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 프로젝트 영건(Project Young Gun)
“아···, 제목이요?”
“응, 분명 멋진 이름이 있겠지? 퀘스트 엔진처럼?”
“아, 그건······.”
황제국과 이진수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냥 ‘FPS’로 통칭하며 게임을 만들어 왔지 아직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이광철 교수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없다면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황제국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프로젝트, 프로젝트 영건입니다.”
“프로젝트 영건? 그게 제목이야?”
“아니요. 정식 제목은 아니구요. 말 그대로 프로젝트명이에요. ‘영건(Young Gun)’은 웨스턴 영화에서 젊은 총잡이를 부를 때 많이 쓰는 말이거든요. 저희 FPS 장르가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이라서요.”
“아하! 그럼 주인공인 장건이 바로 영건인 거구나?!”
“그런 셈이죠. 하하하!”
“멋진데?! 프로젝트 영건! 주인공 라이플에 리볼버처럼 실린더 돌아가는 건 어떻게 생각한 거야? 총 쏠 때마다 한 칸씩 돌아가는 거 진짜 멋지던데?”
“아, 그건 스팀펑크답게 총 장탄수랑 화력을 높이려고 소총에 실린더를 붙인 건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진짜 그런 총이 있었더라구요.”
“오~, 그래?”
“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대중화되지는 못했지만요. 저도 신기했어요.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다 비슷한가 봐요.”
“그렇지. 인터넷이라는 것도 사실은 아~~주 예전부터 있던 아이디어였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아이디어보다 실행이 중요한 거야. 그런 면에서 퀘스트 엔진과 프로젝트 영건은 아~~~주 훌륭해. 그럼 다음 주에 새로운 빌드로 보는 거지, 우리?”
“네! 다음 주, 다음 주 좋습니다.”
“추, 충분합니다. 브브브.”
“좋아! 그럼 계속 수고하고.”
황제국과 이진수는 이광철 교수에게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검증과 토론에 휘말려 몇 시간이 후딱 지나 있었다.
“우, 우리가 언제 프로젝트 이름을 붙였었지?”
“그런 적 없어요. 그냥 떠오르는 거 아무거나 말한 거예요.”
“나, 난 너무 그럴싸해서 나 몰래 붙힌 이, 이름인 줄. 치이이익···!”
“우리는 형 몰래 뭐 안 해요.”
“나도 알아.”
이진수가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황제국은 이제 그가 입술을 찌그러뜨리는 미묘한 각도의 차이를 알아차렸다.
남들 눈에는 이진수가 입술을 찌그러뜨리는 게 모두 똑같아 보였다. 마치 단 하나의 얼굴로 기쁨, 슬픔, 짜증, 분노, 외로움, 의심, 갈망, 냉소, 후회, 공포 등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스티븐 시걸처럼.
하지만 황제국은 그의 입술 모양에서 미묘한 차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농담’이었다. 황제국도 마주 보고 웃었다.
“아! 근데 아까 방에서 교수님이 지적했던 내용 기억하세요? 코드 수정해야 할 게 제법 있던데.”
“전부 기, 기억하고 있어.”
이진수가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황제국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형이 있어서 진짜 다행이에요. 그럼 동방으로 갈까요?”
“그, 그전에.”
“네.”
“우유 하나 먹자. 배, 배고파.”
“그럴까요?”
두 사람은 매점으로 향해 평소와 다름없이 단지 모양으로 생긴 우유를 샀다. 퀘스트 엔진 v0.7을 과제로 제출한 바로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다시 동방에서 엔진 수정에 들어갔다.
이제는 이광철 교수라는 든든한 버프(Buff, 게임에서 주로 스킬 등의 강화 효과를 뜻함)를 얻어 완성도를 한 단계 더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광철 교수와의 미팅 이후 이진수는 한층 동기부여가 된 듯했다. 물리 엔진 오류로 잠시 삐끗했던 게임 엔진 개발이 부스터를 받고 속도가 더 빨라졌다.
오종석, 차현주, 전유진 등 다른 멤버들도 나름대로 기말고사를 마쳤다. 기말고사 내내 도서관과 강의실마다 꽉꽉 차 있던 대학생들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썰물처럼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지방에서 올라와 기숙사에 살거나, 자취하던 학생들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각종 동아리와 대학생들은 농활, 여름 여행, 엠티 등 새로운 계획을 짜느라 분주했다. 남들은 어떻게 하면 알차게 놀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여름방학이었다.
하지만 뉴퀘스트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주, 당장 월요일부터 뉴퀘스트는 오후에 방학 첫 정기 미팅을 가졌다. 그날도 이진수와 게임 엔진 수정을 하고 있던 황제국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차현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야, 차현주! 너 머리가?”
“하~, 둔한 제국이도 알아볼 정도니 머리한 보람이 있네. 어때?”
“야, 머리를 이렇게 지지고 볶아 놨는데 세상에 누가 모르냐?”
황제국은 물론 이진수까지 신기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차현주 주위를 360도로 돌았다. 차현주는 긴 머리를 7등분해서 귀밑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일곱빛깔 무지개색으로 염색을 했다. 그녀가 머리를 넘기자 무지개가 물결을 쳤다.
“예쁘네. 머리 잘 됐다.”
“그래? 잘 됐다. 이거 하느라 돈도 돈인데 미용실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느라 지루해 죽을 뻔했거든. 그래도 중간고사 과제 낸다고 받은 스트레스 확~ 날아갔어.”
“과제 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네.”
“정물 과제는 어떻게 대충했는데, 자유 주제가 하나 있거든? 근데 내가 요즘 스팀펑크에 꽂혀있다 보니까 뭐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진짜 작업실에서 벽에 머리를 얼마나 박았는지.”
“어···,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미안해지네.”
“니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서 결국 그냥 우리 캐릭터 장건 컨셉 아트 그려서 냈어.”
“진짜? 기말 과제면 중요한 건데 그래도 돼?”
“나도 몰라. 대신 그림은 내가 봐도 기깔나게 뽑혔어. 장건이 카우보이모자 쓰고, 시그니처 라이플 딱 들고 석양이 지는 황무지에서 한쪽 무릎 꿇고 무언가를 겨냥하는 그림이야. 나중에 우리 동방에 걸어놓자.”
“오, 그거 좋은데?”
뉴퀘스트는 그렇게 컨셉 아트 하나를 번외로 추가했다. 오종석과 전유진도 동방에 오자마자 차현주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종석은 기절초풍하며 펄쩍 뛰었다.
“야! 너 머리가 왜 이래? 이러면 머릿결 엄청 상하는데?”
“뭐래? 니가 왜 내 머릿결 걱정을 하고 있냐? 걱정 마. 이렇게 몇 번 하다가 개털 되면 싹뚝 잘라서 단발 해 버리면 되니까.”
“현주 단발도 예쁘겠다.”
“그쵸? 잘 어울릴 거 같죠, 언니?”
뉴퀘스트는 잠시 차현주의 무지개 머리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왠지 오종석만 구석에서 혼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잠시 잡담이 이어지다가 다시 황제국이 개발 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먼저 프로젝트명이 확정되었다는 깜짝 소식을 정했다.
“프로젝트명? 그게 뭐야?”
“보통 게임을 개발할 때 게임 제목 대신 가제처럼 프로젝트명을 붙이거든. 근데 우린 그냥 FPS 게임으로 쭉 불렀던 거라. 이번에 프로젝트 네임을 붙였어.”
“갑자기?”
“어, 좀 그렇게 됐어.”
배후 사건을 알고 있는 이진수가 뒤에서 입술을 기묘하게 찌그러뜨렸다. 전유진이 물었다.
“그래서 회장님, 프로젝트명은 뭐야?”
“프로젝트명은....”
황제국이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프로젝트 영건’이라고 적었다. 다들 입으로 몇 번씩 발음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건, 프로젝트 영건. 괜찮은데? 웨스턴에서 자주 나오던 단어기도 하고.”
“주인공 이름이 장건이니까 그거하고도 잘 어울리고. 좋다.”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오종석이 말했다.
“그럼 아예 이참에 게임 이름을 짓는 게 어때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럴까?”
“그것도 괜찮겠다. 솔직히 우리 ‘프로젝트 영건’ 시작한 지 거의 넉 달 째인데 생각해보니까 아직 이름도 없었어.”
“메인 플롯이랑 중심 캐릭터도 잡히고 했으니까. 콜!”
오종석의 제안에 다들 찬성했고, 황제국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학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갈 타이밍에 이름을 정하는 것도 좋은 결정 같았다.
“좋아요. 그럼 생각나는 이름 막 던져보세요.”
“음··· 만주 웨스턴이니까······. <만주의 무법자>?!”
“야, 그러면 <석양의 무법자> 짝퉁이잖아. 그리고 주인공 장건이 무법자도 아니고.”
차현주의 의견에 오종석이 즉각 태클을 걸었다. 그래도 황제국은 화이트보드에 ‘만주의 무법자’를 적었다.
“어디까지나 아이디어로 던지는 거니까. 여기서 좋은 이름이 나올 수도 있잖아.”
“그래, 우리 뉴퀘스트 규칙 몰라? 아이데이션 할 때는 태클 금지!”
이어서 전유진이 말했다.
“만주에서 제일 유명한 도시가 하얼빈이니까···, 이런 건 어때? <하얼빈의 총알>.”
“음, 멋있다!”
차현주가 전유진을 돌아보자 그녀의 무지개 머리가 찰랑거렸다. 황제국은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너무 안중근 의사가 생각나서, 독립운동에 관한 게임으로 보일 것 같았다.
“또? 또 다른 거 없어요?”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이라···. 이런 건 어떨까? 약간 사나이의 로망과 고독을 자극하는 이름으로, <장건 블루스>.”
“으음······.”
황제국은 오종석의 제안에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지만 노련하게 참아내고 화이트보드에 <장건 블루스>를 적었다. 이번에는 여지없이 차현주가 태클을 걸었다.
“노땅 같애.”
“야, 태클 금지거든?!”
차현주는 얼른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 이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프로젝트 이름을 활용해 보자. 영건에, 스팀펑크니까 불? 파이어? <영건&파이어>?”
“장건이 배신자한테 복수하러 떠나는 거니까, <영건 리벤지>!”
“스팀펑크 느낌을 살려서, <스팀 라이플>!”
“대륙대륙한 느낌으로, <만주랜드>. 아니다. 이건 좀 유치하네. <만주월드>.”
<만주 보이>, <만주 건맨>, <만주 레인저스> 등 만주와 관련한 아이디어가 계속 나왔다. 그런데 어째선지 황제국은 ‘만주’가 들어간 이름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만주라는 지역과 대륙의 이미지는 좋았지만, 작품 제목으로의 매력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나올 만큼 나온 거 같은데, 어떤 이름이 마음에 드는 지 한 번 이 중에서 골라볼까요?”
수십 개의 아이디어를 놓고 각자 뭐가 좋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견이 엇갈리긴 했지만 <영건&파이어>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확실히 좋은 거 같아요. 파이어는 불도 되고, 총을 쏘는 것도 되니까.”
오종석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제국은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사실 이름은 다양한 뜻을 가지는 것보다 강렬한 인상, 확실한 느낌을 주는 게 더 좋거든요. 그래서 좀 고민이 되네요.”
황제국의 말에 <영건&파이어>로 모이던 분위기가 잠시 멈췄다. 그는 다시 화이트보드를 쭉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이어보다 더 강하고, 강렬한 느낌이 없을까? FPS 게임답게 좀 더 강렬하고, 피가 튀는···?!’
순간 ‘피’에서 황제국은 멈칫했다. 그는 <영건&파이어> 옆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었다.
“<영건 블러드(Young Gun Blood)>?!”
전유진이 황제국이 적은 아이디어를 완벽한 네이티브 발음으로 소리 내 말했다. 순간 황제국과 뉴퀘스트 멤버들은 소름이 확 돋았다. 드디어 딱 맞는 제목을 찾은 것 같았다.
“어때요? 전 불보다는 더 직접적인 피가 좋을 거 같은데요?”
“나도 찬성. 변절자에게는 피의 복수를 내려야지!”
“나도. 우리 게임의 스피드와 박진감에는 ‘블러드’가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나도 이편이 나은 것 같아. 거친 서부 느낌이 확 느껴져.”
“베리 굿.”
이진수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만장일치였다. 황제국은 화이트보드에 있는 이름들을 싹 지우고 ‘영건 블러드’를 크게 적고 이름을 선포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드는 게임은 <영건 블러드>입니다. 이번 방학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예에에에~!!!!!!”
“잘 부탁드립니다!”
뉴퀘스트 동방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게임에 이름까지 붙이자 이제 정말 실체가 생긴 것 같았다. 황제국은 앞으로 방학 동안 이어질 강행군의 시작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