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 업그레이드
알파테스트를 마친 후, 황제국은 오종석에게 게임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종석은 노트를 빌려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며 진지하게 설명을 들었다.
“어때? 이해가 갔어?”
“응. 대충 감이 왔어. 몇 번 더 해보면 확실히 알 것 같아. 근데 진짜 놀랍네.”
“뭐가?”
“게임 말야. 그냥 플레이할 때는 간단해 보였는데, 이렇게 뜯어보니까 정말 세세해. 유닛 이동 속도도 다르고, 공격력, 수비력, 체력에 공격 범위에. 그리고 또, 공격 속도? 그런 것도 일일이 정해주는지 몰랐어.”
오종석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유닛은 사람이랑 다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알려줘야 해. 그뿐이게? 모든 요소 사이에 밸런스가 맞아야 하지.”
“맞아. 기병은 너무 세다니까.”
“아직도 그 소리야? 유닛 세부 스탯도 아직 확정 아니니까 기다려 봐. 계속 조정할 거야.”
“그래, 알았어.”
오종석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난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지?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일단 조조의 기본 시나리오부터 정하는 게 좋겠지? 기왕이면 <삼국지>에서 조조가 참여한 전투 중 중요한 걸 하나 뽑아서 골라봐.”
“알았어. 조조라면 흠······, 역시?”
“적벽은 안 돼.”
“우씨, 나도 알거든? 내가 바보냐? 이 게임에 수전(水戰) 없는 거 이제 안다고.”
“알면 됐고. 시나리오 정하면 전투맵이랑 공성전 어떻게 짤지 일단 종이에 그려가면서 구상만 해봐.”
“오케이! 문제없어. 아, 근데 우리 집에는 <삼국지> 책이 없는데. 여기서 책 읽으면서 해도 상관없지?”
“응. 어차피 너 맨날 여기서 빈둥거려도 난 개발 했으니까.”
“빈둥대다니. 자식이 말을 해도 꼭.”
오종석은 꿍얼꿍얼하면서 <삼국지> 열 권을 뽑아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역시 황제국에게 빌린 노트와 펜을 펼치고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황제국은 오종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노트와 펜을 빼면 오종석의 자세는 매일 와서 놀고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어차피 오종석에게 큰 기대를 하고 조조 편을 맡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참고할 아이디어를 건질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또, 친구가 관심을 보이는 게 기분이 좋기도 했고.
황제국은 워크맨에 카세트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오늘 노동요는 프로젝트 앨범 <카니발>이었다. 학창 시절에 좋아하던 노래를 동시대에 다시 즐기며 일하는 기분은 꽤 즐거웠다.
그는 오종석이 게임을 하면서 보인 세세한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언제 좋아하고, 언제 짜증 내고, 언제 조바심을 냈는지.
게임 개발자에게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리액션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피드백이었다. 친구가 만든 게임을 정말로 솔직하게 평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래서 ‘말’은 어느 정도 걸러서 들어야 한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나오는 표정과 몸짓은 속일 수 없다. 찰나의 순간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오종석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 해보는 게임을, 그것도 그래픽은 허허벌판에 허수아비들이 싸우는 상태였음에도 오종석은 게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황제국은 유닛들의 스탯을 조정해가며 반복해서 플레이했다. 에디터부터 만든 덕분에 쉽게 수정하고 결과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맵을 짜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오종석이 뭘 하나 봤지만 오종석은 계속 <삼국지>만 읽고 있었다. 황제국은 굳이 뭐라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는 되도록 남이 일할 때 끼어들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처음 일을 맡길 때는 도구와 원하는 결과만 제시하고 어떻게 가져오는지 지켜본다. 그래야 상대방이 일하는 스타일과 능력을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황제국이 열심히 에디터로 전투맵을 짜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가 다 지나고 있었다. 그는 헤드폰을 벗고 몸을 돌렸다. 오종석이 침대에서 자고 있으면 깨워서 같이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종석은 황제국이 돌아보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다 끝났어? 이제 내가 한 거 볼 수 있냐?”
“응? 벌써 다 했어? 다 했으면 날 부르지. 그냥 기다렸어?”
“엄청 집중한 거 같길래. 방해 할까 봐.”
“기특하네.”
황제국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가 회사에 다닐 때 한참 코딩에 집중하고 있는데 급하다면서 별것도 아닌 일로 난리 치는 사람을 여럿 겪었다. 그렇게 집중력이 한 번 끊어지면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반면 오종석은 같이 일하는 사람의 시간까지 배려하고 있었다.
‘일단 기본은 된 거 같고.’
황제국이 결과를 보여달라고 하자 오종석이 노트를 들더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이거 생각보다 긴장되네. 수능보다 더 떨리는 거 같아.”
“뭘 그렇게 긴장했어? 딱딱하게 할 거 없어. 그냥 편하게 해. 나도 편하게 들을 테니까.”
“그럴까?”
황제국이 의자에 앉은 채 발을 침대 위에 걸쳤다. 그러자 오종석도 침대에 걸터앉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발표를 시작했다.
“일단 제일 먼저 조조를 선택했을 때 메인 시나리오를 생각해 봤어.”
오종석은 노트를 마치 프레젠테이션용 PPT처럼 가슴 앞에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공책을 넘기자 조조의 메인 시나리오가 나왔다.
“조조의 메인 시나리오는 관도대전(官渡大戰)이야!”
“응? 그건 원소랑 싸운 거 아니야?”
“어, 맞아. 왜? 원소랑은 안 돼?”
“아니, 그건 아니고. 군주가 유비, 조조, 손권이니까 서로 싸우는 게 낫지 않나 싶은데.”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조조가 직접 출병한 전투에서 제일 유명하고 스케일이 큰 게 적벽대전이랑 관도대전인데, 둘 다 못하면 조조로는 싸울 맛이 안 나.”
“흐음, 분명 그렇기는 한데······.”
“게다가 관도대전이 아니면 ‘오소 추격전’을 쓸 수가 없다고.”
“추격전? 디펜스 게임인데 추격전을 넣었다고?”
“응. 너가 그랬잖아. 수비만 하는 건 아니고 공격도 넣을 거라고. 관도대전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조조가 오소에서 군량을 지키는 순우경 부대를 작살낸 거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걸 게임으로 구현하면 진짜 끝장일 거 같아!”
황제국은 처음에는 오종석의 발표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디펜스 게임에 추격전이라니. 장르를 파괴하는 짓이었다.
반면 오종석은 말할수록 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오소 추격전을 설명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주 진지해졌다.
황제국은 생생하게 빛나는 오종석의 눈빛과 목소리에 실린 힘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 보았다.
오종석의 말처럼 오소 추격전이 정말 재미있다면, 굳이 ‘디펜스’라는 형식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이번 목표는 정통 디펜스 게임이 아니었다.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그는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좋아. 그럼 오소 추격전이 어떤 건지 한 번 보여줘.”
“알았어! 잠깐만!”
오종석이 신이 나서 노트를 휙휙 넘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노트를 찢더니 종이 다섯 장을 침대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오소 추격전은 이거야. 횡 스크롤로 다섯 개의 맵을 이어 붙인 건데, 일단 제일 큰 목적은 도망치는 원소의 순우경 부대를 따라잡는 거야. 가는 길에 당연히 방해를 받지. 방해하는 적을 물리치면서 가야 해. 근데 시간제한이 있어.”
“시간제한?”
“응. 뒤에서 원소의 기마 부대가 도우러 오거든. 만약 조조 군대가 먼저 수비를 뚫고 순우경 부대를 따라잡지 못하면, 조조는 앞뒤로 포위당해.”
“그럼 맵에서 부대 배치가 핵심이겠는데? 조조가 아슬아슬하게 순우경을 잡도록 해야 할 테니까.”
“그렇지! 만약 조조 군대가 너무 빨리 앞서간다 싶으면 방해꾼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지. 그건 조절할 수 있잖아? 그치?”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황제국은 솔직히 놀랐다. 오종석의 아이디어는 분명 그럴 듯했다. 디펜스 게임은 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기서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디펜스를 뒤집어서 추격전이라는 콘텐츠로도 얼마든지 아슬아슬한 재미를 줄 수 있었다.
반복되는 형식 때문에 디펜스 게임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르. 여기서 게임의 핵심 요소를 뒤집어 새로운 재미를 만들었다. 억지로 만든 스테이지가 아니라 <삼국지>의 역사적 시나리오에서 따온 스테이지였다. 추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해보자!”
“예스, 그렇지! 고마워. 와~, 너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엄청 조마조마했잖아.”
“그랬어? 겉으로는 안 그래 보이던데.”
“야, 포커페이스지, 인마. 속으로는 완전 간이 콩알만 해 졌다구.”
오종석이 비로소 웃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국은 오종석을 조금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둘은 오랜 친구였고, 오종석은 나중에 대기업에 입사해서 대성하는 친구다. 그렇지만 둘이 같이 손발을 맞춰 일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황제국은 오종석이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올라간 만큼, 일할 때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는데 거침이 없고, 불도저처럼 전진하는 스타일일 거라 지레짐작했었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고, 솔직했다. 무엇보다 황제국이 장르의 원칙에 빠져있을 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비록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어디까지나 황제국이었다. 그는 <삼국지:공성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 보스였다. 다만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보스가 아니었다.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건설적인 의견이라면 언제나 환영했다.
오종석은 다시 처음부터 조조 시나리오와 전투맵을 설명했다. 황제국은 맵을 리뷰하면서 손 볼 지점들을 알려주었다. 전체적으로 스테이지 개수를 많이 늘려야 했지만 흐름은 좋아 보였다.
리뷰를 마치자 오종석은 그가 생각하는 <삼국지:공성전>에 추가했으면 하는 요소들을 따로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황제국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시킨 일도 처음치고 제법 잘하는데, 심지어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했네?’
황제국은 처음에는 반 장난으로 오종석에게 일을 주었지만, 이제는 오종석이 앞으로 중요한 일꾼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종석에게 맡긴 조조 시나리오가 일종의 입사 테스트가 된 셈이었다. 황제국은 나중에 게임 회사를 창업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오종석과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이번엔 황제국이 오종석 집을 방문했다. 그는 수정을 거친 에디터를 오종석 컴퓨터에 설치해 주었다. 그리고 에디터 기능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오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탄했다.
“오오, 게임을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그럼 이 에디터도 제국이 니가 만든 거야?”
“그럼 내가 만들지. 나 말고 누가 또 있어?”
“와, 진짜 황제 폐하. 이정도 천재일 줄은 몰랐네.”
황제국은 에디터와 오소 추격전 배경 이미지 파일을 전달하고, 추격전 스테이지를 통째로 오종석에게 맡겼다. 오종석은 감격하여 열의에 불타올랐다.
“마지막에 내가 다시 검토해서 수정할 거야. 이상하면 싹 바꿀 수도 있다는 거 미리 알아둬.”
“당연하지. 이건 제국이 네 게임인데. 난 어떻게 바꿔도 불만 없어.”
설명을 마친 황제국은 잠시 오종석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때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종석이 있죠?”
“그래, 들어가 봐라.”
황제국이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어볼 새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큰 후드티에 야구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들어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종종! 나 합격했다!”
황제국은 화통한 목소리에 한번 놀라고, 그녀의 얼굴에 두 번 놀랐다.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