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회 - 반자동 타겟팅
이탈리아전 승리에 이어 8강에서 스페인을 물리친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올랐다.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물리치자 사람들은 정말 결승까지 오르는 게 아닐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4위로 마감했다.
2002년 6월을 뜨겁게 달군 한일 월드컵은 6월 30일 독일 대 브라질의 결승전을 끝으로 한 달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어차피 우승은 브라질’이라는 농담처럼 우승컵은 이번에도 브라질의 몫이었다.
서울 오피스 젤리 러쉬 라이브팀은 2002년 상반기를 월드컵 마케팅 준비에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케팅 오종석은 각종 유니폼 라이선스 계약을 해결하고, 차현주와 아트팀은 수많은 응원복과 액세서리를 디자인했다. 개발은 [ 젤로 미니 축구 ]를 만들기 위해 몇 달을 고생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젤리 러쉬>의 6월 평균 동접자는 월드컵 여파로 5월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매출은 2001년 연말에 기록했던 월 최고 매출을 갱신했다.
6월 한 달 동안 전 국민이 국대 서포터즈 ‘빨간 악마’나 다름없었다. 게임에서도 빨간 악마 티셔츠는 매출 상승에 1등 공신이었다. 뉴퀘스트가 빨간 악마에게 고작 1천만원 후원금을 주고 라이선스를 획득한 빨간 악마 티셔츠는 매출액이 56억을 넘었다. 황제국은 16강전이 끝나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고마운 추억을 만들어 준 감사의 표시로 빨간 악마에게 추가로 5천만원을 추가로 후원했다.
월드컵은 <젤리 러쉬>에만 돈다발을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영건 블러드> 역시 월드컵을 통해 게이머들이 부분 유료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록 <영건 블러드>의 월드컵 매출이 <젤리 러쉬>에 비하면 1/1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은 월드컵을 통해 훨씬 큰 자산을 얻었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영건 블러드>는 한국의 인터넷 게임 1세대를 상징하는 게임이지만 라이브팀은 스스로를 저물어 가는 해라고 느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었지만 게임 잡지나 웹진, 누리웹 등 커뮤니티에서 <영건 블러드>가 언급되는 양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매출은 꾸준한 편이지만 유지비용도 그만큼 컸다.
“이 정도면 해볼만 하겠는데요?”
그런데 월드컵을 통해 <영건 블러드>에도 부분 유료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황제국은 마음 졸이며 월드컵 마케팅을 치렀던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을 치하하고, 부분 유료화 확대 방안을 강구해보도록 지시했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에 새로운 활기가 도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월드컵 마케팅 준비하느라, 그리고 치러내느라 많은 분들이 애쓰셨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우리 모두를 위해 힘찬 응원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드아아아~!”
황제국은 7월 초 홈타운 미팅에서 6월 한 달간 회사의 성과를 공유했다. 뉴퀘스트는 오피스마다 매달 홈타운 미팅이라는 이름으로 임직원 전체 회의를 열었다. 한 달 동안 회사의 성과를 공유하고 조직마다 중요한 이슈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월드컵 효과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에 다들 크게 놀랐다.
“고생해 주신 여러분을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뉴퀘스트의 모든 임직원에게 연말까지 사용할 수 있는 특별 휴가 5일을 부여하겠습니다.”
“오!”
“여기서 끝나면 섭섭하죠. 쉬는 것도 돈이 필요하니까요. 회사에서 휴가비 200만원을 지원하겠습니다. 연말까지 일정에 맞게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시고, 휴가비는 HR에 신청해서 꼭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우와아아아아!!!!!!”
“역시 대표님!”
“황제국! 황제국! 황제국!”
“회장님 최고!”
특별 휴가에 반색하던 사람들은 휴가비 200만원 지원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월드컵 마케팅에 관한 구성원 보상 회의 때 이신우는 나름 크게 지른다고 특별 휴가 5일을 내밀었다. 그러자 황제국은 그걸로는 모자란다며 휴가비를 덧붙였다.
“휴가 좋죠. 하지만 역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는 꽁돈만한 게 없어요. 시원하게 휴가비 200만원을 추가하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더 좋아할 거예요.”
황제국은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법, 게이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은 물론 직장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휴가비는 당장 쥐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려고만 했으면 봉투에 200만원씩 담아서 홈타운 미팅에서 바로 지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국은 휴가 5일을 제시하고, 그다음 휴가 비용을 언급해서 휴가에 대한 기대감을 폭증시켰다.
“와~~, 200만원이라고? 그걸로 어딜 가지? 파리? 런던? 뉴욕?”
“난 부모님 모시고 제주도 가서 특급 호텔에서 귀족처럼 놀다 와야겠어.”
“전 여름휴가랑 붙여서 호주에 가 볼래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난 휴가 내고 회사 와서 게임할 건데 그래도 200만원 주려나? 주겠지?”
“난 아껴놨다가 겨울에 일본 가서 온천 가야지. 눈 덮인 경치 보면서 뜨뜻한 물에서 흐아······!”
열광의 홈타운 미팅이 끝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휴가비로 뭘 할까 기대에 들떴다. 200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직장인이 흥분할 정도로 거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200만원이 ‘휴가 지원금’이 되자 얘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200만원으로 즐길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회사 분위기는 이미 다들 여행을 떠난 것 같았다.
이신우는 사람들의 반응을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같은 돈을 써도 누구는 박수를 받지만, 누구는 오히려 욕을 먹기도 한다. 회사가 무작정 돈을 쓴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전 직원 휴가 지원비라고 해도 뉴퀘스트 6월 매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지금 모두가 기대감과 설렘으로 행복했다.
“소영 PM은 휴가 지원비 받으면 뭐 할 거야?”
“네? 저, 저요? 휴가? 어떤 휴가요?”
황제국이 자리로 돌아가려는 민소영에게 물었다. 일상적인 질문인데 민소용은 화들짝 놀랐다.
“응, 특별 휴가 5일에 휴가 지원비 200만원 준다고 했잖아. 못 들었어? 내 바로 앞에 있었잖아?”
“제가 어딨는지 보고 계셨어요?”
“응?”
“아, 아니에요! 전 그럼 일이 바빠서.”
“바빠? 이제 월드컵도 끝났는데?”
민소영은 꾸벅 인사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컴퓨터로 뭔가를 열심히 찾아보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평소의 민소영과 다르게 어색하고 부산스럽게 보였다. 황제국은 민소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상한데······?’
요근래 민소영의 행동이 상당히 이상했다. 황제국은 그녀가 자기를 보면 당황하고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그때부턴가?’
황제국은 월드컵 16강전을 떠올렸다. 연장전 역전 골이 들어가고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가 누구를 껴안았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품에 매달리듯 안긴 민소영에게 황제국은 묘한 기류를 느꼈다.
원래도 크고 반짝이는 눈에 똑똑하고 예쁜 아이였다. 성격도 싹싹하고 착하지만, 일할 때는 집중력이 뛰어나고 집요한 면이 있었다. 말한 적은 없지만 황제국은 자기 때문에 진로를 바꾸고 컴퓨터공학과에 들어온 민소영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황제국은 뉴퀘스트 초창기 멤버 모두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민소영은 특히 더했다. 그래서 그녀가 회사에 잘 적응하는 것은 물론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 진행하는 것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인턴이고 회사 막내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준 책임감에 소냐를 더 주의 깊게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소영은 뉴퀘스트에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교육용 프로젝트였던 소냐는 <젤리 러쉬>가 되었고, 마침 확실한 캐시 카우가 필요했던 뉴퀘스트에 꼭 필요한 게임으로 변신했다. 물론 황제국이 방향타를 잡았기 때문이지만, 민소영이 없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프로젝트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아이가 그의 품에 쏙 안겼을 때, 황제국 역시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하마터면 민소영의 허리에 손을 두를 뻔하다가 황급히 머리에 손을 올리고 계속 쓰다듬었다.
‘정신 차리자. 전생까지 생각하면 나이 차이가 수십 년이다.’
황제국은 민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황제국과 민소영이 그저 보통의 대학생이었다면 황제국은 망설임 없이 민소영에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글로벌 게임 회사의 대표였고, 민소영 역시 회사의 핵심 인사였다. 만약 잘 연결되어 사귄다고 해도 그 과정과 후폭풍이 어떻게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게임은 프로토타입만 봐도 대충 어떻게 흘러갈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되는데. 인생은 두 번째 사는 건데도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한없이 보드라운 민소영의 머릿결이 엄지손가락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가까이할 수는 없지만 황제국은 잠시 민소영에게 품을 내주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래도 묘한 기류를 느낀 건 황제국만이 아닌 것 같았다. 황제국이 비록 연애의 달인은 아니었지만 그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황제국은 잠시 민소영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하다 뒤돌아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큰 상처 없이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국이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한도 초과 이상으로 달아올라 있을 때, 미국 팔로 알토에서 네이트와 올슨은 죽음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어둠 속으로> 기획을 가다듬고, 팀원을 뽑기 위해 매일매일 면접을 보고, 황제국에게 보낼 반자동 타겟팅 시스템을 만들었다.
E3에서 베스트 RPG에 뽑혔을 때 두 사람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함께할 사람을 뽑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부담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잘못해서 절호의 기회를 망칠까 봐 매일매일 두려움에 시달렸다.
면접을 보러 가면 <어둠 속으로>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뛰어난 실력자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뉴퀘스트도 이제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이었고, E3에서 상을 탄 후광도 컸다.
많은 개발자와 아티스트들이 게임의 진지하고 어두운 컨셉에 끌렸다. 어두운 분위기는 고정 팬층이 있지만 대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호불호가 강해서 싫어하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황제국 역시 <어둠 속으로>를 일종의 실험으로 여기고 제작을 승인했다.
- <어둠 속으로>는 <울티마 언더월드>를 뛰어넘는 게임이 될 것이다. 흥행 대작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 기념비적인 작품을 될 것이다.
<어둠 속으로>가 E3에서 상을 타고 비디오 업계에서도 <어둠 속으로>가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게임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자연스럽게 훌륭한 개발자들이 프로젝트에 몰려들었다.
건너건너 아는 얼굴과 이름들,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이름이 면접자 명단에 올라오자 네이트와 올슨은 흥분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경험이 많은 개발자였지만 이 정도로 기대받는 프로젝트에 리더로 일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기에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네이트와 올슨은 서로를 다독이고,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때로는 갈궈가면서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황제국이 숙제로 남겨 준 반자동 타겟팅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칼, 도끼와 같은 근접 무기로 1대1로 싸울 때는 괜찮았다. 캐릭터의 시야에 닿는 범위 안에 적이 들어오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타겟팅을 해서 알려주고, 유저가 명령하면 싸우게 하면 된다.
문제는 적이 다수일 때였다. 다수의 몬스터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플레이어 역시 움직이는 상황에서 타겟이 엉뚱한 몬스터에 잡혀 전투가 꼬이거나, 타겟팅에 걸린 락이 풀리는 버그가 계속 발생했다. 원거리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코딩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은 힘들게 반자동 타겟팅 전투 시스템을 만들었다. 결국 예상했던 일정을 오버해서 황제국에게 전달했다.
- 예정보다 늦어져 죄송합니다. 피드백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 수고하셨어요. 나머지는 서울에서 맡겠습니다. <어둠 속으로>는 대형 프로젝트라 진행하다 보면 생각과 다른 상황이 자주 발생할 겁니다. 계획을 짤 때 절대 마음이 앞서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항상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가정 아래 일정을 짜시기 바랍니다.
황제국은 완성된 전투 모델이 아니라 프로토타입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게임을 만들다 보면 전투 시스템도 그에 맞춰 수정할 것이 뻔했다. 나머지는 서울 오피스에서 덧붙여 만들면 될 일이었다. 일정 역시 월드컵 기간과 겹치면서 황제국 입장에서도 크게 늦지는 않았다. 다만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일정 관리에는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 엔진 2도 최신 빌드가 나올 때마다 이진수에게 공유받고 있었다. UI 디자이너가 합류한 후 확실히 메뉴가 훨씬 직관적으로 개편되어 사용성이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황제국은 이제 한국에서 MMORPG에 제대로 시동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투 시스템 프로토타입을 확보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MMORPG의 세계관이었다. 황제국은 전유진을 방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