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 FPS 컨셉 회의(1)
FPS 프로젝트를 향한 목표 설정과 주변 정리를 마친 뉴퀘스트는 본격적으로 컨셉 개발에 착수했다. 황제국은 뉴퀘스트 첫 정기 회의에서 FPS 컨셉 회의를 주관했다.
“나,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있겠어. 정하면 아, 알려줘.”
이진수는 컨셉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며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두뇌는 마치 자석과 같이 그를 계속 게임 엔진에 사용할 3D 렌더링 엔진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한 번 프로그래밍 생각에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는 왓콤(Watcom) C/C++을 실행시키고 코드 편집기를 열었다. 그리고는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마치 석상처럼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끔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우와.”
차현주가 순식간에 자기 만의 세계로 사라지는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스케치북을 꺼내 이진수를 크로키(croquis, 인물의 동작을 빠르게 그리는 소묘 스케치)로 그렸다. 그리고 날짜를 적더니 청테이프를 뜯어 그림을 벽에 붙였다. 이진수는 그런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진수 선배님은 일하게 두고 우리끼리 컨셉 회의를 해볼까?”
황제국이 화이트보드 앞으로 움직였다.
“자, 우리가 FPS를 만든다면 어떤 내용이 좋을까? 여기서 결정하는 거 아니니까 부담 없이 막 던져봐.”
“음···, 막 던지라니까 일단 제일 익숙한 우주 배경 어때? <둠>, <퀘이크>, <듀크 뉴켐 3D>처럼 유명한 FPS 게임은 다 SF잖아? 그냥 적당히 외계 생명체랑 만났는데 놈들이 막 공격한다는 식으로 설정 짜기도 쉽고.”
“그럼 내가 <퀘이크>에서 봤던 크리피한 괴물들 디자인해야 하는 거야? 으으으.”
“야, 게임을 위한 건데 니 취향에 안 맞는다고 싫어하면 안 돼. 나도 내 취향대로 하자면 라라 같은 여신이 등장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황제국이 오종석 의견대로 화이트보드 중앙에 ‘SF/우주’라고 적으며 차현주에게 말했다.
“지금 정하는 거 아니니까 미리 걱정하지 마. 그리고 컨셉 정할 때는 현주 네가 비주얼 스타일을 잘 잡을 수 있을까도 고려할 거야.”
“아, 정말? 그런 거야?”
“응,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모든 영역과 장르를 전부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더 잘 맞고 더 잘하는 스타일이 분명 있기 마련이지.”
“역시 제국이는 뭘 좀 안다니까. 음, 근데 말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만약에 회의를 하다 보니 SF로 맘에 딱 드는 아이디어가 나왔어. 근데 내가 아무리 해도 어울리는 그림이 안 나오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충분히 연구할 시간을 주고 여러 가지로 시도해도 비주얼 스타일이 안 잡힌다면······.”
황제국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아예 프로 아티스트에게 의뢰할 수도 있고. 더 적합한 사람을 찾으면 현주한테는 서포트를 맡길 거야. 내가 프로그래밍에서 진수 선배를 서포트하듯이.”
“역시··· 재수 없어. 어쩜 그런 냉정한 말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하냐?”
차현주가 황제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국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종석이 괜히 옆에서 약간 긴장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근데, 그게 맘에 들어. 재수는 쫌 없지만 그렇게 확실하게 얘기해 주는 거. 나중에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뜸 들이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줘. 괜히 말 빙빙 돌리면 더 상처받으니까. 알았지?”
“알았어. 그건 분명히 약속할 수 있어.”
황제국이 씩 웃자 차현주도 피식 웃었다. 차현주가 분위기를 바꿔서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나는 SF 말고 다른 거. 과거로 갈래. 중세나 뭐 그럴 때로, 활 쏘는 거는 어때? 난 옛날 옷 디자인해보고 싶거든. 그 옛날에 활 쏘는 사람 누구였지? 머리 위에 사과 놓고?”
“빌헬름 텔?”
“어? 그거 아닌데. 다른 이름이었는데? 그 사람 말고 다른 화살 쏘는 사람 없어?”
“유명한 활 쏘는 사람이면 로빈후드?”
“그래, 맞다! 로빈후드! 그 시대 느낌으로. 근데 너무 우중충하게 말고 밝고 예쁘고 알록달록하게.”
“야, 로빈후드는 게릴라처럼 싸우는 사람들인데 눈에 잘 띄게 하고 다니면 나 잡아가시오~ 하는 거지.”
“일단 그냥 아이디어니까 브레이크 걸지 말자. 로빈후드 말이지?”
황제국이 SF 반대편에 ‘로빈후드’라고 적었다. 차현주가 오종석을 타박했다.
“초장부터 태클 걸지 마. 아까 그랬잖아. 막 던지는 거라고.”
“아니, 그래도 앞뒤는 맞아야지. 그리고 FPS는 총 쏘는 게임인데 활이라니. 제국아, 이거 괜찮은 거야?”
“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아. 1인칭 시점으로 활을 쏘는 거니까. 총알과 화살은 모양도 다르고, 무게와 작용하는 힘도 다르니까 공기 저항이랑 중력을 물리 엔진 통해서 계산하면······.”
“OK, 거기까지! 어쨌든 일단 된다는 거지?”
“불가능하진 않아. 재밌게 만들 수 있냐는 다른 얘기지만.”
이야기가 기술적으로 흘러가자 차현주가 급히 제동을 걸었다. 황제국도 다시 컨셉으로 돌아와서 로빈후드와 SF 사이에 ‘현대 밀리터리’를 적었다.
“시기로 얘기가 나왔으니까 가능한 시대를 쫙 펼쳐서 스펙트럼을 넓혀 보자. 과거인 고대와 중세가 있고, 현대 밀리터리물이 있고, 미래 배경 SF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겠지? 여기서 세부적으로 또 뭐가 있을까?”
“음, 미래는 솔직히 컨셉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현대 말고 근대는 어때? 산업혁명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을 소재로 삼으면 좋을 거 같은데? 전쟁이니까 FPS로 풀기도 좋고.”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황제국이 오종석의 아이디어대로 중세와 현대 사이에 근대를 적었다. 근대에는 꼬리표를 달고 ‘1/2차 세계 대전’이라고 적었다. 확실히 전쟁은 FPS로 풀어내기 좋은 소재였다.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처럼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성공한 FPS 게임도 있었다.
그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떠오르는 전쟁을 몇 가지 보드에 적었다. 나폴레옹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1/2차 세계 대전만큼 스케일이 크고, 설명이 필요없는 전쟁은 없었다. 게다가 워낙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이라 참고할 자료도 많았다.
그러나 차현주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콧등에 있는 안경이 들썩거렸다. 그녀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간파한 오종석이 물었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들어?”
“아니,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내가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이미지를 생각해보고 있는데, 음······. 참고할 건 삼국지보다 훨씬 많긴 할 텐데, 뭔가 좀 더 상상력을 가미할 수 있는 거면 더 좋겠어.”
차현주는 안경을 벗어 안경다리를 입술로 오물쪼물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잘 안 풀릴 때 그녀가 하는 버릇이었다.
잠시 동아리방에 조용해졌다. 황제국은 시대순으로 나열한 배경을 쭉 훑어보며 98년의 기술으로 구현 가능한 FPS 게임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감이 오는 쪽이 없었다. 그때, 차현주가 말했다.
“아! 생각났다. 아까부터 자꾸 뭐가 생각날락 말락 하더니. 아흐, 어찌나 답답했는지.”
“뭔데? 뭐 생각난 거 있어?”
“있지. 총잡이가 나오는 엄청 유명한 시댄데, 하나 빼먹은 게 있어.”
“그게 뭔데?”
오종석이 묻자 차현주가 갑자기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약간 구슬프면서 귀에 익숙한 멜로디였다. 오종석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 이거 뭐지? 분명 아는 건데? 이름이 안 떠올라. 뭐지? 뭐였지?”
“흐흐흐, 나도 그랬다니까. 이건 바로 <황야의 무법자>!”
차현주가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더니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서부 개척 시대?!”
황제국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웨스턴 장르가 있었지. 이걸 빼 먹을 뻔했네.”
황제국이 화이트보드에서 근대 항목에 ‘웨스턴’을 추가했다.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서부 개척 시대를 구현한 FPS를 상상해 보았다. 비주얼도, 캐릭터도, 스토리도 꽤 괜찮게 나올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미국 서부가 배경이면 광활한 대지가 배경인데, 복잡한 지형을 얼마나 퀄리티있게 실현할 수 있을까?’
98년 전후로 나온 유명 FPS들, <둠>, <퀘이크>, <하프라이프> 등은 물론 <레인보우 6>나 <카운터 스트라이크> 등은 대부분 밀폐된 실내에서 게임이 이루어진다. 이는 좁은 공간에서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을 벌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컴퓨팅 파워로 배경 그래픽을 빠르고 그럴듯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존 카맥이 <둠>을 개발하며서 빠른 그래픽 처리를 위해 BSP(Binary Space Partitioning, 이진 공간 분할법) 알고리듬을 적용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BSP는 어떤 꼭지점을 기준으로 화면을 계속해서 반으로 나눠가며 그래픽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밀폐된 공간은 화면을 나누기가 편리하다. 바닥과 벽을 나누고, 벽과 문을 나누고, 벽과 천장을 나눈다. 구분이 필요한 사물의 꼭짓점마다 공간을 둘로 나누고, 각각의 공간마다 적절한 텍스쳐를 입히면 그럴듯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둠>의 배경이 전부 각진 사각형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는 효율적인 BSP 알고리듬이 광활한 대자연을 표현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이 부분은 렌더링 엔진을 설계 중인 이진수 선배와 논의가 필요했다. <둠>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게임 엔진도 전혀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국은 이진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다른 점은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움찔거리고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일단 난 서부극 괜찮은 거 같은데? 장르도 총잡이 이야기니까 FPS에 딱 맞고. 소재만으로도 다른 FPS하고 차별화는 확실할 거 같아.”
“그치? 오종종. 군복보다 이것저것 디자인할 요소도 많잖아. 대평원에서 말도 타고! 얼마나 신나?!”
맨날 틱틱 거려도 오종석과 차현주는 소꿉친구답게 죽이 잘 맞았다. 둘은 서로에게 총질하는 시늉을 해가면서 재밌게 떠들었다.
“분명 참신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대기는 한데, 웨스턴에도 몇 가지 문제는 있어.”
황제국은 기술적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이미 결정한 듯한 오종석과 차현주에게 제동을 걸었다.
“문제라니? 무슨 문제?”
“일단 첫 번째, 웨스턴이 한국 게이머에겐 상당히 낯설 다는 거. 영화광들에게는 서부 영화가 친숙할지 모르지만 한국 게이머들에겐 아직 물음표야.”
웨스턴에도 메가 히트를 친 락스타 게임즈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같은 게임이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2010년이 되어서야 나온다. 아직은 서부극이 게이머에게 크게 친숙한 장르는 아니었다.
“우리가 개척자가 되면 되는 거지! 서부 개척 정신으로!”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분명 리스크는 있어. 그리고 더 중요한 두 번째.”
“또 있어?”
“싱글 플레이는 큰 문제 없어. 현상금이나 복수극처럼 친숙한 메인 스토리를 짜서 끌고 나가면 되니까. 문제는 인터넷 멀티 플레이야.”
“그게 왜?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대결하는 건 똑같잖아? SF나 웨스턴이나?”
오종석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