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 돈 많이 벌어올게
“네? 게임을 업그레이드요? 어떻게 말입니까?”
“음···, 그걸 지금 당장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내용이 워낙 많아서요.”
황제국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사실 <삼국지:공성전>은 이렇게 작은 규모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좀 더 확장된 컨셉을 생각했었는데 제가 방학 하는 동안 개발을 끝내야 해서 축약해서 만들었죠.”
“아아~! 그렇군요.”
물론 순간적으로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오종석이 옆에 있었다면 눈을 똥그랗게 떴을 것이다. <삼국지:공성전>은 처음부터 30일이라는 시간제한을 걸고 작게 기획했던 게임이었다. 그러나 조윤권은 아무런 의심 없이 황제국의 말을 후지타에게 전했다.
스튜디오 X가 게임 스테이지를 가상의 전투로 만들겠다며 고증의 빗장을 벗긴다는 말을 듣는 순간, 황제국의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폭발했다. 그는 이 게임의 컨셉과 형식을 만든 사람이다. 그보다 이 게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고, 이 게임의 확장성을 그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후지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내용을 모르니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 라이선스 계약은 후지타 씨가 결정합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다른 제안을 주시면 제가 본사로 돌아가 사장님과 논의를 해야 합니다.”
“음······.”
황제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설령 후지타에게 임팩트를 주더라도 그는 실무자일 뿐이었다. 그가 돌아가서 전달을 잘못하면 황제국이 원하는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아 협상을 질질 끌면 시간도 많이 소모하게 된다.
지금 황제국에게 돈 만큼이나 시간도 소중한 자원이었다. 게임 엔진 개발과 게임 컨셉, 콘텐츠 개발을 동시에 해야 하는 시점에 아무리 큰돈이 걸린 일이라도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라이선스를 원하는 스튜디오 X만큼이나 지금 황제국도 몸이 달았다. 왜냐하면 <삼국지:공성전>을 업그레이드할 아이디어를 생각하다가, 동시에 만주 웨스턴 FPS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도저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엉뚱하게 <삼국지:공성전> 미팅을 하면서 풀려버렸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에서 황제국은 마음을 굳혔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미스터 후지타.”
“어떻게요?”
“다음 주 수요일에 제가 일본 스튜디오 X를 방문하겠습니다. 그때 게임을 업그레이드할 아이디어가 뭔지 사장님과 임직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겠습니다. 그걸 보고 전체 비용을 다시 얘기하면 어떨까요?”
“아,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다음 주 수요일에 사장님 스케줄을 확인해야겠지만 아마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야 베스트지요. 당연히 비행기 티켓과 숙박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숙박은 필요 없습니다. 저희 두 명의 왕복 비행기 티켓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미스터 황과 미스터 조, 이렇게 두 분이죠? 그럼 저도 본사로 돌아가 미팅 내용을 보고 드리고, 프레젠테이션 일정에 대해서 다시 메일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황제국은 빨리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필요했고, 후지타 역시 무박 일정 출장이라 곧장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제국은 급히 오종석과 차현주에게 삐삐를 쳤다. 그는 삐삐를 치면서 순간 짜증이 났다. 매번 연락할 때마다 삐삐를 치려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휴대폰이 절실했다. 이미 편리함을 누려본 사람에게 휴대폰이 없다는 건 너무나 답답했다.
‘이번에 돈 벌면 바로 휴대폰부터 개통해서 싹 돌려야지. 답답해서 못 살겠다.’
두 사람에게 연락한 황제국은 조윤권과 함께 종로로 향했다. 그들은 긴급회의를 위해 카페 겸 문화 공간 진달래 영토에 들어갔다. 알프스 소녀처럼 차려입은 종업원이 인원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안내했다.
“제국아, 뭘 어쩌려고?”
“미안. 종석이랑 현주 오면 전부 얘기해 줄게. 잠깐 나 생각부터 정리하고.”
황제국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늑한 공간에서 노트를 꺼내 들었다. 조윤권은 옆에서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종석과 차현주가 도착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 윤권이도 있네?”
“어서들 와! 얼른 앉아 봐.”
두 사람은 황제국의 재촉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황제국은 스튜디오 X와의 미팅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했다.
“뭐??? 2천만원? 2천만원을 준다고? 우리 게임을 자기들이 다시 만들어서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낼 수 있게 해달라면서? 장난 아니다!”
“정확히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아니라 모든 콘솔에 대한 권리야.”
“그래도! 그게 어디야? 솔직히 콘솔은 생각도 안 했는데 완전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거잖아?”
“그래서? 제국이 넌 뭐라 그랬어? 수락했지? 수락한 거지?”
두 사람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황제국을 바라봤다. 하지만 황제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수락 안 했어.”
“아, 왜에에~????”
“누가 봐도 엄청 좋은 기회 같은데?”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
“2천만원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물론 있지. 들어 봐.”
황제국은 스튜디오 X에 하려는 제안을 세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국의 설명에 빠져 들었다.
“······.”
“우와~, 진짜 좋다 이거!”
설명이 끝나자 차현주가 감탄했다. 조윤권도 뒤이어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게임의 기존 색깔은 유지하면서 훨씬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하겠다.”
“그러게. 분명 그렇기는 한데.”
오종석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야, 나도 황제폐하 너랑 다니다 보니까 생각이 옮았나 보다. 안 될 수도 있는 이유를 찾게 되네.”
“괜찮아. 말해 봐.”
“이렇게 하면 정통 삼국지 팬들은 좀 실망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골수팬이 많잖아? 삼국지 게임에는.”
“분명 그런 우려도 있지. 타당한 지적이야. 하지만 스튜디오 X가 노리는 건 탄탄한 삼국지 팬을 끌어오는 게 아니야. 그보다는 간단하면서 재미있는 게임으로 자사 게임 타이틀을 늘리는 거지.”
“흠, 스튜디오 X의 니즈하고 잘 맞는다는 거구나?”
오종석이 경영학과 학생답게 말했다.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기존 삼국지라면 관심 없어 하던 유저를 끌어오는 게임이 될 수도 있어.”
“오~, 그러네. 반대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제국이 너 진짜 천재구나.”
“그래서? 그 얘기 하려고 우릴 급하게 부른 거야?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역시 차현주.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황제국은 급하게 모이라고 한 이유를 설명했다. 조윤권에게, 오종석에게, 차현주에게 각각 부탁할 일이 있었다.
“어때? 가능할까?”
“제국이 너가 일본까지 간다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맡겨둬!”
“윤권이 너는 어때? 가능할까?”
“당연하지. 토요일에 PC 게이머 근무 끝나고 바로 너희 동방으로 갈게.”
“다들 고마워.”
황제국이 웃으며 말했다. 빠듯한 일정이라 황제국은 진달래 영토에서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세 사람에게 <삼국지:공성전> 업그레이드 컨셉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컨셉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생각을 구체화하고 동시에 검증했다. 세 사람도 그때그때 의문이 드는 부분을 물어보면서 빈틈이 없는지 찾았다.
그것만으로 진달래 영토의 기본 타임인 3시간이 훌쩍 지났다. 세 사람은 주말에 뉴퀘스트 동방에서 다시 만났다. 차현주는 황제국이 부탁한 그림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았다. 오종석은 황제국이 대충 정리한 컨셉 문서를 교정하면서, 일정한 양식에 맞춰 보기 좋게 편집했다. 조윤권은 황제국의 프레젠테이션 스크립트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그는 다음 수요일에 통역으로 황제국과 함께 일본에 갈 예정이었다.
“진짜 고맙다, 윤권아. 수요일에 수업까지 빠져가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고맙지. 수업 하루 빠지는 거 가지고 뭘. 엄청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해외 게임 회사에 가서 네가 프레젠테이션하는 걸 구경할 기회를 고작 수업 때문에 빠지면 말이 되냐?”
그저 게임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 회사의 역사와 배경, 만드는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조윤권에게도 이번 프레젠테이션 미팅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그는 설령 자기 돈을 내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참여할 생각이었다.
한참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방 문이 열리고 이진수가 들어왔다. 이진수가 주말에 예상치 못하게 꽉 차있는 동방을 보며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자기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기 일로 돌아갔다.
수요일 아침, 모든 준비를 마친 황제국은 아침 일찍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황제국은 수능을 본 후 여권을 만들어 두었고, 조윤권은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일본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오종석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황제국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오종석은 막무가내였다.
“야, 니가 일본에 돈 벌러 간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냐? 이렇게 배웅이라도 해야지.”
“누가 들으면 내가 팔려 가는 줄 알겠다. 알았어. 내가 일본 가서 돈 많이 벌어올게. 그 돈으로 너랑 현주 컴퓨터도 사고, 동방에 플스(플레이스테이션)랑 다른 콘솔도 사자.”
“진짜? 알았어. 있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꼭 성공해서 돌아와!”
앞뒤가 안 맞는 오종석의 배웅을 받으며 황제국과 조윤권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일본에 도착하자 후지타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후지타의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스튜디오 X로 출발했다.
“괜찮아, 제국아? 난 벌써 긴장된다.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본래 계획은 황제국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조윤권이 옆에서 일본어로 통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황제국은 조윤권이 번역한 스크립트를 밤을 새워 통째로 외웠다. 주말 내내 조윤권이 황제국 옆에 붙어서 발음을 한국어로 써주고, 교정해주었다.
예비용으로 스크립트 카드도 준비했고, 막히면 옆에서 조윤권이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은 황제국의 몫이었다.
“준비는 잘 하셨습니까? 사장님은 물론 스튜디오 X의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후지타의 질문에 황제국은 뒷자석에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황제국 역시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일본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는 곧 도쿄에 있는 스튜디오 X에 도착했다. 황제국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스튜디오 X는 도쿄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비즈니스 빌딩 한 층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인테리어는 무난했지만 깔끔했고, 벽에는 스튜디오 X에서 개발한 게임 포스터와 캐릭터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자, 이쪽으로. 회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후지타가 황제국과 조윤권을 대회의실로 안내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의 눈이 모두 황제국에게 쏠렸다.
테이블 가운데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자 모두 뒤따라 우르르 일어났다. 그 남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한 눈에도 그가 스튜디오 X의 사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