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 유통 계약(1)
PC 패키지 게임을 유통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 늘빛소프트는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등 블리자드의 게임을 유통하며 가장 눈에 띄는 유통사였다.
늘빛소프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기업 계열사였다. SJC 소프트랜드, 삼정전자 미디어 사업부, 더블드래곤 정도가 메이저였다.
그 외에는 모두 OO소프트, XX엔터테인먼트 등 황제국 기억에 없는 중소 유통사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PC 게임을 정식으로 유통한 동서게임채널이 있었지만, 이곳은 해외 게임 수입 위주였다.
황제국 역시 <영건 블러드>를 유통한다면 제일 먼저 늘빛소프트에 연락할 생각이었다. <스타크래프트>를 통해 이미 PC방 중심으로 한 영업에 최적화가 되어 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블리자드 게임을 유통하며 패키지 게임 유통으로는 향해 몇 년간 원탑으로 군림한다.
다만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이미 블리자드라는 막강한 파트너가 있는 늘빛소프트가 굳이 <영건 블러드>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영업에 나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 늘빛소프트가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황제국은 이남준과 곧장 미팅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오종석이 물었다.
“우리가 유통을 직접 하면 안 될까? 수수료가 상당할 텐데? 우리 이제 자금도 제법 충분하잖아?”
황제국 역시 계속 생각해 온 이슈였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게임 유통이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아. 하나하나 따져보면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아.”
“패키지 제작해서 판매하는 거잖아. 적당한 공장 섭외해서 위탁 생산하면 되지 않을까?”
“위탁 생산이라고 쉽겠어? 그럼 패키지 디자인부터 정해야겠지? 그다음 박스 만들고, 설명서 만들고, CD도 프레스로 찍어야 해. 그리고 박스, 설명서, CD를 한군데로 모아 조립하고 래핑 포장해야지. 아무리 공정을 적게 잡아도 최소 네 번을 거쳐야 해. 박스, 설명서, CD는 각각 다른 공장에서 해야 할 거고.”
“으음······.”
“만들어도 문제야. 초반에 몇 장을 찍어야 할까? 아무리 적게 찍어도 최소 몇만 장은 찍어야겠지? 어차피 공장에서 찍으니까 한 번에 많이 하는 게 유리하니까. 그럼 3만 카피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건 어디에 보관할까? 우리 동방이나 랩실을 물류 창고로 쓸 수는 없잖아.”
“그렇지. 공간이 안 나오지.”
“그러면 우리는 따로 창고를 계약해야 해. 그리고 창고에 있는 물량을 필요할 때 바로바로 배송할 수 있도록 물류 업체랑도 계약해야지. 우리가 직접 트럭 몰고 가서 배달할 게 아니라면 말야.”
“하지만, 게임을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건 아니잖아? 아마 총판이 있을 텐데? 매달 총판에 물건만 대주면 되지 않을까?”
“그렇기야 하겠지. 하지만 모든 물량이 총판을 통해서만 나가지는 않을 거야. 가령 새로 오픈하는 PC방에 직거래를 트면?”
“아?”
“그래, 우리는 일반 소매보다 PC방에 판매하는 게 우선이잖아. 물류도 물류지만 그 전에 PC방마다 돌면서 홍보하면서 영업을 뛰어야 해. 온라인 데모야 몇 군데만 뚫으면 되니까 우리 둘이서 돌았지, 패키지 게임이 나오면 그렇게 전국을 돌 생각이야?”
“어···, 꼭 피, 필요하면?”
오종석의 어정쩡한 대답에 황제국이 피식 웃었다. 물론 정말 그래야 한다면 황제국도 얼마든지 그럴 것이다. 그는 차 트렁크에 <영건 블러드> 패키지를 잔뜩 싣고 전국 PC방을 돌면서 영업을 하는 모습을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온라인 게임은 판매만큼이나 운영이 중요해. 우린 계속 사람들 플레이를 모니터링하면서 캐릭터 파워 밸런스도 맞춰야 하고, 어떤 모드가 인기가 있는지, 어떤 맵에서 많이 하는지, 인기 있는 맵을 어떻게 만들지, 해킹이나 욕을 하는 사람은 없는지, 이런 걸 살펴야 한다고.”
“응, 그렇겠지.”
“패키지 제작이랑 유통은 우리보다 잘 할 수 있는 업체가 있지만, <영건 블러드> 온라인 운영은 우리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이쪽이야.”
“그러네. 게임 유통도 만만한 게 아니고,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구나.”
“그럼. PC방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갈 수 있어? 게임 포스터나 입간판 같은 홍보물도 만들어서 다녀야지. 규모가 있는 PC방이면 주기적으로 게임 대회도 후원해서 열어야 하고.”
“알았어. 그쪽은 포기. 깔끔하게 포기.”
오종석이 완전히 납득한 듯 두 손을 들었다. 물론 황제국은 정말 필요하다면 패키지를 제작/유통 담당 직원을 뽑고 한동안 직접 챙기면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럴만한 자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영건 블러드>를 마지막 패키지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0년, 20년을 이어갈 방식이라면 처음부터 유통 채널도 직접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패키지 유통은 길어야 2~3년 정도 유지할 일시적인 방식이었다. 그걸 위해서 저 수많은 과정을 거쳐 유통 사업부를 만든다는 건 너무나 큰 낭비였다.
늘빛소프트 미팅에는 황제국과 오종석이 나갔다. 임시로 황제국 대표, 오종석 마케팅 대리 명함을 만들었다. 뉴퀘스트 동방이나 랩실에는 따로 회의실이 없어 외부에서 미팅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뉴퀘스트 대표, 황제국입니다.”
“안녕하세요. 마케팅팀 대리, 오종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늘빛소프트 영업팀 차장 이남준입니다.”
늘빛소프트에서는 이남준 차장과 대리 한 명이 나왔다. 그들은 커피숍에 마주 앉아 명함을 교환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통사를 선정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연락을 주셨네요.”
“기사 보자마자 느낌이 왔습니다. 온 인맥을 동원해서 연락처를 수배했는데 아직 유통 계약이 안 되어 있다니 하늘이 도왔네요.”
이남준 차장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국은 늘빛소프트 사람들에게 기사에 모두 담지 못한 회사의 히스토리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삼국지:공성전> 이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요. 어쩐지 이름이 익숙한 것 같았습니다.”
황제국은 이어서 뉴퀘스트가 개발 중인 <영건 블러드>에 관해 자세히 소개했다. 이남준도 PC 게이머 9월호 인터뷰를 읽어서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듣고 보니 더 대단한데요? 퀘스트넷의 서버는 그러면? 직접 만들었습니까?”
“네, S대 랩실에 마련해 놓았습니다. 현재 데모 버전을 풀어서 열심히 테스트 중입니다.”
“지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직 학교 근처에 일부만 풀어서 동접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 500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PC 게이머 10월호 번들에 온라인 데모가 나가면 더 늘어날 거라 생각합니다. 늘빛소프트에서 유통하는 <스타크래프트>에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겠지만요.”
“아이고, 아직 데모인데 그 정도면 많이 나오는 편이지요.”
오종석은 움찔했지만 다행히 표정은 그대로 유지했다. 실제 온라인 데모 동접자는 황제국이 얘기한 수치의 절반 수준이었다.
황제국은 일부러 피하지 않고 <스타크래프트>를 언급했다. 그만큼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뜻을 은연중에 보이기 위해서였다.
“유통 계약을 맺게 되면 카피당 수익 배분은 어떻게 되나요?”
황제국은 제일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우선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계약 조건은 굉장히 달라진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기대를 받는 게임인가, 개발사의 네임 밸류는 어떤가, 예상 판매량은 어떤가, MG(Minumum Guarantee, 최소 수익 보장 금액)는 얼마나 지급하는가, 유통사가 개발비를 투자했는가, 마케팅 비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이요. 변수가 대단히 많습니다.”
“조건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늘빛소프트가 저희에게 제시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요?”
이남준이 대답을 하기 전에 밑밥을 깔았다. 늘빛소프트가 먼저 연락을 해 온 만큼 당연히 생각해 놓은 계약 조건이 있을 것이다.
“저희는 뉴퀘스트가 비록 신생 개발사이지만 황제국 대표님의 인지도와 화제성, 소프트펀드의 투자 유치 등을 생각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파격적이라는 말에 오종석이 기쁜 표정을 감추려고 애썼다. 이남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희는 정가의 20%를 개발사인 뉴퀘스트와 쉐어하겠습니다.”
“20%라고요?”
오종석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이남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종석의 반응을 오해하고 있었다. 오종석이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앞서 말씀하신 여러 조건을 고려했는데도, 고작 20%가 맞습니까?”
“고작···이라고 하시면 저희도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전작이 없는 개발사의 경우 20%면 상당히 좋은 조건입니다, 대리님.”
이남준이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는 게임이 실패할 수도 있는 리스크를 온전히 떠안습니다. 잘못하면 수만 개의 재고를 창고에 쌓아놓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건 블러드>가 그렇게 될 거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게임 패키지 제작, 유통, 마케팅 과정에서 드는 비용도 굉장합니다. 이런 비용들은 모두 저희가 부담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20%는 좀······.”
오종석이 계속 반응하자 황제국이 조용히 그의 팔을 잡아 입을 막았다. 아무리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상대방 앞에서 이런 반응은 초짜로 보일 뿐이었다.
‘뭐야? 열심히 개발한 건 우린데, 팔아봐야 남는 게 없잖아?’
당장 오종석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 저대로 계약하면 <영건 블러드> 패키지 가격을 3만 5천원으로 매길 경우, 게임 하나당 뉴퀘스트 손에는 고작 7,000원이 떨어진다. 황제국도 낙후된 구조의 패키지 게임 유통을 생각해 1/3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너무나 낙관적인 예측이었다.
“유통 수수료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게임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나머지를 저희가 다 가져가는 것도 아니구요. 총판과 소매점에서 가져가는 마진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네, 분명 그렇겠지요.”
이남준은 이제는 약간 타이르는 어투로 말했다. 황제국은 90년대의 현실을 실감했다. 게임 개발사에게 너무나 혹독했던 시대였다. 황제국은 새삼 한국에서 그에 앞서 게임을 개발했던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났다.
월급이래 봐야 생활비조차 되지 못했고, 그나마 밀리기 일쑤여서 라면만 먹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 반찬으로 김치만 있어도 행복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게임 만드는 걸 좋아했던 내가 죄인’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던 선배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혹시 저희 개발사의 수익 비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쎄요. 이 자리에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한 부분입니다. 그만큼 상당한 판매량이 받쳐준다는 나름의 근거가 저희는 필요한 부분이라서요.”
이남준 차장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먼저 연락을 해오긴 했지만, 이남준의 태도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황제국은 그에게도, 늘빛소프트에게도 이 계약이 절실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늘빛소프트는 이미 최상급 게임사와 파트너를 맺은 상황. 연말이면 스타 확장판도 나올 예정이니 그들에게는 급한 것이 없었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내부적으로 좀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둘 사이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황제국은 이런저런 업계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일어섰다.
황제국은 유통사 리스트에서 늘빛소프트를 제외시켰다. 새로운 유통사를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