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회 - 콜렉터즈 에디션
3.1절을 기점으로 <영건 블러드> 판매량은 총 10만 장을 돌파했다. 출시 4개월 만에 달성한 기록이었다. 판매 속도만 보면 <스타크래프트>보다도 더 빨랐다.
김상혁은 출시 후 매주 판매량을 체크했다. 판매 속도는 그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초도 물량 8만 장이면 넉넉할 줄 알았는데 연말에 부랴부랴 추가 생산을 진행했다.
쭉쭉 치고 올라갈 것 같았던 판매량은 연초가 지나자 상승세가 다소 줄어들었다. 연말/연초 특수 직후라서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른 10만 장을 찍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금방 도달할 것 같았던 10만 장을 코앞에 두고 판매량이 주춤거렸다. 김상혁은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쫓아 오는 사람이 없는데, 자꾸만 쫓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3.1절을 기점으로 드디어 10만 장을 넘어섰다. 막상 10만 장을 넘기자 김상혁은 기쁨보다 안도감이 컸다. 잘 될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훨씬 크게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 큰 짐 하나를 던 기분이었다. 그는 곧장 황제국에게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10만 장이요? 안 그래도 3.1절에 동접자가 5만을 넘어서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기쁜 소식이 연이어 오네요.”
수화기 너머로 ‘뭐라고?’, ‘10만 장이래!!!’라며 좋아하는 뉴퀘스트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난번 챌린지 리그도 그렇고, 과장님 도움이 정말 큽니다. 고맙습니다.”
“아이고, 고맙기는요. 다 대표님이 좋은 게임 만들어 주신 덕이죠. 저야 다 만든 게임 들고 뛰어다니기밖에 더 했습니까?”
“만들기만 하면 팔리나요? 제가 영업을 뛰어도 과장님만큼 열심히 다니지는 못할 거예요. 누구보다 뒤에서 열심히 해주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상혁은 황제국의 ‘고맙다’는 말에 이상하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신사업 부서로 발령받고, PC 게임을 유통하기로 결정하고, <영건 블러드>를 발매하기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PC 게임 유통을 한다고 했을 때 왜 그런 일에 손대냐고 회사에서는 뒷말이 오갔다. 김상혁은 오직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참았다. 뉴퀘스트와 계약하자 이번에는 전작도 없는 신생 개발사에 30%나 떼주냐며 뒷말을 했다.
“정신 나간 거 아냐? 아무리 계약이 급해도 대학생들이 만든 게임을, 그것도 30%나 떼준다니?”
“그러면 팔아봤자 뭐가 남냐고. 아니 제대로 팔리기나 할까?”
“유통도 초짜, 게임도 초짜가 만든 건데 잘 될 리가 있겠냐? 보나 마나 텄지.”
“아, 그냥 하던 완구나 잘하지. 사장님은 왜 또 무슨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에휴~.”
“내 말이.”
김상혁은 이런 말을 흘려 버리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영건 블러드>를 출시하면서 기존 완구 물류 직원들과 알게 모르게 기 싸움을 벌여야 했다. 출시 전날 런칭쇼 준비를 하면서도 몇몇 PC방은 직접 게임을 차에 싣고 PC방을 돌았다.
<영건 블러드> 출시 이후 그는 길에서 살았다. 뉴퀘스트에 속사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항상 웃는 얼굴과 밝은 목소리로 전화했다. 그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나날이 늘어나는 판매량을 보면 그는 드디어 세상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단단하게 마음을 다지며 몇 달을 달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황제국의 ‘고맙다’는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을 울렸다. 어리다고 한 번도 무시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황제국 대표의 말 한마디가 축하한다는 회사 동료들의 수백 마디보다 더 가슴에 남았다.
10만 장을 넘은 날, 김상혁은 정말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그는 어쩐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혼자 달래려고 눈에 보이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그는 우동 한 그릇과 소주를 시켰다. 통통한 면발과 뜨끈한 국물이 그의 속을 푸근하게 채웠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자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혼자 술을 마신다고 쓸쓸하거나, 처량하거나, 궁상맞지 않았다. 10만 장이라는 성과를, 스스로 수고했다며 자축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자꾸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빈 소주잔을 쥔 그의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슬프지도 않은데, 오히려 기뻐 죽겠는데, 왜 눈물이 나오는지 그도 몰랐다.
“힘내요. 쯧쯧.”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혼자 울고 있는 김상혁에게 닭똥집을 서비스로 주면서 혀를 찼다. 여전히 IMF의 그늘 속에 살았던 시대,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우는 남자의 이야기는 뻔해 보였다. 김상혁은 아니라고, 자기 괜찮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어이없게 웃으며 닭똥집을 맛있게 먹었다. 그 쫄깃한 맛이 오래 입안에 남았다.
10만 장 축하를 혼자서만 하기는 미안했던 김상혁은 호텔에서 비싼 케이크를 사 들고 뉴퀘스트를 찾았다. 그사이 직원이 늘면서 그가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착실하게 성장하는 뉴퀘스트를 보자 그의 마음도 뿌듯했다.
“하나, 둘, 셋~!”
“후우우우우~!”
그들은 랩실에서 10만 장을 기념해 케이크에 초 10개를 꽂았다.
“음~, 이 케이크 너무 맛있다! 어디서 사셨어요?”
엄지원이 입꼬리를 만화처럼 올리며 좋아했다. 즐겁게 케이크를 나눠 먹고, 김상혁은 황제국과 확장판 개발 상황을 보기 위해 동방으로 건너갔다.
황제국도 그렇지만, 김상혁도 <영건 블러드>가 앞으로 훨씬 더 많이 팔리는 게임이 될 거라고 믿었다. 10만 장이라는 성과는 대단하지만, 더 큰 미래로 가는 중간에 반짝이는 마일스톤이었다.
“아, 이록의 여동생이요? 그거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김상혁은 이수련이 등장하는 스토리라인을 듣다가 엔딩 장면에서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수련도 안타깝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원수이기도 한 이록을 죽이면서 미안해하는 장건의 모습도 진짜 사나이답고 멋있었다. 그는 확장판의 엔딩이 게이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거라고 확신했다.
“오···!”
이수련 캐릭터 디자인을 확인한 김상혁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전적이고 단아한 인상에 날렵한 몸, 그리고 슬픔이 엿보이는 눈까지, <영건 블러드>의 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3D 모델링은 계속 다듬을 생각입니다.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요.”
황제국이 이수련의 3D 캐릭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확실히 3D로는 일러스트만큼의 느낌을 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황제국은 마지막까지 최고의 형태를 잡기 위해 수없이 수정할 생각이었다. 김상혁은 이어서 다른 캐릭터와 각종 디자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 이건? 대표님, 이게 혹시?”
그의 눈길이 어떤 이미지에서 멈췄다. 거대한 황소 모양의 로봇이 앞다리를 들어 올린 채 포효하고 있었다. 눈빛은 악마같이 붉게 빛나고, 입에서는 불을 뿜으며, 단단해 보이는 몸체에서는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는 거대한 로봇이 당장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위용과 위압감이 무시무시했다.
“네, 이게 일본군의 비밀 병기 ‘검은 황소’예요. 어떠세요?”
“와~, 이건 정말 압도적인데요? 저 강철이 진짜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투박한데, 그게 또 거친 매력이 있네요?”
“다행이네요. 사실 이 앞에 수십 개의 버전이 있었어요. 현주가 이거 그리느라 고생 좀 했죠.”
“아, 그랬나요?”
“이 거대한 어깨와 두툼한 가슴이 포인트예요. 압도적인 힘과 위압감이 거기서 나오죠. 황소에다가 고릴라를 섞은 겁니다.”
“아~~! 어쩐지 익숙한데 뭔가 좀 다르다 했습니다.”
“원래는 좀 더 울룩불룩하고, 허리도 훨씬 잘록했는데 제가 더 투박하게 가자고 했어요. 사실 3D 모델링하기 너무 빡셀 것 같아 그렇게 간 건데, 결과적으로 그게 더 나았던 거 같습니다.”
“역시, 대표님! 정말 보는 눈이 다르네요. 진짜 대륙을 달리는 어떤 원초적인 힘이 느껴져요.”
김상혁은 계속 감탄하며 검은 황소의 디자인을 주의 깊게 살폈다. 차현주는 전체적인 컨셉 이미지 외에도 전후좌우,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등 검은 황소를 다양한 시점으로 그려 놓았다. 김상혁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표님, 만약 저희가 이 검은 황소를 완구로 만들면 어떨까요?”
“완구라면, 피규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이 우람하고 무시무시한 비밀 병기를 보는 순간 피규어로 완성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투박하지만 나름의 멋이 있고, 만들기도 장건 같은 캐릭터보다 이쪽이 더 쉬울 것 같아요.”
“<영건 블러드> 첫 피규어로 검은 황소라······.”
오공 실업은 <영건 블러드> 본편과 확장판에 관한 패키지 제작/유통 권리뿐 아니라 게임과 관련한 피규어 등 완구류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그들은 <영건 블러드>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상품화할지 다양하게 따져보고 있었다.
게임이 큰 인기를 끌면서 아이용 조립 완구가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한 피규어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캐릭터는 얼굴과 표정, 손가락과 머리카락, 옷깃 등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한 부분이 많았다.
회사에서는 차라리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의 총을 실제 사이즈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등 다른 의견이 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김상혁이 검은 황소를 보는 순간, 피규어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직감했다.
“검은 황소를 피규어로 만든다.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퀄리티는 잘 나올까요?”
“제가 완구 제작 파트가 아니라서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저희 오공실업이면 충분히 멋지게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김상혁이 검은 황소을 피규어로 만드는 얘기를 꺼내자 황제국이 다른 의견을 꺼냈다.
“<영건 블러드> 확장판에 스페셜 패키지를 소량으로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 검은 황소 피규어와 다른 특전 몇 가지를 넣는 거죠. 수량은 한 1,000개 정도? 한정판으로요. 이름은 콜렉터즈 에디션(Collector’s Edition) 정도면 괜찮겠네요.”
“게임 패키지에 피규어를, 한정판으로?!”
황제국의 콜렉터즈 에디션 제안을 듣자 김상혁은 눈을 번쩍 떴다. 이것이야말로 오공실업이 기존 사업 영역과 신규 사업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본편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으니, 별달리 홍보에 열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확장판과 피규어 퀄리티만 제대로 나온다면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정판 콜렉터즈 에디션은 금세 화제가 될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검은 황소 피규어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게임 팬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것이다. 오공실업은 그 열기를 이어서 검은 황소 피규어를 조금 수정해 나중에 따로 발매하면 된다.
당장 김상혁 자신부터 콜렉터즈 에디션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전체 패키지 구성을 떠올려 봤다. 박스 크기는 어떻게 하고, 피규어는 어떻게 만들고, 일반판 패키지와 별도 구성품은 무엇을 넣을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콜렉터즈 에디션, 이거 대박이겠는데요? 다만 금형을 1,000개짜리를 위해 만들 수는 없으니까 한정판은 밑에 바닥을 붙여서 완전한 디오라마(diorama, 3차원 축소 모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런 세부적인 디테일은 오공실업에서 정리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확장판에는 골수팬을 위해 한정판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과장님 덕분에 쉽게 풀렸네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모두 뉴퀘스트에서 딱 맞는 게임을 만들어 주는 덕분이죠.”
“비밀 병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까 처음부터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연결되니까 좋네요. 스토리를 짠 유진 선배도, 디자인한 현주도 아마 좋아할 겁니다.”
황제국이 웃으며 말했다. 전유진의 설계도 한 장에서 시작된 비밀 병기 아이디어가 1년 후, 확장판에 이르러서야 검은 황소로 구체화 되었다. 차현주는 검은 황소를 디자인하면서 전에 없이 고전하다가, 황제국에게 힌트를 얻어 겨우 문제를 해결했다. 그토록 많은 과정을 거쳐, 검은 황소는 이제 피규어가 되어 콜렉터즈 에디션 한정판으로 출시하게 되었다.
김상혁은 검은 황소 디자인 파일을 받아 곧바로 오공실업으로 돌아갔다. 그는 완구 파트와 제작 협의에 들어갔다. 출시 4개월 만에 10만 장을 달성하자 오공실업 사내에서 PC 게임 유통 사업부와 김상혁 과장의 위치는 달라져 있었다.
예전이라면 한정판이라니 수익성이 있겠느냐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검증을 거쳐야 진행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짧은 회의 끝에 완구 부서는 곧장 검은 황소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김상혁은 온몸에 힘이 가득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씁쓸했던 감정은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다시 황소처럼 일어나 세상을 향해 힘차고 거칠게 돌진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