국은 긴장하며 친구의 질문을 기다렸다. 마치 예전에 <길드&파이트> PD가 되어 첫 경영진 보고를 할 때 같은 긴장감이었다. 부디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예상 가능한 범주 안의 질문이길 바랐다. 여전히 황제국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오종석이 입을 열었다.
“나, 미라 누나랑 사귀냐?”
“뭐?”
잔뜩 긴장해 있던 황제국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러나 오종석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경영학과 97학번 서미라 누나. OT 때 봤는데 아, 긴 생머리에 성격 밝고, 재밌고, 잘 웃고, 완전 천사가 따로 없거든. 나 미라 누나랑 사귀면 진짜 잘해줄 자신 있는데. 미래의 나는 어떻게 돼? 미라 누나랑 만나? 못 만나? 못 만나면 연애는 하지? 그렇지?”
“됐다······.”
“야, 왜 질문에 답을 안 해? 미래에서 왔다며? 그럼 이 정도는 알 거 아냐? 나 대학 가서도 연애 못 하는 거야? 어? 대학 가면 연애한다는 거 다 거짓말인 거야???”
오종석은 황제국에게 매달렸지만, 황제국은 외면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종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야,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그럴듯하게 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속아 줄 수가 없잖아.”
“그러게. 내가 널 너무 쉽게 봤나 봐.”
“이 짜식이~!”
황제국도 그저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다시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갑자기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황제국은 자신의 비밀을 평생 혼자만 간직하기로 다짐했다.
딴생각을 털어버리고 황제국은 번들 제작 작업에 힘썼다. 그는 대학 입학 전에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업을 할수록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맵 에디터 UI를 보통 사람들도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변경하는 작업에 손이 많이 갔다. 맵 에디터 사용법에 대한 매뉴얼도 작성해야 했다. 잡지 번들은 한 번 발행하면 버그를 발견해도 수정용 패치를 배포하기 어려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내야만 했다.
“역시 뭐든 처음 할 때부터 완벽하고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건데.”
황제국은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한 달 전의 자신을 찾아가서 때려주고 싶었다.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데 복병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수강 신청이었다.
“고작 수강 신청 때문에 학교까지 가야 하다니······.”
“야, 그럼 수강 신청하는데 학교를 가야지. 그럼 뭐, PC 방에서 하냐?”
“당연히···가 아니고, 그래, 니 말이 맞다.”
98년, S대 수강 신청은 컴퓨터로 하기는 했다. 그런데 학교 내부망인 인트라넷에 접속해야 하는데, 인트라넷 접속이 오직 학교 전산실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모든 학생이 수강 신청을 위해 학교 전산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전산실 이용은 선착순이었기 때문에 전날 밤부터 각 건물 전산실마다 학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황제국도 오종석, 차현주와 함께 학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셋은 교문에서 헤어져 각자의 과방으로 향했다. 1학년은 수강 신청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선배들의 인도를 받아 단체로 모여서 수강 신청을 했다. 그래서 OT에 참석하지 않거나, 지방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새내기들은 과방에서 미리 선배들이 나눠 준 강의목록을 보면서 전공필수와 선택, 교양 과목 등을 골라 시간표를 짰다. 그러면 선배들이 시간표를 보고 이런저런 코치를 해주었다.
황제국은 그냥 학교 인트라넷을 해킹해서 수강 신청을 해버릴까 1초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들켰을 경우, 득보다 실이 너무 컸다. 어차피 그는 학교에 다니다 창업할 계획이라 학점에 연연할 이유도 없는데 굳이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었다.
황제국은 대충 시간표를 짰다. 어차피 그가 꼭 수강하고 싶은 과목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젯밤에 짠 코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2학년 선배가 말을 걸었다.
“벌써 끝냈어? 내가 한 번 봐줄까?”
“아, 네.”
“응? 다 한 거 맞아? 뭐가 많이 비어 있는데?”
2학년 고선영은 황제국의 시간표를 보고 조금 놀랐다. 2학점짜리 교양 수업 하나, 전공 수업 3개를 골라 11학점이 전부였다.
“다른 과 전공 수업은 뭐가 있나 좀 둘러보고 정하려고요.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 같은 쪽으로요.”
“원래 문과로 가고 싶었어? 설마 문학청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기왕 대학에 왔으니까 가능하면 폭넓게 배워보고 싶어서요.”
“흐음, 컴공이 그렇게 만만한 과가 아닌데. 그리고 우리 같은 공돌이가 인문학 같은 뜬구름 잡는 얘기는 따라가기 더 힘들 테고. 그래서는 학점 따기 쉽지 않아.”
“괜찮아요. 학점은 크게 상관 안 해서요.”
“나중에 후회할 텐데. 어? 그런데 이 수업, ‘게임 엔진 분석과 응용’ 이거 들으려고?”
“네.”
“이건 많이 어려울걸? 처음 생긴 과목이라 확실치는 않은데, 이광철 교수님 수업이잖아. 교수님이 뭐랄까, 좀 독특해. 말도 좀 막하는 편이고. 자기 기준에 못 미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C, D, F야. 심지어 출석 다 하고, 시험 다 보고, 과제까지 냈는데도 F를 준 적도 있어.”
당연히 황제국도 잘 알고 있었다. S대 컴퓨터공학과 이광철 교수는 학생은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또라이였다. 고선영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말렸지만, 황제국은 그냥 웃고 있을 뿐이었다.
“너 완전 고집쟁이구나? 그래, 아직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을 때긴 한데. 수강 신청은 정정 기간이 또 있거든? 첫 주에 교수님 말씀 잘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정정 기간에 꼭 바꿔.”
“네,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선영은 황제국이 입시 때문에 꽉 눌려있던 지적 탐구의 기회로 여기며 꿈에 부풀어 있는 철부지쯤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황제국의 시간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게임 엔진 분석과 응용’은 그가 이번 학기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강의였다. 수업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진수 선배. 내 기억에 분명 이진수 선배가 이 과목을 듣는다. 선배와 연결 고리를 만들려면 이 수업이 제일이야.’
96학번 이진수는 98년 1학기에 처음 개설된 게임 엔진 분석과 응용 강의에서 유일하게 A+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 뒤 강의가 사라질 때까지 다시는 A+를 받은 학생이 나오지 않았다. 이진수는 이 과목의 유일한 A+로 컴공과의 전설이 되었다.
이진수는 S대 컴공 출신 중에서 프로그래밍 능력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진짜 실력자였다. 만약 그를 끌어올 수만 있다면 게임 개발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 분명했다.
“자, 이제 다들 시간표는 짠 거 같으니까 슬슬 움직이자.”
과 대표의 인솔을 받으며 컴공과 학생들이 우르르 전산실 앞으로 이동했다. 2월의 찬바람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새벽에 무사히 수강 신청을 마친 황제국은 다시 과실로 돌아가 다른 동기들과 함께 너저분한 소파에 웅크린 채 쪽잠을 잤다.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국은 새벽에 조용히 과실을 나와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외투만 벗은 채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어느새 3월이 왔다. 황제국은 IMF의 불안에도 온갖 설렘으로 가득한 캠퍼스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 꽃은 피지 않았지만, 캠퍼스는 젊음의 생기로 가득했다.
황제국 역시 가슴 가득 설렘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다른 설렘이었다.
그에게 대학은 열려있는 지적 탐험의 놀이터였고, 숨어있는 인재의 보고였다. 그는 게임을 만들면서 논리적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완성도 있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곧 재미있는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게임의 재미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의 결합이었다.
특히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PD가 얼마나 많은 영역에 걸쳐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몸으로 느꼈다. 다시 대학생이 된 것은 그에게 큰 기회였다. 대학만큼 게임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를 마음껏 배울 수 있는 장소도 없었다.
S대는 황제국이 속한 공대 외에도, 문학, 역사, 미학, 심리, 경제, 경영, 법학, 행정 등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가르치는 종합 대학이었고, 미대와 음대까지 있었다. 황제국은 이왕 다시 대학을 다니는 김에 예전과는 전혀 새로운 강의를 들을 생각이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그는 전혀 새로운 만남도 기대하고 있었다.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모여야 한다.
멋진 그래픽을 위해서는 뛰어난 비주얼 아티스트가 있어야 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위해서는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가 있어야 한다. 빈틈없는 게임 시스템을 위해서는 섬세한 기획자가 필요하고, 게임의 분위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감각 있는 작곡가와 사운드 디렉터가 필요하다. 또한 이들이 만든 콘텐츠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고, 완성도 있게 만들어 줄 프로그래머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조율하고, 하나의 게임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원대한 비전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PD가 필요하다. 황제국은 게임 PD의 입장에서 S대를 바라봤다.
영입 1순위는 같은 과 이진수 선배지만, 아마 캠퍼스 곳곳에 아직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재가 숨어있을 것이다. 오종석과 차현주를 발굴했듯이 학교 안팎에서 함께할 동료를 모으고,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 상상만으로도 황제국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었다.
“야, 제국아. 오늘 신입생 환영회···.”
“어, 미안. 나 일이 있어서. 나 못 간다고 좀 전해줘.”
황제국은 PC 게이머 4월호 번들 게임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입학 첫 주 모든 행사를 패스했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만 개발하려니 시간이 빠듯했다.
‘어차피 첫 주는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이니까.’
결국 첫 주 수업을 하나, 둘 빠지다가 셀프-크런치 모드(Crunch Mode, 개발 막바지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하는 비상 근무 체제)에 들어가 학교도 제끼고 개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삼국지:공성전 - PC 게이머 번들 ver.>과 맵 에디터 수정을 완료했다.
제작을 마친 황제국은 조윤권과 함께 PC 게이머 사무실을 방문했다. 조윤권이 흥미를 느낄 것 같아 불렀는데, 게임 잡지사에 방문한다고 하니 역시나 냉큼 달려왔다.
“오~~, 황제국 학생. 어서 와요. 편집장님! 이 친구가 <삼국지:공성전>을 만든 황제국입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반가워요. 반가워.”
황제국이 들어가자 남동진 기자와 김성진 편집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기자들은 일하는 척하면서 호기심에 황제국을 힐끔거렸다.
“우와~, 여기가 PC 게이머···!”
조윤권은 황제국 뒤에서 두리번거리며 사무실을 구경했다. 사무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책상마다 각종 한미일 게임 잡지가 뒤죽박죽 쌓여 있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벽에 마련된 책장에는 잡지뿐 아니라 온갖 컴퓨터와 콘솔 게임 패키지가 마치 도서관처럼 쭉 꽂혀 있었다. 조윤권은 그 앞에서 넋을 잃고 떠날 줄을 몰랐다.
“윤권아, 잠깐 구경하고 있어. 나 얘기 좀 하고 올게.”
“어어~, 얼마든지.”
편집장 자리로 이동한 황제국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건넸다. 안에는 여러 장의 플로피디스크에 <삼국지:공성전>과 맵 에디터, 설명서 등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김성진 편집장이 케이스를 받아들더니 입으로 가져가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황제국은 움찔했지만 침이 케이스를 뚫고 플로피디스크까지 침범할 리는 없었다. 편집장에게서 케이스를 넘겨받은 남동진 기자는 등 뒤에서 몰래 옷소매로 케이스를 닦고 또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