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 아이데이션(ideation)
황제국은 늦게까지 PC방에서 <울티마 온라인>을 하다가 밤 12시가 거의 다 되어 집에 들어갔다. 오종석이 대학 입학 전까지는 12시가 통금이기 때문이다.
“젠장, 학원 다닐 때는 맨날 새벽에 들어갔는데. 자유의 몸이 됐는데 고작 12시가 뭐야, 12시가!”
“컴퓨터까지 금지당하기 전에 얼른 들어가라.”
“안 되지!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오종석은 투덜거리면서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황제국은 부모님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디지털 도어락이 아니라 열쇠여서 조용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RPG 게임의 도둑이 된 것처럼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황제국은 외투를 대충 침대에 던져놓고는 바로 노트를 꺼냈다. 그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정리할 때는 항상 노트에 직접 손으로 쓰는 걸 좋아했다.
일단 창업 계획은 대략 잡아 놓은 상태였다.
‘첫 게임은 최대한 간단하고 가볍게. 우선 널리 퍼뜨려서 이름부터 알려야 해.’
그는 첫 게임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첫 게임은 철저히 디딤돌로 삼기로 했다.
어차피 1998년 1월 현재, 한국 PC 게임 시장 규모는 싹싹 끌어모아도 수백억 수준에 불과하다. 게임은 콘솔과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이 주류였고, PC 게임은 정품 패키지 게임이 유통되기는 하지만 불법 복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데모 버전을 만들어서 인기를 끈 다음 유통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게임을 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통이 워낙 열악한 상황이라 퀄리티 높은 게임을 만들어도 푼돈을 쥐고 스트레스만 받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어차피 이제 곧 온라인 게임 열풍이 불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게임 유통 구조가 일순간에 정리된다. PC방 열기에 올라탈 게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초반 계획을 3단계로 설정했다.
1단계 : 우선 혼자 게임을 개발하고 무료로 배포해 이름을 알린다.
2단계 : 뛰어난 인재를 모아 작고 강한 팀을 만든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만들어 게이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유료 판매를 시작한다.
3단계 : <스타크래프트>와 <레가시>가 전국 PC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 제3의 온라인 게임으로 시장에 파고들어 탄탄한 기반을 세운다.
<스타크래프트>, <레가시>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PC방판 천하삼분지계였다. 만약 3단계에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한다면 그때 상황에 따라 새로운 플랜을 짤 생각이었다.
그는 3단계를 설정하면서 게임 이외의 요소는 일부러 제거했다. 창업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주식에 눈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정말 게임에만 빠져 살았기 때문에 재테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느 회사 주식이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잘 몰랐다.
물론 그도 어느 기업이 후에 시장을 지배하게 될 거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5년, 길면 10년 이상 지난 후의 이야기다. 그가 종잣돈을 모아 주식에 투자해서 몇 배, 몇십 배로 불린다 한들, 그의 창업 계획과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한 직후. 연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 부도나고, 달러 환율은 미친 듯이 치솟고, 주가는 끝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 때다.
이런 시기에 게임 외에 다른 쪽에 눈을 돌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차피 인터넷 시대가 오면 벤처 기업에 돈이 몰린다. 그때 제대로 투자받기 위해서도 그는 오직 자기가 잘하는 일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황제국은 1단계에 동그라미를 쳤다. 지금은 일단 차근차근 빌드업해 나가야 할 때다.
그는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이제 무슨 게임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였다.
우선 게임 컨셉을 잡기 전에 가이드라인부터 정했다. 두 달 후인 3월이면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면 오리엔테이션에, 수업에 온통 시간을 빼앗길 것이다.
가능하면 입학 전에 게임을 완성하고 싶었다. 아니, 입학 전에 완성해야만 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까지 마친 고3. 거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는 아주 희귀한 기회다. 지금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국은 제작 기간에 ‘30일’이라고 적었다. 남은 겨울 방학 동안 오직 게임 개발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제작 인원은 황제국 1인. 게임 디자인(기획), 프로그래밍, 그래픽, 사운드까지 모두 혼자 해야 한다.
잠깐 고민하던 황제국은 ‘테스트 : 오종석’을 추가했다. 창작물인 게임은 타인의 피드백 역시 중요하다. 황제국이 아무리 게임을 잘 안다 해고, 자기가 만드는 게임에 푹 빠져버리면 뻔한 단점을 놓칠 수 있다.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게임을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음은 기술적인 문제였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C와 C++을 사용하면 되니까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현재 주력 OS인 윈도우 95와 한참 낮은 버전의 다이렉트X에 적응해야만 한다. 살짝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컴퓨팅 리소스였다. 그는 이제 막 펜티엄 PC를 마련했지만, 여전히 486 PC를 이용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PC가 많이 보급되었다고는 해도 인터넷 시대처럼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는 상황도 아니다. 무료 게임으로 풀어 최대한 널리 퍼지는 게 목표인 만큼, 높은 사양을 요구해선 안 된다. 심지어 곧 나올 <스타크래프트>도 486에서 충분히 돌아간다.
황제국도 486으로도 충분한 게임을 목표로 잡았다. 그래픽 사양은 무난하게 640x480 해상도에 8비트 256컬러, 2D 방식으로 정했다. 새로 장만한 부두 그래픽 카드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스펙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게임 컨셉도 정하기 전에 스펙부터 정하니까 좀 어색했다. 보통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아이디어를 점검하고 확장하면서, 비주얼 스타일을 정하고, 그에 따라 최소 사양을 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간과 스펙부터 정해놓고 거꾸로 게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한계선을 명확하게 그어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뭐, 아무렴 어때? 재미있는 게임만 나오면 그만이지.’
황제국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모든 게임은 개발 과정에서 그만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모두에게 좋고 옳은 방식이란 없었다. 상황에 따라 재밌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게임 아이데이션(ideation, 아이디어 발상)에 들어갔다.
‘간단한 게임이라면 역시 퍼즐이 좋을까? 하지만 퍼즐 게임은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떤 규칙으로 만들지?’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퍼즐이었다. 그러나 황제국은 이내 찍찍 가로줄을 그었다.
퍼즐 게임은 다른 게임에 비해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만약 장기나 체스 같은 이미 룰이 정해진 게임을 만든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퍼즐 게임을 만드는 일은 보기와 겉보기와 달리 전혀 간단하지 않다. 퍼즐 장르는 도리어 벽이 높은 전문 영역이다. 퍼즐 게임의 핵심은 규칙과 레벨 디자인. 퍼즐 장르에 큰 관심이 없던 그가 며칠 고민한다고 재미있고, 새로운 퍼즐 게임을 뚝딱 만들 수는 없었다.
물론 그도 <비쥬얼드>나 <캔디 크러쉬 사가>, <툰 블라스트>, <애니멀팡> 같은 유명한 퍼즐 게임은 해봤다. 마음만 먹는다면 거의 비슷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국은 미래의 게임을 그대로 베껴서 자기가 처음 만든 것처럼 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양심과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다른 게임에서 일부 요소를 빌리거나, 게임성에서 확실한 차별점을 주어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은 괜찮았다. 세상에 완벽한 창작이란 있을 수 없고, 게임은 원래 그렇게 발전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미래의 아이디어라도 그대로 베끼는 표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재미있는 게임, 퀄리티 높은 게임, 성공하는 게임 못지않게 개성 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도전을 원했다.
‘그럼 RPG? 제일 친숙한 장르기는 한데.’
퍼즐을 제외하자 가장 익숙한 장르로 생각이 옮겨갔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그는 MMORPG의 PD까지 했던 만큼 좋아하고, 또 자신 있는 장르였다.
그러나 잘 아는 만큼 문제도 있었다. RPG는 만드는 사람이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끝이 없는 장르다. 짜임새 있는 세계관과 흡인력 있는 스토리는 기본이고 다양한 종족, 클래스(직업), 스탯, 성장 방식 등 게임 시스템을 정교하게 구성해야 한다.
그저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 짧은 시간 플레이 가능한 데모 버전을 만든다면 어떻게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다 보면 보면 분명 욕심을 낼 게 뻔했다.
15년 넘게 게임을 만들어 본 황제국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작은 게임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욕심을 부릴 것이 뻔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개발할수록 점점 욕심이 나서 덩치를 키우다 결국 때를 놓치고 실패하는 게임을 그는 수없이 봤다.
RPG 제작에는 또 하나 걸림돌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RPG와 98년의 게이머가 생각하는 RPG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RPG라는 장르의 원칙은 그대로지만, 20년 사이 게임을 구성하는 시스템과 BM은 어마어마하게 변했다.
시스템만 변한 것이 아니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도 변했다. 황제국은 PC방에서 <울티마 온라인>을 할 때, 사냥에 열중하는 오종석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야, 만약에 너가 지금 얻으려고 하는 그 아이템, 그거 만약 돈 받고 팔면 어떨 거 같냐? 살래?”
“뭐? 이거 상점에서 팔아? 몇 골드에?”
“아니 골드 말고. 진짜 돈으로. 우리가 현실에서 쓰는 돈 말이야.”
“에에? 미쳤냐? 아이템을 왜 돈 내고 사? 그럴 거면 게임을 뭐하러 하냐? 재미없게?”
예상대로 오종석은 아이템을 돈 내고 산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좀 흐르면 게이머들도 아이템을 사고파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게 될 때가 온다.
RPG 장르를 선택하자 생각이 자꾸 다른 쪽으로 번져 나갔다. 황제국은 RPG에도 X자를 쳤다. RPG는 좀 더 사람이 모이고, 자본력이 생겼을 때 시도할 장르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럼? 시뮬레이션? 흥미로운 장르지만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다.
어드벤쳐? 비록 <원숭이 섬의 비밀>이 황제국의 인생 게임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그다지 먹히는 장르는 아니다.
RTS? 혼자 30일 만에 만든다면 절대 퀄리티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톡톡톡톡.
황제국은 연필 뒤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 무기이자 동시에 족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임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계속 안 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짧은 제작 기간과 1인 개발, 낮은 사양의 한계에 가장 적합한 장르는 뭘까? 내 경험과 기술을 잘 살릴 수 있는 게임은? 그러면서 98년의 게이머들이 참신하면서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은?
토도도도도도도도도독.
질문이 입력되자 황제국의 머릿속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게임들이 룰렛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다 머릿속에서 룰렛이 멈춰 섰다.
‘디펜스 게임?’
황제국은 노트에 디펜스 게임이라고 크게 적었다. 기본적으로 슈팅 장르지만, 병력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전략적 요소도 있었다. 컨셉에 따라 속도감 있고, 타격감과 쾌감에 집중할 수도 있고, 전략적 요소나 혹은 RPG 같은 성장 개념을 넣어 더 깊이 있는 게임성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그래픽은 비주얼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화면에 고정된 맵을 띄우고, 최소한의 디테일만 살린 유닛들을 등장시키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사운드는 전투에 따른 간단한 효과음만 넣고 나중에 여유가 되면 배경 음악을 추가하면 된다.
황제국은 다방면으로 검토해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디펜스 게임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것은 팝캡이 2009년에 <플랜츠 vs. 좀비>를 출시한 후부터다.
그리고 모바일 게임이 본격화되면서 널리 퍼지게 된다. 손가락 하나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만큼 조작성도 좋았다. 여러모로 지금 그가 개발하기 적합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게임 배경이었다. <플랜츠 vs. 좀비>는 좀비를 식물이 막아내는 이야기다. 모바일 디펜스 게임들은 주로 중세 판타지를 배경으로 검, 활, 대포, 마법 등이 등장했다. 아니면 미래를 배경으로 현란한 레이저 무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중세도 괜찮았지만, 황제국은 아포칼립스나 미래 배경도 끌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취향보다 일단 게이머들에게 먹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했다. 게임 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지금은 장인 정신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디펜스 게임이라는 장르도 98년 게이머에게는 상당히 낯설다. 한 번만 해보면 금방 감이 오지만, 해보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만약 배경까지 생소하면 게이머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만큼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지만, 따로 사용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가 뭐가 있지?
황제국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우연히 답을 찾았다. 그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역시 수험생은 이거지.”
90년대 중고생이 국어와 논술을 위해 반드시 읽는 소설. 특히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소설. <삼국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