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회 -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 화제의 게임 <영건 블러드>를 개발한 뉴퀘스트, ‘한국e프로스포츠협회(가칭)’와 게임 방송 저작권료 1만원에 계약.
- 황제국(뉴퀘스트 대표), “e스포츠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 기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빨리 게임이 TV, 영화처럼 당당한 엔터테인먼트로 인정받는 시대 오길.”
- 한국e프로스포츠 협회, 뉴퀘스트의 대승적 결단 두 팔 벌려 환영.
저작권 사용 계약을 체결하자 황제국은 홍보대행사를 통해 보도자료를 뿌렸다. PC방 확산으로 매출과 이슈를 동시에 잡았던 <영건 블러드>는 99년 당시 전혀 새로운 문화인 프로게이머와 e스포츠의 탄생으로 또 한 번 이슈를 잡았다.
황제국은 이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다. ‘e스포츠’, ‘프로게이머’라는 생소한 개념을 소개하며 ‘저작권료 1만원’이라는 키워드가 눈길을 확 끌었다.
홍보대행사는 보도자료에 e스포츠가 무엇이고, 게임 개발사에 저작권료가 왜 발생하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또한 뉴퀘스트의 ‘저작권료 1만원 계약’은 저작권을 무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의미와 한국 e스포츠 창설을 적극 지지한다는 경제적인 의미가 더해진 계약이라고 설명했다.
기자들 역시 보도자료를 받아쓰며 황제국이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멀리 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통 크게 양보했다고 칭찬했다. 황제국은 보도자료를 돌리며 PC 게이머 등 월간지에도 내용을 보내고 짧게 인터뷰도 진행했다.
하지만 점점 홍보의 중심은 월 단위로 나오는 게임 잡지에서 일간지 경제/문화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99년이 되면서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무려 최대 8Mbps에 달하고 속도도 속도지만, 쓰는 만큼 돈을 냈던 PC 통신에 비해 월 몇만 원에 얼마든지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정액제로의 전환이 컸다.
<영건 블러드> 역시 여전히 PC방 접속이 많지만 점점 일반 가정집에서 접속하는 비율이 유의미하게 늘고 있었다. 인터넷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매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몇 년 정도는 게임 잡지가 버티겠지만, 게임 관련 정보는 빠르게 온라인으로 옮겨갈 것이다. 황제국은 이를 염두에 두고 홍보의 비중 역시 차근차근 조절하고 있었다.
인터넷 보급은 인터넷망 확충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초고속망이 깔려 있어도 접속할 컴퓨터가 없으면 소용없었다. 그런데 99년에 국내 컴퓨터 보급률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협회와 계약을 마치고 얼마 후 황제국은 전화를 받았다. 진희였다.
“응, 진희야. 웬일이야?”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엊그제도 기사 봤어요.”
“그랬어?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저,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보니까 아빠가 엄청 고민은 하는데 결정을 못 내리는 문제가 있던데, 오빠 사장님 의견이 궁금해서요. 제일 잘 아실 거 같아서.”
“고민? 진희컴 사장님이 무슨 고민을 하셔?”
“이번에 나라에서 국민 PC? 이런 이름으로 컴퓨터 사업을 하나 봐요. 거기에 우리 상가조합도 참여를 할까 말까 투표를 하는데 아빠가 어느 쪽이 좋을지 잘 모르겠는 눈치 같아요.”
“국민PC?”
정부는 IMF 극복을 위해 IT 산업 육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황제국이 S대 실험실 벤처로 뉴퀘스트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렸지만 도로를 아무리 넓고 깨끗하게 깔아도 돌아다닐 자동차가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컴퓨터를 잘 몰라도 누구나 믿고 살 수 있도록 100만원 대의 PC를 보급하기로 했고, 중소기업으로부터 사업자 입찰을 받았다. 용산전자상가조합도 여기에 참여하는 것 같았다.
“좋은 기회 같은데? 사장님한테 해도 괜찮을 거 같다고 말씀드려. 용산은 사실 우리처럼 컴퓨터 잘 아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잖아. 이제는 CPU가 뭐고, RAM이 뭔지 몰라도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올 거야.”
“끄쵸?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빠가 내 말은 영 안 들어요. 오빠 사장님도 저랑 같은 생각이라고 얘기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래. 궁금한 일 있으면 언제든 또 연락해.”
사실 황제국이 얼마 전 사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그래픽카드를 NVIDIA의 RIVA TNT2로 바꾼 것은 의도가 있었다. 그래픽 카드의 동향이 이제 부두에서 NVIDIA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국민 PC 대부분의 모델에 채택되는 그래픽 카드가 바로 RIVA TNT2였다.
<영건 블러드>는 철저하게 PC방에 맞춰 개발한 게임이었다. 그래서 모든 시스템 사양을 98년 당시 최고치로 잡고 개발했다. 멀티 플레이 중심이지만 여전히 PC 패키지로 판매하는 방식이었기에 당시에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99년을 기점으로 가정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고, 국민 PC 사업으로 이제 정말 컴퓨터가 없는 집이 없어진다. 이에 따라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차기작은 더이상 패키지가 아니라 100% 인터넷 게임을 만들기로 한 만큼, PC방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구상 아래 그래픽카드도 RIVA TNT2로 일괄 교체했다. RIVA TNT2에서 무리 없이 돌아가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와중에 민소영이 교육용 프로젝트로 소냐를 개발하다 황제국의 눈에 들었다.
소냐는 디테일을 제거하고 귀여운 몸통에 짧은 팔다리만 있는 캐릭터가 장애물을 극복하며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게임이다. 내용도 전 국민이 즐기기에 적합하고, 시스템 요구 사항에서도 황제국이 생각하던 방향과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협회 일을 처리한 황제국은 민소영의 소냐 프로젝트로 눈을 돌렸다. 아직 싱글 플레이만 있는 소냐를 네트워크 플레이용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러기 전에 우선 게임의 방향성을 검토하기로 했다. 황제국은 민소영, 콘텐츠팀과 함께 프로젝트 소냐 컨셉 회의를 열었다.
화이트보드 앞에 프로젝트를 만든 민소영이 섰다. 그녀는 교육용 프로젝트가 갑자기 차기작 후보로 올라가자 어리둥절했다. 회의 시작 전에 그녀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 그런데요. 아직 인턴인 제가 감히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의 PM을 맡아도 되나요?”
“그럼. 뉴퀘스트는 직급이나 경험만큼 아이디어와 실력이 중요해. 이건 소영이로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디까지나 후보니까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차기작이 될 수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프로젝트가 엎어질 수도 있어. 그건 아직 아무도 몰라.”
“아······.”
“아니, 왜 시작도 하기 전에 엎어진다는 말로 애 기를 죽이고 그래?”
전유진이 황제국에게 한마디 했다.
“그런가요? 그냥 너무 큰 부담 갖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그리고 소영이가 주도해서 이끌어 나가겠지만, 뒤에서 내가 디렉터 역할을 할 거야. 다만 <영건 블러드>처럼 모든 걸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한 발 뒤에서. 너무 엇나가지만 않게.”
“네, 알겠습니다.”
민소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황제국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건, 다른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건 소영이 네가 만들어야 더 재밌을 거 같아서야.”
“네? 왜요? 당연히 선배님이 하시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글쎄? 소냐는 소영이의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게 발전한 거잖아? 그런데 내가 지금 들어가서 둑을 한꺼번에 확 터버리면? 그러면 오히려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어.”
만약 황제국이 장애물 달리기 컨셉을 떠올렸다면, 그는 당연히 <영건 블러드>를 만들 때 사용했던 수수깡 모델을 가지고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을 것이다. 인간 형태의 수수깡과 귀여운 소냐의 캐릭터 차이만으로도 이미 둘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되어 버린다.
“이 게임은 특유의 간결함과 귀여움이 생명이야. 여기서 그걸 제일 잘 살릴 사람은 소영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PM을 맡기는 거야. 그러니까 자신을 가져. 알겠어?”
황제국의 말에 민소영은 확실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소냐의 컨셉 회의가 시작되었다. 민소영이 모두에게 물었다.
“저는 줄곧 달리고 피하는 것만 생각해서 다른 분들 의견이 궁금해요.”
“장애물 피해 달리기는 괜찮은 거 같아. 재미도 있고, 진짜 내가 달리는 거 같아서 신도 나고. 근데 전체적으로 패턴이 너무 단조로운 감이 있어.”
“응, 처음에는 바위, 단두대, 캐스터네츠같이 다양한 장애물인 거 같은데 모두 타이밍 맞춰 점프라는 건 좀 아쉬워. 장애물의 모양이 아니라 좀 다양한 패턴이 필요하지 않을까?”
“패턴도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방해하는 패턴만 있는 거 같아. 마리오를 보면 꽃을 먹으면 커지고, 별 먹으면 무적이 돼서 강해지는 패턴이 있잖아? 그런 플러스가 되는 패턴이 추가되면 어떨까?”
“전에 말했지만 그냥 달리기랑 점프 말고, 브레이크나 턴 동작 같은 다른 동작이 더 있으면 좋겠어. 단순한 게 매력이고 재미긴 하지만 너무 단순하면 금방 질릴 수 있을 거 같거든.”
“달리기만 하지 말고 뭔가 타는 건 어떨까? 자동차나, 오토바이? 아니면 롤러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같은 걸 타도 재밌겠다. 중간에 별을 먹으면 소냐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업그레이드하는 거지!”
“보드도 귀엽겠네. 아니면, 아니면 하늘을 나는 건 어때? 아이템을 먹으면 소냐에 날개가 생기는 거야. 10초간 장애물을 다 피하고 슝하고 날아가는 거지. 어때어때?”
“배경이랑 맵을 엄청나게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배경 컨셉도 마을, 시골, 사막, 계곡, 판타지 세계 등등 진짜 끝이 없겠다!”
“하늘을 난다고? 그럼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때? 심해 달리기! 중간에 침몰한 보물선도 찾고!”
“그럼 동굴 탐험 같은 맵도 있겠다.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에 박쥐들이 막 떼 지어 나타나는 거야. 후두두두두두두둑!”
차현주, 오종석, 전유진 콘텐츠팀 세 사람이 게임 컨셉과 플레이에 관해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민소영은 “네”, “그렇네요”, “진짜요”, “좋은 거 같아요” 등등 리액션을 남발하면서 열심히 받아적었다.
황제국은 일부러 회의에 개입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프로젝트 컨셉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그가 없을 때 회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고편을 보는 느낌으로 지켜봤다.
‘너무 중심이 없는데.’
민소영이 프로젝트 PM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인턴이라 선배들 틈에서 회의의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경험이 없는 민소영은 의견의 소용돌이 속에서 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황제국은 너무 놔두는 것도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자율이 아니라 방치에 불과했다.
“그런데 말야.”
결국 황제국이 조금 방향성을 잡아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계속 듣고만 있던 황제국이 한마디 하자 모두가 황제국을 돌아봤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민소영이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계속 들어보니까 게임을 어떻게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에 관한 아이디어는 많아. 나온 의견들은 비슷한 내용별로 따로 묶어서 비교해가면서 적용해 보면 될 거 같아. 근데 더 중요한 걸 아무 얘기 없이 넘어가는 거 같아.”
“더 중요한 거요?”
“게임의 형식.”
“형식이요? 그건 이미 틀이 어느 정도 잡힌 거 아닌가요? 제가 만든 게임에 네트워크를 붙인다는 걸로요.”
민소영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지. 네트워크 플레이로 전환하기 때문에 더더욱 게임의 형식을 다시 생각해야지. 지금 개발한 버전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지? 따로 레벨이나 스테이지 없이 끝까지 달려서 살아남는?”
“네.”
“자, 그럼 상상해보자. 이 게임을 하려고 여덟 명이 방에 모였어. 그리고 동시에 출발했는데 한 사람이 첫 장애물에서 죽었어. 이 사람은 죽었으니까 아무것도 못하겠지? 근데 하필 다른 사람이 초고수야. 게임이 5분, 10분이 지나도 안 끝나. 그럼 어떡하지?”
“아, 그래도 언젠가는 분명 끝이······.”
“물론 끝이 나기는 나겠지. 하지만 어떤 제한도 없이 오직 난이도만 높이는 방식으로 인터넷 게임을 짜면 이런 예외 상황이 생길 수 있어. 하는 사람은 재밌겠지만 초반에 죽은 사람은 어떡해? 그러다 짜증 나서 그냥 컴퓨터 재부팅 시켜버리고 나가버리면? 그러다 방이 폭파되면?”
황제국의 질문에 민소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오종석이 황제국에게 눈치를 줬다. 황제국은 왜 그러지 하다가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게임이 지금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야. 오해하지 마. 다만 인터넷 게임에 맞춰서 기본 형식부터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거야. 내용을 붙이는 건 그다음이야. 우선 기본 틀부터 잡는 게 중요해. 봐봐. 소냐라는 캐릭터의 틀을 소영이가 잘 잡아놓으니까 프로젝트가 이만큼 올 수 있었잖아.”
황제국은 자칫 민소영을 혼내는 듯한 인상을 줄까 봐 얼른 말의 방향을 돌렸다. 민소영이 황제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고치는 게 나을까요?”
“그걸 이제 다 같이 생각해 봐야지. 제일 좋은 방법은 질문을 계속 던지는 거야. ‘현재 게임 방식이 멀티플레이에도 적합한가?’라고 물어봐. 내 생각에 그 대답은 ‘아니요’야.”
“네, 저도 그런 거 같아요.”
민소영과 콘텐츠팀이 모두 동의했다.
“그럼 다 같이 문제의식을 느꼈으니 다음 단계로 가야겠지? 다음에는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황제국이 질문하자 민소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