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회 - 월동준비
황제국이 뜬금없이 부탁할 게 있다는 말에 민소영은 바짝 긴장했다. 황제국이 그녀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올해 연말에 열리는 뉴퀘스트 컨퍼런스에 팔로 알토 오피스에서 젤리 러쉬 라이브팀도도 올 겁니다. 다들 알고 있죠?”
“네.”
“미국 PM 멜리사가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내용을 두 가지로 정해서 알려줬어요. 예상대로 하나는 국립 공원 시리즈 제작 과정이고, 또 하나는 브랜드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게임 플레이 재설계에요.”
황제국이 팀마다 발표 주제를 따로 정해주지는 않았다. PM이 팀원들과 상의해 가장 공유하고 싶은 케이스 스터디 주제를 자율적으로 정하면 황제국은 승인만 했다.
“방금 보셔서 아시겠지만 반스 콜라보는 그저 젤로에 브랜드 옷을 입힌 게 아니에요. ‘달리기’라는 <젤리 러쉬>의 핵심 게임성을 스케이트보드로 변형시켰죠. 행동 패턴을 바꾸면서 게임 플레이가 변했지만 스피드와 경쟁이라는 핵심 요소를 오히려 강화해서 게임성을 높였죠.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주제만 해도 여러 가지예요.”
황제국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면서 과연 어디까지 상대 브랜드를 위해 게임을 변형할 수 있는가? 게임을 수정하면서까지 콜라보레이션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달리기를 스케이트보드로 변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게이머들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었는가? 등등등. 끌어낼 수 있는 주제가 아주 많습니다.”
“멜리사와 자주 메일을 주고받는데 스케이트보드 만드느라 힘들고 스트레스받는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주 멋지게 해냈네요.”
민소영이 말하자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와 라이브 팀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따라올 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반스 콜라보를 협의할 때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협의를 진행하기도 수월했죠. 아마 실제 개발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생각 이상이었을 겁니다. 완성도를 보면 나한테 보여주기 전에 얼마나 게임을 가다듬었는지 알 것 같네요.”
젤리 러쉬 개발자들도 그 말에 수긍했다. 달리기 게임을 몇 개월짜리 브랜드 콜라보레이션을 위해 스케이트보드 게임으로 바꾸는 건 엄청난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그런데 팔로 알토에서 어려운 임무를 멋지게 해냈다.
황제국은 개발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대단하다며 순수하게 감탄하기보다는, 팔로 알토 라이브팀의 실력과 배짱에 깊은 인상을 넘어 위기감이 느낀 것 같았다.
월드컵 기간 동안 미니 축구게임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스케이트보드를 탄 젤로를 보는 순간, 민소영과 개발팀은 기획에 따라 <젤리 러쉬>의 확장성이 정말 끝이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갖가지 기술을 부리는 젤로의 모습은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민소영의 눈에도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게임을 파악해서 뜯어고쳤는지 눈에 보였다.
달리기와 스케이트보드는 기본자세부터가 달랐다. 그저 젤로를 스케이트보드 위에 태운다고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동작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스케이트보드 기술 구현, 그에 따른 물리 법칙 수정, 새로운 규칙 마련, 스케이트보드에 맞는 맵 연구 등 많은 부분에 손을 대야 한다.
멜리사와 팔로 알토 팀은 이를 완벽하게 해냈다. 민소영의 마음속에서 오랜만에 무언가 꿈틀거렸다. 질 수 없다는 경쟁심이었다. 그때, 황제국이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뉴퀘스트는 한국 회사고, 컨퍼런스 역시 한국에서 열립니다. 저는 당연히 뉴퀘스트의 중심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아직도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젤리 러쉬>에 좀 더 특별한 기획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연말 기획을 준비하고 있어요. 산타클로스 마을을 테마로 잡아서 좀 더 심화한 기획을 만드는 중입니다.”
민소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황제국이 일부러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누가 봐도 건성이었다.
“네, 어떤 식이 될지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집니다. 산타의 마을이라니 아주 예쁠 거 같아요. 그런데 제 우려는 이런 겁니다. 컨퍼런스에서 젤로가 스케이트보드 타는 걸 본 사람들이 과연 산타 마을 정도로 만족할 것인가? 저는 그게 의문입니다.”
“아, 그건······.”
민소영은 머뭇거렸다. 황제국의 지적에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컨퍼런스에서 스케이트보드 플레이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아기자기한 산타 마을이 등장하는 정도의 연말 업데이트는 평범하게 느낄 것 같았다.
황제국이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그리고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뉴퀘스트는 1998년에 창업했습니다.”
“네?”
황제국이 갑자기 창업 이야기를 꺼내자 민소영은 당황했다. 그때 민소영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황제국을 빼면 그때 뉴퀘스트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해 창업하고 참 여러 일들이 있었어요. 동아리 만들고, 일본에 게임 기획 팔고, 진수형이랑 퀘스트 엔진 만들고,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이라는 특이한 컨셉으로 콘텐츠 개발하고, 우연히 유희철을 만나고, 투자자 찾아다니고, 유통 계약하고, 학교 축제에서 처음 게임 공개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1년 만에 다 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뉴퀘스트에 입사하면 사내 교육에서 뉴퀘스트 창업 과정을 자세하게 듣는다. 뿐만 아니라 각종 게임잡지, 신문, 경제지, TV 다큐멘터리 등 온갖 매체에서 나온 유명한 이야기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단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정말 1년을 말도 안 될 만큼 열심히 살았어요. <영건 블러드>를 출시하고 나니까 1년 동안 하루도 제대로 쉬지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지나고 연말 MT를 떠났습니다. 럭셔리한 SUV 한 대 빌려서 스키장으로 갔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스키를 탔거든요? 근데 저는 스키 안 탔어요.”
“왜요?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요. 혼자 보드 타러 갔거든요. 1년 동안 게임만 만드느라 체력이 저질 돼서 엄청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진짜 재밌었어요. 신나게 타다가 눈 위에 쓰러져서 생각했죠. 나중에 이 느낌을 살려서 보드타는 게임을 만들면 참 재밌을 거 같다구요.”
“......?”
민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왜 뜬금없이 황제국이 98년 얘기를 꺼냈는지 그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럼 저희가 만들어 볼까요?”
“뭘요?”
민소영이 눈치채고 물었지만, 황제국은 오히려 모른 척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 게임이요. 스노보드 타는 게임. 이번 연말 크리스마스 업데이트에 스노보드 타는 젤로를 만들어볼게요.”
“아?!”
개발자들도 뒤늦게 황제국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황제국이 힘들지 않겠냐는 표정으로 민소영에게 물었다.
“연말 업데이트에 적용하려면 이제 4개월도 채 남지 않았어요. 기획, 개발, QA까지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정말 할 수 있겠어요?”
“네! 물론 할 수 있어요. 팔로 알토에서도 했는데 저희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죠?”
황제국의 도발 아닌 도발에 말려든 민소영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라이브팀 개발자들을 돌아봤다. 순간 민소영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여기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팔로 알토에서 스케이트보드 젤로를 만든 이상, 한국 오피스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대항마가 필요했다. 황제국은 일부러 98년 이야기를 꺼내 슬쩍 힌트를 던졌다. 스노보드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젤로를 만들기 위한 황제국의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미끼를 문 민소영에게 의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민소영은 <젤리 러쉬> 이전에 소냐부터 시작했던 <젤리 러쉬>의 오리지널 크리에이터였다. 팔로 알토건, 실리콘밸리건 <젤리 러쉬>에서만큼은 그녀와 한국 팀이 당연히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의 <젤리 러쉬> 팬들이 스케이트보드 젤로를 보면서 침을 흘리며 부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과 경쟁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서울 라이브팀 개발자들 역시 미국 팀에 꿀린다는 평가를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제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럼요. 우리가 원조인데요.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보드도 보드지만, 눈 처리도 쉽지 않겠지만···, 하아. 그래도 해봐야죠.”
“4개월······. 네, 마침 죽을 사네요. 죽을 각오로 하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죽을 각오로 임하신다니······. 완전 감동이에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민소영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파이팅 넘치는 개발자들의 열정에 감동했다. 한 군데 꽂힌 민소영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시그널을 오해하곤 했다.
2002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상반기를 열심히 달렸던 라이브팀은 이제 다시 스노보드 젤로를 준비해야 했다. 개발자들은 벌써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할지 스키장과 스노보드를 머릿속으로 구상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일단 올해 크리스마스에 일부만 공개하고, 내년에 좀 더 다듬어서 겨울 시즌용으로 확장한다고 생각하세요. ‘겨울에 스키장 대신 PC방 가자’라고 프로모션도 내걸구요.”
황제국이 웃으며 말했다. 스케이트보드와 스노보드는 언뜻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많이 달랐다. 바퀴가 달려 굴러가는 것과 눈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차이가 컸다. 달리는 젤로에 스케이트보드를 얹는 것도 어려웠지만, 눈 위에서 달려야 하는 스노보드는 그보다 한층 더 어려웠다.
“우선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기획부터 해보세요. 그리고 미국이 스케이트보드를 했다고 우리도 스노보드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겨울 스포츠는 스키라는 선택지도 있으니까요.”
황제국의 말에 어떻게 스노보드를 구현할지 궁리하느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개발자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스키는 스키 폴(스틱)이 있기 때문에 운동 에너지를 얻기 더 수월했다. 타는 자세도 정면을 향하고 있어서 기존 달리기와 더 가까웠다.
“검토해 보시고 일정 안에 가능한 거, 더 잘 할 수 있는 걸 먼저 하도록 하세요. 그동안 <영건 블러드>도 <젤리 러쉬>도 매년 크리스마스 업데이트에서 눈을 배경 요소로밖에 못 썼잖아요? 전 그게 항상 아쉬웠거든요. 눈을 실제 플레이 영역으로 끌어오고 싶었는데 이제는 때가 된 거 같네요.”
그 말에 개발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황제국은 스노보드 외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스키 젤로라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스노보드 젤로에 비하면 여러모로 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황제국은 무조건 스노보드 젤로를 만들라는 게 아니라 ‘겨울 스포츠’에 맞게 게임을 수정해 보라고 지시했다. 선택의 폭이 생긴 것만으로도 개발자들은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알겠어요. 빠르게 검토해서 환상적인 눈의 나라로 만들어 볼게요.”
민소영도 수긍하며 대답했다. 서울 오피스와 팔로 알토 오피스의 라이브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자극했던 황제국이 마지막엔 조금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조삼모사요, 병 주고 약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월드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마주한 개발자들에게는 숨 쉴 구멍이 생긴 것만 같았다.
또한 황제국 입장에서는 민소영이 새로운 미션에 너무 불타올라 무리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주는 것이기도 했다. 민소영 특유의 집요함이 경쟁심과 만나면 보나 마나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할 게 분명했다.
<젤리 러쉬>를 개발할 때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일할 때는 가능한 방법이었다. 자원이 한정된 회사에서 뛰어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젤리 러쉬 라이브팀 개발 부서만 해도 <젤리 러쉬>를 만들 때의 뉴퀘스트 전체 인원보다 많았다.
PM 혼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만드는 시스템도 아니었고, 그랬다간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져 오히려 팀의 퍼포먼스를 떨어뜨릴 게 뻔했다. 황제국은 민소영을 따로 불러서 프로젝트 일정을 짜면서 개발자들을 너무 자기식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제 소영 PM도 알겠지만 사람마다 일하는 속도가 달라. 계획을 오래 짜는 반면 실행은 빠르게 하는 사람도 있고, 일단 뛰어들어 만들어 본 다음 시간을 들여 수정하는 사람도 있고. 일하는 방식도, 속도도 천차만별이야. 물론 다들 뛰어난 분들이지만 스타일은 다르니까 그런 부분을 앞으로 좀 더 고려해 주면 더 좋겠어.”
“제가 너무 독불장군인가요?”
“평소엔 아니지. 근데 뭐 하나 일에 꽂히면 좀.”
“알겠어요. 고쳐 볼게요. 이번 겨울 스포츠도 실망시키지 않고 잘 해낼 거예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뭐가?”
“전 선배님이 이제 TW에 신경 쓰시느라 <젤리 러쉬>에는 더 이상 관심 없으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무슨 소릴. 아무리 차기작이 중요해도 난 모든 게임에 다 신경 쓰고 있어. 게다가 <젤리 러쉬>는 우리 회사를 떠받치는 기둥인데. 내가 관심이 없을 리가 있어?”
“네, 제가 잘 못 생각했나 봐요.”
“소영 PM은 여태까지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 없어. 이번에도 분명 잘 해낼 거라 믿어.”
“고맙···습니다.”
민소영은 아주 잠시 황제국을 바라보다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 눈빛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잠시 의미 없이 책상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던 황제국은 다른 생각을 떨쳐내고 달력을 집어 들고 일정을 확인했다.
게임 업데이트, 컨퍼런스 준비, 차기작 개발까지 회사가 커질수록 신경 써야 할 일도 늘었다.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제때 굴러가도록 체크하고 있어야 한다.
<젤리 러쉬>를 정리한 황제국은 다시 TW로 생각을 옮겨 갔다. 내일은 TW 아트디렉터 장경일이 입사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