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회 - 뉴 프로젝트
“오오오오!”
황제국과 뉴퀘스트 멤버들은 민소영의 미니 게임이 실행되자 깜짝 놀랐다. 휑한 공터에 기껏해야 바위 몇 개 정도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배경에 도로와 건물 등 온전한 오브젝트들이 있었다.
“응? 근데? 이거 어디서 다 본 건데?”
“그러게? 뭔가 다 눈에 익은데?”
감탄했던 황제국이 이상하다는 듯 모니터를 살폈다. 분명 캐릭터는 짧고 귀여운데 배경은 스팀펑크 도시 느낌이었다. 황제국은 민소영을 돌아보았다.
“이거 <영건 블러드>에서 따 왔구나?”
“아, 맞네?! 그러네. 이 건물 홍콩 거리에 나오는 건물이야. 수정하기 전 버전 같은데?”
황제국의 말에 차현주도 그제야 알아봤다. 화면 가운데에 도로가 놓여있고, 양옆으로는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건물은 모두 <영건 블러드>의 스팀펑크 만주 스타일이었다. 민소영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네, 맞아요. 게임에 안 들어간 오브젝트 데이터로 맵을 만들었어요. 혹시 이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거야 없지. 게임에서 데이터 조금씩 수정해서 재사용하는 일도 많으니까. 근데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어? 데이터는 어떻게 모으고?”
“제가 아직 모델링이 서툴러서요. 기본 도형만 가지고 하려니까 너무 심심하고 게임 만드는 기분도 안 나서. 데이터는 제가 선배님들 파일 정리 도와드리면서 안 쓰는 데이터 따로 모은 거에서 가져왔고요.”
<영건 블러드> 제작 막바지 무렵, 사무실은 매일매일 게임 빌드를 개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중에 여러 번 수정하느라 사용하지 않는 데이터가 폴더 안에서 뒤섞이자 민소영이 차현주의 파일 정리를 여러 번 도와주었다. 민소영은 그때의 데이터를 재활용한 것이다.
“어쩐지. 뒤에 보면 똑같은 건물이 또 있다. 이거 아예 거리를 건물 몇 개로 돌려막기 했구나?”
“네, 금방 알아보시네요.”
민소영은 눈속임이 들키자 민망해하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괜찮아. 잘했어. 단시간에 퀄리티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꼼수였어. 어차피 미니 게임이니까. 그럼 이제 게임을 좀 볼까?”
“네, 그럼 시작할게요.”
민소영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녀가 키를 조작하자 노란색 소냐가 화면 중앙에 있는 길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에는 사뿐사뿐 걷던 소냐가 점점 속도가 빨라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동작이 상당히 부드러워졌네?”
황제국이 잠시 미국에 다녀온 사이 소냐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괄목상대라고 하더니 그녀가 딱 그랬다.
“약간 뒤뚱거리면 더 귀여울 거 같은데?”
“아, 네! 그것도 수정해 볼게요!”
차현주가 말하자 민소영이 외쳤다. 소냐는 스팀펑크 마을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주얼 스타일 차이 때문에 어른 마을에 꼬맹이가 놀러 온 것 같았다. 소냐는 잠시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리기만 했다.
“그냥 계속 이렇게 달리기만 하는 거야?”
“아뇨. 이제 곧. 아, 나왔다!”
차현주가 조금 답답해하면서 물었다. 그 순간, 길을 따라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길은 하나뿐이었고, 양옆은 건물로 막혀 있었다.
“어? 어?”
전유진이 굴러오는 바위를 보며 당황했다. 민소영은 바위에 깔리기 직전에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그러자 소냐가 높이 점프하며 바위를 뛰어넘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전유진이 감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단두대가 나타났다. 단두대는 일정한 리듬으로 칼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와 마찬가지로 단두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칼날이 열리는 정확한 타이밍에 뛰는 방법뿐이었다.
“얍!”
게임에 집중한 민소영이 스페이스 바를 강타하자 소냐는 단두대가 열린 틈 사이를 점프해서 통과했다.
“오오오오~!!!”
뉴퀘스트 멤버들은 민소영이 단두대를 통과하자 감탄했다. 캐릭터는 귀여운데 장애물은 반대로 살벌하고 스릴이 있었다. 그 부조화가 매력이 있었다.
“이거 꼭 3D 마리오로 <페르시아의 왕자(Prince of Persia)>를 하는 느낌인데?”
“나도 단두대 보니까 딱 그 생각 나던데.”
황제국은 단두대를 보고 말하자 오종석도 맞장구를 쳤다. 민소영은 이제 게임에 집중하느라 주위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어서 거대한 망치 등 비슷한 장애물이 몇 번 더 나타났다. 민소영은 소냐와 완전히 하나가 된 듯 능숙하게 장애물을 피해 나갔다.
“아~, 뭐야! 귀여워!”
장애물로 캐스터네츠가 나오자 차현주가 오종석의 어깨를 흔들며 좋아했다. 지금까지 나온 살벌한 장애물과는 다른 귀여운 장애물이었다.
장애물을 속속 피하는 와중에 소냐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속도가 빨라지면 달리는 재미가 있지만 그만큼 캐릭터를 컨트롤하기 힘들어지고, 정교한 타이밍을 맞추기도 어려워진다.
게임을 시연하는 민소영은 이제 여유가 전혀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조금 더 달리자 앞에 교차로 사거리가 나왔다. 그리고 앞에서 다시 바위가 굴러왔다.
교차로가 나타났다는 것은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나온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다. 속도가 빨라지는 걸 제외하면 같은 패턴의 반복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있었다. 황제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나 주의 깊게 살폈다.
민소영은 달려가는 가속도를 이용해 평소보다 일찍 점프해서 굴러오는 돌을 피했다. 그런데 그 순간, 교차로에서 옆으로 또 다른 바위가 굴러왔다. 바위 2개의 시간차 공격이었다.
“아아악!”
전유진은 소냐가 바위에 부딪힐까 봐 소리를 질렀고, 민소영은 땅에 착지하는 타이밍에 맞춰 정확하게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그러자 소냐는 다리에 스프링이 달린 듯 더 빠르고 높이 뛰어올라 2번째 바위를 피했다.
이어서 몇 개의 시간차 장애물이 있었지만 민소영은 가까스로 계속 피했다. 소냐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이제 배경이 바뀌면서 건물들이 사라지고 길이 S자로 굽어졌다. 그리고 길 밖은 온통 빨간색이었다.
“쏘영아, 이거 왜 이래? 왜 길 밖은 죄다 빨개?”
“밖에는 용암 지대에요! 길 밖으로 떨어지면 죽어요!”
민소영은 전유진의 질문에 대답하며 이리저리 굽어진 길을 따라 길 밖으로 나가지 않게 계속 소냐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녀는 가속도가 붙은 소냐가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소냐의 움직임에 따라 민소영의 몸도 좌우로 따라 움직였다.
“이제 거의··· 아아아아아악!”
굽어진 길을 따라 열심히 달리던 쏘냐는 그러나 마지막 급커브에서 결국 경로를 이탈하고 말았다. 소냐가 길옆으로 빠지자 자리에 쓰러지더니 새까맣게 변했다. 꼭 까맣게 타버린 비엔나소시지 같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GAME OVER’라는 커다란 글자가 떴다.
“아, 타 죽어 버렸네.”
“그럼 지금 용암에 타 죽은 거야? 쏘영이 보기보다 무섭네.”
민소영은 담담하게 말했고, 전유진은 까맣게 타버린 소냐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민소영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황제국을 돌아보고 말했다.
“어떠셨어요?”
“응, 재밌어 보여. 나도 한 번 해볼까?”
황제국과 민소영이 자리를 바꿨다. 게임은 만만치 않았다. 굴러오는 바위는 어렵지 않게 피했지만, 교차로의 바위는 시간차 공격이라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아, 이거 보기보다 어렵네.”
“비켜 봐. 이 형님이 보여줄게.”
“오종종, 파이팅!”
오종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차현주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오종석은 아슬아슬하게 바위와 장애물을 피해가며 달렸다. 그러나 그도 가속도가 붙은 소냐를 제어하지 못하고 S자 코스에서 탈락했다.
“소영아. 이거 브레이크 없어? 아무리 봐도 저 코스는 깨는 게 불가능한데?”
“어···, 아직 속도를 줄이는 게 없어요. 그것도 한 번 만들어 볼게요.”
민소영은 오종석의 피드백을 머릿속에 입력하듯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차현주와 전유진도 이어서 게임을 해보고는 재밌어했다.
“엄청 짧고 단순한데 생각보다 재밌다. 근데 전체적으로 비주얼은 너무 언밸런스한 느낌이야. 캐릭터랑 배경이랑 장애물이 다 따로 놀아. 다른 거에 비해 배경 퀄리티는 너무 높고. 물론 재활용이라서 그렇지만.”
“죄송해요. 제가 아직 디자인 요소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요.”
“아니, 죄송하기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널 혼내는 게 아닌데. 난 그냥 이 게임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한 거야. 죄송해하지 마.”
민소영이 사과하자 오히려 차현주가 당황했다. 뉴퀘스트는 언제나 결과물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게 리뷰하는 문화가 있었다. 황제국은 언제나 리뷰는 작업물에 대한 평가일 뿐, 창작자의 인격에 관한 평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물론 열심히 만든 작업물에 대한 비판을 듣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감정이 상해 뒷풀이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털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나자 어느새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회사 대표이자 게임 총괄 PD인 황제국 역시 멤버들에게 동등한 피드백을 받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현주는 민소영에게도 가감 없이 자신이 느낀 점을 말했다. 그러나 아직 황제국 외에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는 민소영은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현주 말이 맞아. 지금은 캐주얼한 자리긴 하지만, 공식적인 리뷰도 피드백은 절대 누굴 혼내거나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야. 다만 어떻게 하면 게임이 더 나아질까 고민하는 자리일 뿐이야.”
“네, 조심할게요.”
“이거 하나만 기억해. 우리 뉴퀘스트에서 피드백의 중심은 만든 사람이 아니야. 오직 결과물, 오직 게임이야. 우린 최대한 솔직하게 얘기할 거고, 때로는 누군가가 정말 힘들게 노력한 결과물을 쓰지 않고 버릴 수도 있어. 근데 어쩔 수 없어. 우린 재밌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저도 노력해 볼게요.”
민소영이 대답했다. 황제국도 조금 단단해진 그녀의 표정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그가 차현주에게 말했다.
“그리고 현주야. 이건 소영 인턴의 교육용 프로젝트야. 프로토타입 같은 거라 아직 비주얼 스타일에 신경 쓸 단계가 아니라서 그래.”
“그렇구나. 몰랐어.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겠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말해 버렸네.”
“아니에요, 선배님.”
차현주가 민소영의 손을 잡고 사과했다. 황제국이 민소영에게 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볼게. 내가 게임의 규칙과 목적을 만들어 보라고 했잖아.”
“네, 선배님.”
“규칙은 해보니까 알겠어. 장애물을 피하며 길을 끝까지 달리는 거지. 근데 목적은 뭐야? 저 S자 길을 끝까지 달리면 뭐가 나와?”
아무도 S자 코스를 통과하지 못했기에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민소영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S자를 넘으면 똑같은 스테이지가 나와요. 다만 속도가 1.2배 빨라져요.”
“그럼 엔딩이 없어?”
“네, 이 게임은 규칙과 목적이 같아요. 그냥 장애물을 피해 끝없이 달리는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이요.”
민소영의 말에 뉴퀘스트 사람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소영이 정말 그냥 평범한 아이는 아니구나?”
“저···, 게임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거 아닌가요?”
“아, 그렇지. 미안미안.”
민소영은 피드백에 금방 적응했고, 이번에는 룰을 어긴 전유진이 사과했다. 황제국이 다시 물었다.
“확실히 그래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 테트리스도 블록이 가득 찰 때까지 엔딩이라는 게 없으니까. 근데 특별히 그렇게 한 이유가 있어?”
“음······.”
“보통 마리오나 소닉 같은 게임은 스테이지를 나누고, 스테이지마다 다양한 맵을 구성하잖아. 그리고 다음 스테이지로 갈수록 어려워지게 만들지. 나는 단지 왜 가장 기본적인 룰을 따르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야.”
“그건, 물론 말씀하신 게임들을 많이 참고했어요. 하지만 마리오나 소닉은 인터넷 게임이 아니잖아요.”
민소영이 대답했다. 황제국은 그녀의 대답이 인상 깊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어?”
“네, 뉴퀘스트는 인터넷 게임을 만드는 회사잖아요? 저는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 아직 달리고 점프하는 게 고작이지만,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다른 누군가와 즐기고 경쟁을 할 거예요. 아직 네트워크 플레이를 붙이지 못했지만요.”
“그래서 다음 스테이지가 필요 없다?”
“네, 여러 명이 시작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한 명이 우승자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살아남을 때까지 끝까지 달리는 게임인 거죠.”
황제국과 멤버들은 민소영의 말을 듣자 비로소 게임 방식을 납득했다. 민소영은 아직 기술적으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달리기 게임이라? 괜찮을까?”
“왜? 난 재밌을 거 같은데?”
“나도. 총싸움처럼 그런 맛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아.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소영이 게임은 나오면 나도 매일 할 거 같아.”
콘텐츠팀은 민소영이 만든 게임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황제국이 보기에도 소냐는 게임성을 잘 살리면 온라인 게임으로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영건 블러드> 개발이 완료된 지금, 차기작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였다. 더욱이 민소영의 소냐 프로젝트는 진지한 FPS를 만들었던 뉴퀘스트가 캐주얼 게임으로 IP 포트폴리오를 넓히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게임 방식, 장애물, 비주얼 스타일, 캐릭터 등 손봐야 할 요소가 아주 많았다. 황제국은 교육용 프로젝트를 좀 더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미국 다시 가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네트워크 기능을 같이 만들어 보자.”
“네? 정말요?”
“응, 재밌을 거 같아. 그런데 아직은 ‘프로토타입’이라고 하기에도 많이 부족해. 하나하나 발전 시켜 보자.”
“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민소영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교육용 프로젝트였던 소냐에 조금씩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