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회 - 하고 싶은 일 vs. 할 수 있는 일(2)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황제국과 전유진은 눈을 마주 본 체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이진수까지 손을 멈추고 있었다.
전유진의 어깨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낼 것처럼 상기된 얼굴이었다. 황제국은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죠. 나도 알아요. 내가 무슨 문학에 재능이 있다고. 내가 잠깐 착각을 했나 봐요. 미안해요.”
“네, 선배님이 착각하신 것 같아요.”
“네, 착각. 하하하. 그런가 봐요.”
“맞아요, 확실히 그래요. 저는 선배님의 문학성이 뛰어나서 저희 동아리에 와달라고 말씀드린 게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면요?”
“제가 하나하나 설명 드릴게요. 문학성이라는 게, 사실 뭐라고 정의하기 참 어려운 거지만, 제가 게임 개발자 입장에서 한번 말해볼게요. 일단 주제를 볼까요? 선배님은 게임 할 때 ‘이 게임 주제가 뭐지?’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
전유진은 황제국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게임 매니아는 아니었지만 몇 가지 게임은 상당히 집요하게 플레이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재미있게 했던 <대항해시대 2>를 하면서도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무슨 배를 사고, 누구를 고용하고, 어떤 루트로 항해할까를 고민했다. 오직 게임의 목표, 클리어를 위해 해결 해야 하는 과제와 방법만을 생각했다.
“아마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게임에 주제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테트리스> 같은 퍼즐은 논리성이 바로 주제죠. 장기나 체스, 바둑이 전략이 주제가 되는 것처럼요. <대항해시대 2>도 각 캐릭터마다 테마가 있잖아요. 다만 아주 단.순. 하죠.”
전유진도 그 말에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게임에서 주제가 단순한 건 당연해요. 그래야 게이머가 캐릭터에 이입하고 몰입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고전문학도 전부 주제가 심오한 건 아니잖아요?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는 거죠.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가 두 사람의 사랑만큼 깊은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릴 수도 있지만요.”
“풋!”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에 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업에서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해석이 재밌었다. 물론 교수님께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서너 시간은 잔소리를 들을 말이기는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을 볼까요? 훌륭한 문학 작품은 유명한 문장이 있잖아요? 선배님이 패러디한 카프카의 <변신> 첫 문장도 그렇구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문장도 있고요.”
“그렇죠. 잘 아네요.”
“수능 공부만 해도 다 나오는 작품이니까요. 그런데 선배님은 게임 하면서 생각나는 문장이 있어요?”
“음···, Press Start Button(프레스 스타트 버튼, 시작 버튼을 누르세요)?”
이번에는 황제국이 피식 웃었다.
“아마 Insert Coin(인서트 코인, 동전을 넣으세요)이랑 같이 게임계에서 제일 유명한 두 문장일 거 같네요.”
“그러게요.”
“게임은 아름다운 문장을 추구하지 않아요. 대체로 그래요. 대사나 메뉴 정도를 제외하면 나오는 텍스트가 별로 없기도 하구요.”
“확실히 그런 거 같아요.”
“제 말뜻 아시겠어요? 결코 선배님 능력을 깎아내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냉정하게 게임 개발에는 크게 의미 없는 재능이기 때문이에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들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겠네요, 이제.”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문학성이 아니라 선배님의 다른 능력 때문에 함께 하고 싶어요.”
“능력이요? 글쎄요. 난 솔직히 나도 내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에요. 선배님에게는 저희가 찾는 아주 중요한 능력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나도 한번 들어보고 싶다. 내 능력.”
“그건 바로 뒷이야기가 궁금하게 이야기를 쓰는 능력이에요.”
황제국이 진지하게 말했다. 전유진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황제국은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 소설은요. 계속 읽어 보고 싶어요. 다음이 궁금하니까. 그건 문학성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게임을 만드는 저희한테는 정말 필요한 능력이에요. 저희도 그렇거든요. 폼나고 으리으리한 게임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끝까지 하고 싶어 하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재미있는 게임······.”
“네, 한 번이라도 해보면 너무 재밌어서 주위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고, 게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게임이요. 바로 우리가 선배님 소설을 읽었을 때와 똑같은 경험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습니다.”
“후······.”
전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국은 자기가 뭔가 잘못했나 걱정이 들었다. 전유진은 예민한 사람이었고, 그는 그녀를 몰아세울 만큼 몰아세웠다.
결국 그녀의 눈가에 약하게 물기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황제국은 자기가 선을 넘어 버린 것인가 우려했다. 전유진은 민망한 듯 눈에 먼지를 털어내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그런 말 들어보는 거 언니 이후로 처음이네요. 언니가 매번 그랬어요. 뒤에 더 없어? 뒤에 더 없어? 없다고 하면 막 아쉬워하고. 그래서 참 열심히 썼던 거 같아요. 재밌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1년 전이 떠올랐다. 영문학과에 입학한 후, 과에 ‘학회’라는 과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동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문학과답게 문학 학회가 있었고,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읽고 토론을 한다고 했다.
전유진은 당연히 문학 학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창작 소설을 합평하는 시간에 설레는 마음으로 소설을 제출했다. 그렇지만 주변의 반응은 기대하고는 전혀 달랐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왜 이런 걸 써······?”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음, 재밌었어. 근데 읽고 나서 별로 남는 건 없는 거 같아.”
“이런 것도 소설인가?”
문학 학회는 ‘모든’ 문학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문학 범주에 장르 소설은 없었다. 전유진은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전유진을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과에 ‘또라이’가 들어왔다는 뒷담화도 우연히 들었다.
참담해진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숨겼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을 읽고, 다른 사람들이 쓰는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남몰래 신춘문예에도 도전했다. 그들의 ‘문학’에 자기도 얼마든지 재능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선에도 들지 못하고 모두 낙방했다.
점차 그녀의 대학 생활은 빈 껍데기처럼 변했다. 왜 수업을 듣고, 왜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혼자 떠도는 섬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국문학과 창작 수업에 수강 신청을 하고, 미친 척 <제국의 망령들>을 제출했다. 마지막 객기였다. 그녀가 정말 재밌게 했던 게임을 비틀고, 곳곳에 거장들의 문장을 패러디했다. 마지막에 게임에 남는다는 주인공의 선택이 도리어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혹평만 받으면, 이제 글은 그만 써야지. 아예 전과해 버리자. 어느 과가 좋을까?’
그렇게 다짐하며 수업에 들어갔고, 합평회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예상대로여서 식상할 지경이었다. 정말 공들여 썼고, 참 좋아하는 소설이지만 날 선 비판에도 애써 반박하지 않았다. <제국의 망령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럴 기운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합평이 끝날 무렵, 어느 학생이 소설을 칭찬했다. 예전에 언니에게 듣던 것 같은 칭찬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호평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는데, 그가 다른 소설을 보고 싶다고 했고, 이렇게 동아리방까지 오게 되었다.
황제국이 그녀 앞에서 문학성이 없다고 했을 때,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세계 고전 문학을 꽤 읽고, 좋아하는 작품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감수성의 뿌리는 역시 장르 소설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대학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사람들 눈에 맞추려 했다. 그 길이 자기가 바라는 길이고,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허탈해질 뿐이었다.
“후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전유진이 다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국은 그녀가 다시 얘기할 준비가 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미안해요. 내가 잠깐···, 마음을 좀 정리하느라고.”
“아니에요.”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이런 질문을 후배한테 하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 벌써 잡지에도 나고, 게임 동아리도 만들고 하는 걸 보니까 오히려 나보다 나은 거 같아서. 만약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이랑,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 둘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뭘 선택하겠어요?”
“꼭 하고 싶은 일과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요?”
황제국은 난데없는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이럴 때 어떤 대답을 해야 그녀를 동아리로 끌어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꼬시려는 말을 해봐야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역효과만 날 뿐이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답이 없는 얘기잖아요. 그리고 저는 정말 운이 좋게도 꼭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일이 같거든요.”
“게임, 만드는 거요?”
“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게임을 만드는 것 말고는 잘하는 일이 없는 거 같아요. 게임을 만드는 것만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도 없는 거 같구요.”
“정말 운이 좋네요.”
“그렇죠. 하지만 조금 더 파고들어 보면 달라요. ‘게임’은 정말 광대하거든요. 제가 이 세상 모든 게임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만들고 싶은 게임도 따로 있구요. 그런데 제가 추구하는 게임과, 제가 정말 잘 만들 수 있는 게임이 충돌한다면? 전 후자를 고를 거예요.”
“왜요? 정말 평생을 추구하는 게임이 더 의미 있고 보람 있지 않아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게임이란 만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게임의 진짜 의미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아······.”
“희대의 걸작도 어떤 게이머에게는 그냥 노잼 게임일 수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게임보다, 정말 잘 만들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면, 그걸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소설 읽을 때도 작가가 이래라저래라 독자에게 설교하는 식이면 짜증 나잖아요. 그건 그냥 자의식 과잉에 꼴불견일 뿐이에요.”
“자의식 과잉에, 꼴불견?”
순간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하던 뒷담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소위 그들이 말하는 ‘문학’의 영역에서 무언가 보여주겠다며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 나도 다를 게 없었네. 나야말로 자의식 과잉에 꼴불견이 따로 없었지. 내가 대체 뭘 보여주겠다고 그랬던 걸까? 왜 그렇게 인정받지 못해 안달이었지?’
전유진은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의문이 스르륵 풀려 버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상한 집착에 매달려 그녀 자신을 잊고 살았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할 때였다.
“혹시, 여기 타자기 하나 더 놓을 수 자리 있어요?”
전유진이 다짐한 듯 용기를 내어 황제국에게 말했다. 황제국은 그녀가 어렵게 말한 수락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살짝 장난을 치고 싶어 딴청을 부렸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컴퓨터라면 한 대 모르지만요.”
“어쩔 수 없네요. 게임 개발 동아리니까. 그것도 좋아요.”
두 사람은 피식 웃으며 악수했다. 이진수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뉴퀘스트의 빈 슬롯 하나가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