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회 - 투 트랙 RPG
“다른 제안이요?”
뜻밖의 말에 네이트와 올슨은 죽어가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RPG 콤비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네이트가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어떤 제안인가요?”
“우선 한 가지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던전 속으로>의 전투 시스템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냥 액션 게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생생한 전투의 느낌이 살아 있어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논타겟팅은 시스템에 부하가 심합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게임이 느리면 소용없죠. 특히나 실시간 전투가 핵심인 시스템에서는요. 상호모순이니까요. 그렇다면 만약.”
“만약······?”
“던전 컨셉을 유지하고 전투를 일반 타겟팅 방식으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네? 진심이십니까?”
“두 분의 의견을 묻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연산 과정을 훨씬 줄일 수 있고, 최적화 작업까지 더해지면 지금보다 훨씬 게임이 빨라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네이트와 올슨은 황제국의 질문에 당황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다시 마주쳤다. 둘은 머릿속으로 <던전 속으로>를 타겟팅 방식으로 완성한 게임을 상상해 보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오나 했는데. 이제와서 게임을 퇴보시키라고···?’
네이트는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게임을 내본 적이 없었던 네이트에게 지금은 절호의 기회였다. 뉴퀘스트는 떠오르는 게임 회사였고, 퀘스트 엔진 2로 만드는 신작에, 회사의 첫 RPG가 나온다면 분명 게이머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될 것이다.
그가 여기서 자존심을 접고 타겟팅 방식을 선택한다면 일생에 처음으로 히트작 RPG를 만들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올슨은 입을 닫고 네이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처음 시스템 구상은 올슨이 했지만 논타겟팅은 네이트가 주도했다.
네이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황제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게임의 장점이 모두 죽어 버립니다. 스태미나도 무의미해지고, 간격과 타이밍 싸움을 위해 만든 각종 스킬도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논타겟팅이라서 가능한 전투의 박진감이 전부 사라지고, 그러면 게임의 영혼도 함께 죽어버릴 겁니다. 그건 더 이상 <던전 속으로>가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네이트의 단호한 대답에 올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네요. 아쉽긴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네요. 그렇다고 친구를 버리고 배신할 수도 없구요.”
“역시 그렇군요. 두 분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제 생각이랑 같아서.”
“네?”
“전 두 분이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책임질 각오와 열정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정도 열의라면 저도 두 분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네이트와 올슨은 황제국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은 그저 눈만 깜빡였다. 황제국이 설명을 시작했다.
“뉴퀘스트는 인터넷 게임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알고 계시죠?”
“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외를 둘 생각입니다. <던전 속으로>를 싱글 플레이용 패키지 게임으로 만들어 주세요.”
“네?!”
“정말입니까?”
RPG 콤비가 귀를 의심했다. 황제국은 인터넷 게임에 올인한 사람이었다. 뉴퀘스트 직원이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그런데 지금 황제국은 자신의 원칙을 깨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던전 속으로>를 데모용으로 한 번 쓰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렇다고 논타겟팅을 유지한 채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려면 아마 최소 5년, 어쩌면 10년 이상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 언젠가는 가능한 날이 오긴 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던전 속으로>에 리소스를 투입한 건 설령 차기작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다가오는 E3에서 데모 게임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이트와 올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황제국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제가 굳이 <던전 속으로>를 번거롭게 사내 공개 시연회에서 보여주자고 한 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였어요. 저는 <던전 속으로>를 높게 평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니까요. 별다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봤을 때의 생생한 반응이 궁금했거든요.”
“어쩐지. 갑자기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사내 공개 시연회를 하신다고 해서 좀 의아했습니다.”
올슨이 이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반응을 보니 제 예상이 맞았어요. 우리 회사 직원들조차 이런 게임이 가능하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반응이 그 정도였나요? 전 게임이 제대로 작동하나 그것만 신경 쓰느라 정작 사람들은 보지도 못했어요.”
“굉장했습니다. 아마 일반 게이머들은 더 하겠죠. 그냥 마우스만 클릭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진짜 ‘액션’을 강조한 RPG에 분위기까지 끝내주니까요. 그래서 홍보용 데모 게임으로만 쓰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보스. 진짜 열심히 만들겠습니다!”
네이트와 올슨이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둘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황제국이 덧붙였다.
“다만 <던전 속으로>를 패키지 게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RPG 콤비는 황제국이 조건을 내걸자 다시 긴장했다.
“문제가 하나 있거든요. <던전 속으로>를 싱글 플레이용 패키지 게임으로 만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온라인용 RPG 전투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던전 속으로>는 우리의 기술력과 창의력을 뽐내는 게임입니다. 두 분은 최신 기술을 최대한 사용해서 게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세요. 다만.”
황제국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현재의 전투 시스템보다 스펙을 낮춘 전투 시스템을 또 하나 개발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스펙을 낮춘다고 하시면···?”
“타겟팅 방식과 논타겟팅의 중간 정도가 될 것 같네요. 반자동(Semi-automatic) 타겟팅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방식을 생각하고 계시나요?”
“우선 기본은 공격 범위 안에 있는 몬스터가 있으면 가장 가까운 적을 시스템이 자동으로 타겟으로 지정하는 방식입니다. 데미지는 시스템이 타겟팅한 적에게만 들어가구요.”
“오토 타겟팅이네요?”
“네, 하지만 내가 공격하고 싶은 몬스터가 있으면 클릭으로 지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시스템에 맡길 수도 있고, 내가 지정해서 공격할 수도 있죠. 필요에 따라, 전략에 따라, 상황에 따라 게이머가 각자 판단해서 싸우는 거죠.”
“음, 그런 방식이라면 스태미나 게이지는 제거해야 겠네요.”
“아무래도요. 전투를 좀 더 쉽게 만드려는 거니까요. 사실 지금 방식이 박진감 넘치고 재미는 있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조작이 능숙하지 못한 게이머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게임이에요. 온라인 RPG로는 장벽이 상당히 높아요.”
“그렇죠. 네이트만 해도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제일 약한 몬스터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서 쩔쩔매니까요.”
올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네이트는 뭐라고 반박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올슨과 입씨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이트가 황제국에게 물었다.
“저 뭐 하나 질문해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그럼 저희가 <던전 속으로>를 완성한 다음, 그 반자동 타겟팅 방식으로 또 새로운 온라인 RPG 게임을 만드는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황제국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백지 하나를 집어 반으로 접고는 양면에 무언가를 적었다.
“제 구상은 이렇습니다.”
그가 두 사람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 싱글 RPG - 논 타겟팅 - 미국 ]
[ MMORPG - 반자동 타겟팅 - 한국 ]
“아직 회사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두 분은 <던전 속으로> 개발자니까 특별히 말씀드릴게요. 이번에는 미국에서 싱글 RPG를, 한국에서는 MMORPG를 개발하는 투 트랙(two track)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아, MMORPG를!”
올슨이 눈을 번쩍 떴다. 1997년 오리진에서 <울티마 온라인>을 서비스하기 시작한 이래로 MMORPG는 RPG의 꽃이자 끝판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대규모 월드에서 수많은 게이머가 동시에 접속해 즐기는 MMORPG는 인지도, 콘텐츠, 기술력, 운영력 등이 모두 갖춰져야 가능하다.
만들기도 힘들지만, 히트시키기는 더 어렵고, 인기를 유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준비해야 하는 게임 콘텐츠는 패키지 게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주기적인 업데이트도 필수다. 혼자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게이머와 인터랙션이 일어나고, 심지어 서로 싸우고 죽일 수도 있으며, 세력을 이루어 게이머들끼리 대규모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게임 내 흐름과 상관없이 그저 대륙을 모험하며 자기 마음대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싸우는 것보다 게임 안에서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MMORPG는 개발사가 어떻게 게임의 메인스트림을 설계하든 즐기는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즐긴다. 그만큼 화려한 그래픽은 물론이고 다양한 콘텐츠와 깊이 있는 세계관, 체계적인 운영과 수많은 동접자를 커버할 수 있는 네트워크 기술까지 다방면으로 필요한 장르다.
한국에서 성공한 <레가시> 역시 MMORPG로 오랫동안 게임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다. 2002년 현재 북미에서는 <울티마 온라인>, <에버 퀘스트> 등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2년 후 2004년 11월이면 블리자드에서 MMORPG의 최강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서비스를 시작한다.
황제국의 목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뛰어넘는 MMORPG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성공한 글로벌 게임 개발사가 된 뉴퀘스트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젤리 러쉬>의 성공으로 뉴퀘스트는 적어도 몇 년간은 재정적으로 큰 부담없이 블록버스터급 차기작을 준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지금이야말로 MMORPG를 개발할 적기라고 황제국은 판단했다.
처음 팔로 알토 오피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네이트와 올슨 콤비에게 RPG 전투 시스템을 만들어보라고 했을 때만 해도 가벼운 몸풀기였다. 두 사람이 몇 가지 모형을 만들면 이를 기반으로 제대로 사람을 뽑고, 대형 팀을 구성해서 MMORPG 프로젝트를 구체화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콤비는 RPG 전투 시스템에 진지하게 매달렸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가볍게 만들어 보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애초에 RPG로는 ‘가볍게’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3D일 뿐 특별한 개성이 없었는데, 볼 때마다 몰라볼 정도로 발전하더니 결국 <던전 속으로>를 들고 나타났다.
MMORPG를 구상하고 있던 황제국은 고민이 커졌다. 황제국은 두 사람에게 온라인 게임에 어울리지 않는 시스템은 접고 내가 주문하는 방식으로 만들라고 오더를 내릴까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이 과연 게임을 어디로 이끌지 황제국도 궁금했다. 게다가 그가 지시하는 대로만 게임을 만드는 건 뉴퀘스트의 방식도 아니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MMORPG에 맞게 만들라고 지시를 내렸어야 했어.’
처음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개발을 맡겨놓고는 나중에 뒤집어엎는다면 한창 열정적으로 개발 중인 네이트와 올슨의 날개를 꺾는 일이었다. 불분명한 업무 지시를 내렸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치듯 말을 바꾸는 상사들과 일할 때 심정이 어떤지 황제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테스트 삼아 시작했던 일이니만큼 끝까지 콤비의 능력과 열정을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결과는 황제국의 예상을 보기 좋게 뛰어넘었다.
황제국은 하워드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의 재정 상황을 체크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게임을 개발한다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젤리 러쉬>가 한국과 미국에서 월 3% 이상의 매출 성장을 꾸준히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아슬아슬하게 버틸 만합니다. 만약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하나 정도만 더 터진다면 충분히 넉넉하구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워드가 아시아에서 하나 터뜨려주면 되겠네요. 하워드만 믿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네, 대표님?!”
자신감을 얻은 황제국은 <던전 속으로>와 MMORPG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젤리 러쉬>의 성공으로 뉴퀘스트는 탄탄대로 위에 서 있었다. MMORPG 개발과 같이 대규모 투자 없이 <젤리 러쉬> 운영과 마케팅에만 집중하며 괜찮은 게임 스튜디오나 게임 IP를 쇼핑하듯 인수하며 경영해도 충분했다.
특히 한국에서 황제국의 인지도와 인기를 생각하면 여기저기 강연이나 다니고, 몇 가지 위원회에 얼굴이나 비추면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지금도 오종석을 통해 한국에서 자서전 출판이나 경제인 모임 가입 요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글 쓸 시간이 없다고 자서전을 거절하면 많은 출판사가 대리 작가를 고용할 테니 황제국은 단 한 글자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더더욱 자서전을 낼 마음이 사라졌다.
황제국은 앞으로도 편하게 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게임을 만드는데 충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직 더 재밌는 게임, 더 발전된 게임, 그리고 그다음 게임이 있을 뿐이었다.
황제국이 네이트와 올슨에게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황제국이 두 사람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 주었다. 지금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는 황제국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