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회 - 운명의 골
폴란드 전을 승리로 이끈 한국 국가 대표팀은 그다음 주 월요일 미국과 1:1로 비긴 후, 금요일에는 포르투갈을 0:1로 물리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이 2승 1무로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16강에 오르자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이날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28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경기를 관람하며 한국을 응원했다. 자동차 위에 올라타 대한민국을 외치고, 자동차 경적 소리도 응원 박자에 맞췄다. 결혼식장, 장례식장에서도 함성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아아아아아악~!!!!!”
“꼴~~~~!!!!!!”
한국 대표팀 경기가 열리면 아파트 단지마다 동시에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덕분에 경기를 보지 않아도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월드컵의 열기는 뉴퀘스트에게 호재이자 동시에 악재였다. 월드컵이 개막하고, 한국 대표팀이 승승장구하자 미니 축구를 비롯해 각종 월드컵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동접자는 전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신규 가입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람들은 게임을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 모두 월드컵을 보러 TV 앞에 앉거나 아니면 거리 응원에 나섰다. 한국 대표팀 경기가 없어도 월드컵 기간 중에는 매일매일 유럽과 남미 등 축구 강호들의 경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젤리 러쉬>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국대 공식 유니폼에 빨간 악마 티셔츠를 게임에서 판매하는 것은 물론, 젤로로 축구까지 즐길 수 있는 덕분에 사람들은 월드컵의 감동을 젤로 미니 축구로 이어갔다.
비록 동접자는 주춤했지만, 매출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 공식 유니폼과 빨간 악마 티셔츠는 <젤리 러쉬> 가입자라면 이제 필수 아이템이 되어 있었다. 유행 확산 속도가 작년에 예상 밖에 유행을 탔던 젤로 운동회 티셔츠와 모자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처음에는 국대 유니폼 판매량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유니폼 라이선스 비용 때문에 가격이 6,900원으로 다소 비쌌지만 그래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한국팀의 성적이 기대를 훌쩍 뛰어넘으며 선전을 이어가자 빨간 악마 티셔츠의 인기가 국대 유니폼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빨간 악마 티셔츠 가격은 3,000원으로 국대 유니폼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포르투갈 전을 기점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하자 빨간 악마 티셔츠 판매량이 국대 유니폼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면 빨간 악마 티셔츠가 역대 패션 아이템 중에 판매량 1위로 올라가겠는데요?”
“진짜 그럴 거 같아요.”
뉴퀘스트 직원들도 빨간 악마 티셔츠 판매량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처음 월드컵 마케팅을 시작했을 때 [ 젤로 미니 축구 ]에서 국대 유니폼을 입은 젤로는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빨간 악마 티셔츠를 입은 젤로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역전되어 미니 축구 경기마다 빨간 악마가 절반 이상이었다.
판매량 상위권에 국대 유니폼과 빨간 악마 티셔츠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국은 차현주와 아트팀에게 태극기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아트팀은 태극기의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 그리고 한글을 활용해 다양한 한국팀 응원 티셔츠와 액세서리를 디자인했다. 이런 응원 티셔츠도 처음에는 국대 유니폼에 밀려 판매량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팀의 선전과 함께 거리 응원이 활발해지면서 태극기를 활용한 응원 티셔츠 판매량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탄력받은 차현주와 아트팀은 태극기 모티프를 더욱 과감하게 활용한 응원 티셔츠를 디자인했다. 뒤축에 태극 문양을 강조한 축구화 등 관련 액세서리도 많이 만들었다.
급기야 실제 거리 응원에 <젤리 러쉬> 응원 아이템을 진짜 옷으로 만들어 입고 나오는 사람이 나타났다. 차현주는 뉴스나 인터넷에서 보이는 거리 응원 풍경에서 종종 자기가 디자인한 아이템을 발견했다.
“16강이면 이제 월드컵 시즌의 중반을 넘었습니다. 아직까지 월드컵 상품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16강 진출로 마음이 변했을 거예요. 이 사람들을 적극 공략해야 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또 이런 유행에 뒤처지는 건 못 참잖아요?”
황제국의 말에 마케팅도 적극 움직였다. 뉴퀘스트는 아직 국대 유니폼과 빨간 악마 티셔츠를 구매하지 않은 사람들 위해 국대 유니폼 2종과 빨간 악마 티셔츠를 세트 상품으로 묶어 공식 굿즈 할인 판매를 시작했다. 여기에 뉴퀘스트가 디자인한 응원 티셔츠도 디자인 요소 별로 선별해 세트 상품을 구성했다.
예상대로 세트 상품은 로켓처럼 팔려나갔다. 뒤늦게 월드컵 열기에 뛰어든 사람들은 기왕사는 거 한꺼번에 싸게 사자는 마음으로 세트 상품을 구매했다.
월드컵 굿즈는 <영건 블러드>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월드컵 마케팅을 오픈했다. 패키지 게임으로 이미 게임 가격을 지불한 게이머에게 부분 유료화를 덧붙여 무언가를 판매하는 걸 유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대체 스팀펑크 만주에서 왜 한국 국대 유니폼을 파는 거냐고 유저들이 화를 내면 어떡하죠?”
“그래도 이미 <젤리 러쉬>로 부분 유료화가 많이 퍼졌으니까 이해하지 않을까요?”
“<젤리 러쉬>는 게임 자체는 무료니까 이해하지만 <영건 블러드>는 다르잖아요.”
“하지만 디자인이 근사하니까 납득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제발 그래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데······.”
장건, 황산, 이록 등 주요 캐릭터가 국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지금 당장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도 될 만큼 잘 어울렸다. 빨간 악마 티셔츠를 입은 장건의 팔뚝은 소매가 터질 듯이 팽팽했다.
왕소현, 이수련 등 여성 캐릭터는 허리 라인을 넣어 날렵하면서도 여성스러움을 강조했다. 왕소현은 빨간 악마 티셔츠를 입을 때 티셔츠를 배꼽 위로 묶어 허리를 드러내는 보다 과감한 스타일로 연출했다.
젤로는 체형 때문에 뭘 해도 귀여운 반면 의상을 디자인할 때는 제약 사항도 많았다. 하지만 <영건 블러드> 캐릭터는 완전한 사람의 형상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아트 디렉터 차현주는 <영건 블러드> 디자인 라인업도 <젤리 러쉬>와 함께 살폈다. 그녀는 <젤리 러쉬>에서는 살리지 못했던 다양한 패션 요소를 <영건 블러드>에 시도했다. 어깨를 드러내거나, 셔츠나 재킷, 망토 형태의 응원복도 디자인했다.
하지만 <영건 블러드>는 <젤리 러쉬>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작업이 필요했다. 세계관이 스팀펑크 만주를 다루고 있다 보니 현대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들어가면 자칫 몰입이 깨질 수도 있었다.
월드컵 개막과 함께 우려와 기대 속에 <영건 블러드>에도 한시적으로 부분 유료화가 적용됐다. 이벤트 공지가 나갔을 때 여론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누리웹에는 왜 돈 받고 판 게임에서 유료 아이템을 또 판매하냐는 글이 매일 올라왔다.
“뭐든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겁니다. 아직 모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여론에도 황제국은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을 다독였다. 설령 <영건 블러드>의 부분 유료화가 실패한다고 해도 <영건 블러드>는 오늘의 뉴퀘스트가 있게 해 준 게임인 만큼 황제국은 게임에 지속적으로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영건 블러드>에 축구 국대 유니폼 등이 오픈하고 며칠 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랫동안 큰 변화가 없던 게임에 새로운 게 생기니까 신기해서 사는 사람, 국가대표 축구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 정도가 드문드문 아이템을 샀다.
생각보다 유니폼이나 의류가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 보이긴 했지만 매출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폴란드전에서 승리하자 반짝 매출이 나왔지만 이내 다시 내려앉았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 팀은 결국 월드컵과 부분 유료화로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가 싶어 체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르투갈 전을 기점으로 <영건 블러드>에도 한발 늦게 월드컵 열풍이 불어 닥쳤다. 갑자기 퀘스트넷에 국대 유니폼과 빨간 악마 티셔츠를 입은 캐릭터들이 속속 스팀펑크 만주의 세계에 소환되기 시작했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은 월드컵 기간에 게임에서 승리해 살아남은 사람이 태극기를 펼치는 세레모니를 추가했다. 그러자 국대 유니폼이나 빨간 악마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 세레모니를 하는 게 <영건 블러드> 게이머들 사이에서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초반 부정적인 여론이 무색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세레모니를 캡쳐해 게시판에 인증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년간의 커뮤니티가 다져진 <영건 블러드>는 친구들끼리, 팀끼리 모여 태극기 세레모니를 펼치기 위해 퀘스트넷으로 모였다.
목표는 팀원 모두가 살아남아 태극기 세레모니를 하는 것. 이제 모두가 고인물인 게임에서는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미션이었다. 상대 팀이 태극기 세레모니를 하면 평소보다 배로 열 받는다는 분노의 글이 쏟아졌다.
포르투갈전의 승리와 16강 진출을 계기로 <영건 블러드>도 월드컵 열기에 탑승했다. 월드컵 결승전까지는 아직 약 2주가 남아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웝드컵 응원의 열기는 이어졌다.
- 대~~~~한민!국!
- 짜짝작!짝짝!
- 대~~~~한민!국!
- 짜짝작!짝짝!
사람들은 퀘스트넷 채팅 창에 아무런 맥락 없이 대한민국을 외쳤다. 누가 한번 시작하면 사람들도 곧 박수 소리로 박자를 맞췄다. 그러면 한동안 채팅창은 온통 대한민국의 물결이 넘쳐흘러 다른 대화가 모두 묻혀 버렸다.
“아, 우리나라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본선 진출만으로도 대단한데. 16강전 상대가 이탈리아니까 아무래도 어렵겠지?”
“글쎄?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지.”
“그런가? 그랬으면 좋겠다. 솔직히 매출이고 뭐고 모르겠고 이 기세로 8강까지만 가면 소원이 없겠어.”
“8강이 뭐야. 기왕 올라온 거 4강까지는 올라야지.”
“야~, 4강은 무슨 동네 개 이름이냐?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기적인데. 제국이 넌 꿈이 너무 크다. 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알아?”
오종석은 황제국의 ‘4강’ 발언을 타박했다. 황제국은 그저 웃어넘겼다. 16강에 오를 때만 해도 아무도 한국이 그 이상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종석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6월 18일 화요일 저녁 8시 30분. 한국 대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펼쳐졌다. 황제국이 가장 좋아하는 경기였다. 이날도 뉴퀘스트 서울 오피스 멤버들은 다 함께 사무실에서 16강 전을 관람했다.
사상 첫 월드컵 16강에 사람들은 온통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했다. 뉴퀘스트 사람들도 모두 빨간색 옷을 입고 자리를 잡았다. 언제나 정장만을 고집하는 이신우도 와이셔츠 위에 빨간 악마 티셔츠를 겹쳐 입었다. 민소영이 황제국 옆에 앉았다.
“안 돼~!!!!!!”
전반 18분 이탈리아가 선제골을 넣자 분위기는 다소 침체됐다. 이탈리아가 위협적으로 골문을 두드릴 때마다, 우리의 슈팅이 아쉽게 빗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봤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목청껏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1점 뒤진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어느덧 후반전도 중반에 이르렀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애를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민소영은 한 손에 닭 다리를 든 채 계속 ‘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녀의 입술에는 빨간 양념이 살짝 묻어 있었다. 황제국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 88분, 경기 종료를 고작 2분 앞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점 골이 터졌다. 오피스가 그야말로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이제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대표팀을 응원했다. 결과를 이미 알고 보는데도 황제국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공이 한국 진영으로 넘어올 때마다 두려웠고, 이탈리아 진영으로 넘어갈 때마다 힘이 났다.
“그렇지! 아아아······.”
경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황제국은 옆에 있던 민소영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민소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두근거림이 경기의 긴장감 때문인지 황제국 때문인지 그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역전 골이 터졌다.
“꼴~~~~~!!!!! 꼴~~~!!!!!!!!!”
“미쳤다!!!! 꼴이야!!!!!!”
“넣었어!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연장 후반 12분. 기적 같고, 그림 같은 역전 헤딩골이 나왔다. 역전골의 주인공이 긴 머리를 멋지게 휘날리며 손에 낀 반지에 키스했다. 대한민국 전체가 역전 골에 들썩거렸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민소영은 역전 골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황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전 골에 환호하던 황제국이 뒤늦게 자기를 바라보는 민소영의 눈빛을 발견했다. 황제국은 가만히 있는 민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전이야, 소영아!”
“네, 역전이에요.”
주변이 전쟁이라도 난 듯 소란스러웠지만, 민소영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민소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역전 골에 기뻐 날뛰는 다른 사람들처럼 황제국을 꼭 끌어안았다. 민소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폭주했다.
모두가 모두를 껴안고 있는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민소영은 황제국에게 매달리듯 끌어안고 있었다. 황제국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