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회 - 대~~한민국!
미국에서 한창 <어둠 속으로> 개발과 E3 준비로 바쁠 무렵, 한국에서는 2002 월드컵 마케팅 준비로 분주했다. 황제국은 민소영과 오종석에게 2002년 초부터 <젤리 러쉬> 월드컵 마케팅을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강조했다.
<젤리 러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국대 유니폼이었다. 오종석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 공식 유니폼 공급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차현주는 국대 유니폼 디자인을 받아 젤로용 국대 유니폼을 제작했다. 축구 국대 유니폼은 홈경기용 붉은 유니폼과 원정 경기용 하얀 유니폼 2종이었다. 황제국은 오종석에게 다른 의류 라이선스도 하나 추가로 계약하라고 전했다.
“응? 서포터즈? 빨간 악마 말이야?”
“그래. 일반인으로 구성된 서포터즈 클럽이니까 후원금 정도면 될 거야. 만나서 얘기 잘 해봐.”
“어, 그래 알았어.”
오종석은 굳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황제국이 게임 마케팅으로 실없는 소리를 할 리는 없었다. 오종석은 국대 축구팀을 응원하는 빨간 악마 서포터즈 클럽 대표를 만났다.
2002 월드컵 광풍 이후, 2006 월드컵부터는 통신, 자동차 등 재벌 기업이 나서서 서포터즈 클럽을 후원하며 대대적인 월드컵 마케팅을 벌였다. 하지만 2002년에는 아직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빨간 악마 대표는 오종석이 추가 수익 분배 없이 후원금 1천만원에 빨간 악마 티셔츠를 게임에서 판매하고 싶다고 하자 곧바로 승낙했다.
“제국아, 일단 하긴 했는데. 국대 유니폼 있는데 굳이 빨간 악마 티셔츠까지 필요할까?”
“혹시 모르니까.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해. 그 정도면 보험료로는 싼 편이지.”
“하긴, 그런가?”
오종석은 계약은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젤리 러쉬> 락커룸에는 한국 국대 유니폼과 빨간 악마 서포터즈 티셔츠가 모두 올라왔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국대 유니폼은 라이선스하지 않았다. 차현주와 디자인팀이 본선 진출팀 나라의 국기를 활용해 새롭게 디자인해서 만들었다.
배가 뽈록 튀어나온 통통한 젤로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기대 이상으로 귀여웠다. 차현주는 고해상도로 모델링한 국대 유니폼 젤로 열한 마리를 그라운드에 일렬로 세워 놓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젤리 러쉬> 월드컵 마케팅 홍보 이미지를 만들었다.
황제국은 국대 유니폼 판매를 <젤리 러쉬>에만 적용하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 기간 동안 <영건 블러드>로 부분 유료화 BM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은 <영건 블러드> 캐릭터에 한국 국대 유니폼을 입혀 새로 디자인했다. 테스트 서버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쓴 장건이 호랑이 마크가 달린 국대 유니폼을 입고 총알을 날렸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요?”
<영건 블러드> 캐릭터에 국대 유니폼을 입혀 본 결과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차현주도, 라이브팀도, 황제국도 만족했다.
“괜찮네요. 월드컵 기간에 시범적으로 <영건 블러드>에서 판매해 보고, 만약 반응이 좋으면 <영건 블러드>에도 <젤리 러쉬>처럼 부분 유료화를 도입해 보죠.”
98년 출시한 <영건 블러드>는 5년째 서비스하면서 서서히 동접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프로 리그 활성화 덕분에 게임은 꾸준히 팔리고 있었지만, 캐릭터 파워 발란스와 맵 추가 정도 외에는 큰 업데이트 이슈가 없었다. 게임의 인기는 꾸준했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만한 모멘텀이 부족했다.
황제국은 월드컵을 이용해 <영건 블러드>에 부분 유료화 BM을 시도하고 그 결과에 따라 <영건 블러드>를 새롭게 살릴지, 아니면 이대로 유지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만약 <영건 블러드> 게이머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부분 유료화를 받아들인다면 <영건 블러드>에 대규모 투자할 새로운 계기가 생긴다.
만약 반응이 좋으면 <영건 블러드>를 퀘스트 엔진 2를 이용해 HD 화질로 리뉴얼하고, 신규 캐릭터와 함께 각종 패션 아이템을 붙여 부분 유료화로 확장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서든리 어택>이 장기간 인기를 누리는 것만 봐도 FPS는 충성도가 높은 장르였다.
특히 한국 게이머들에게 <영건 블러드>는 뉴퀘스트라는 레전드 개발사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게임이었다. 황제국에게도 뜻깊은 게임인 것은 당연했다. 다만 뉴퀘스트라는 기업 입장에서는 유통사와 수익을 나눠야 하는 패키지 방식에, 추가 수익도 기대하기 힘든 게임에 과감한 추가 투자를 하기는 부담이 컸다.
황제국은 <영건 블러드> 라이브 팀이 회사의 시금석이라는 자부심과 이제는 중심에서 밀려난 게임이라는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걸 캐치했다. 유필승 등 라이브팀 멤버들은 여전히 회사 생활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예전만큼 회사에 기여할 수는 없다는 체념이 느껴졌다.
<영건 블러드>는 삼전과의 MP3 콜라보레이션 이후 별다른 이슈 없이 몇 년이 흘렀다. e-프로스포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출시 5년 차 게임임에도 인기는 꾸준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할 여력은 없었다.
<영건 블러드>가 앞으로도 5년 더 지금과 같은 인기를 유지하려면 추가 투자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분 유료화 도입이 필요했다. 2002 월드컵이 <영건 블러드>의 향후 운영을 가를 분수령이었다.
월드컵 마케팅은 유니폼 판매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국은 월드컵을 맞아 <젤리 러쉬>에 축구장을 모티프로 한 맵을 추가하는 것은 물론, <젤리 러쉬>에서 아예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미니 축구 게임을 만들어 보자고 민소영에게 제안했다.
“한 팀에 11명이 싸우는 진짜 축구 말고, 네다섯 명 정도가 한 팀이 돼서 작은 그라운드에서 젤로로 축구를 하는 거야. 당연히 젤로의 특성은 살아 있어야겠지? 그러니까 엉망진창 몸싸움 축구 게임이 되는 거야.”
“헐, 그럼 롤링 어택도 가능한 거예요?”
“그래야겠지? 대신 롤링 어택 거리는 더 짧게 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태클이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어지니까. 그리고 그라운드 밖은 벽으로 세우자. 벽을 이용해서 반동으로 창조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재밌을 거 같아요! 일부러 슛을 벽에다 찰 수도 있을 거 같구요.”
“그럴 수도 있겠지? 룰도 미니 축구에 맞춰 바꾸자. 번거로우니까 핸들링 같은 페널티는 없애고. 젤로니까 배로 트래핑하는 게 헤딩만큼이나 위협적일 거야.”
“연구해서 만들어 볼게요. 예전에 크리스마스 테마 하듯이 [ 젤로 미니 축구 ] 코너를 따로 만들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승리 팀이 모두 크레딧을 받도록 해줘. 일반 게임보다 크레딧을 약간 더 쉽게 얻을 수 있게 해줘야 사람들이 더 몰릴 거야.”
“미니 축구니까 그만큼 국대 유니폼을 사는 사람도 더 늘어나겠죠?”
“그렇지. 일단 운동하려면 장비부터 갖추고 싶어 하니까. 게임에서도 예외는 아니고.”
민소영은 곧 [ 젤로 미니 축구 ] 기획과 개발에 들어갔다. 처음 사람이 늘어나자 PM이라는 자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민소영이었으나 그녀는 결국 <젤리 러쉬>를 향한 애정과 비전으로 개발팀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민소영보다 코딩을 잘하는 전문가는 많았지만, 그녀만큼 <젤리 러쉬>가 가야 할 방향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젤로 미니 축구 ] 개발은 만만하지 않았다. 축구의 룰을 변형하고, 젤로의 특성을 이용해서 더 재밌는 경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가 필요했다. 한국 <젤리 러쉬> 라이브팀은 미니 게임을 위해 축구장 사이즈에서부터 골대의 크기, 경기 시간, 팀당 인원, 공과 벽의 반발력, 젤로의 탄성, 롤링 어택과 슬라이딩 턴 등의 스킬 사용 등 다양한 요소를 시뮬레이션해 게임의 재미를 연구했다.
골이 너무 많이 나도, 골이 너무 적게 나도 재미가 없었다. 전문적인 축구 게임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젤로의 특성을 활용한 미니게임인 만큼 사실성보다는 더 많은 태클과 충돌, 어이없는 플레이와 어처구니없는 골이 많이 나오는 게 중요했다.
“으아아아아아! 뭐 하는 거예요!”
“슛! 슛!”
“아니, 거기서 치사하게?!”
라이브팀은 여러 방식으로 모델링한 미니 게임으로 수없이 많은 청백전을 치렀다. 사람들은 젤로 미니 축구에 금방 몰입했다. 기존 축구와 비슷하지만 마음대로 태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공이 없는 젤로들끼리 몸싸움을 벌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거 뭔데 이렇게 숨 막혀? 잠시도 쉴 틈이 없는데?”
젤로 미니 축구는 그라운드에서 단 1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질 것도 없었다. 언제든지 롤링 어택 태클 한 번으로 그라운드가 난장판이 되면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히곤 했다. 우연히 튕겨 나온 공에 골이 나오기 일쑤였다. 오히려 그래서 긴장감이 배로 높았다.
처음에는 전후반 5분으로 하려다 생각보다 텐션이 높아 집중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결국 게임은 전후반 3분 30초로 조정되었다. 진짜 축구처럼 추가 시간은 0초에서 15초까지 시스템이 랜덤으로 부여했다.
황제국은 미국 라이브팀에도 젤로 미니 게임을 해보게 시켰더니 반응이 좋았다. 미국에서도 월드컵 기간 동안 [ 젤로 미니 축구 ]를 서비스하기로 결정했다.
“보스, 내년에는 NFL이랑 협의해서 슈퍼볼 기간에 미니 젤로 풋볼 게임을 만들죠. 그냥 축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에 더러운 플레이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 팬인 라이브팀 팀원 한 명이 NFL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스포츠 천국 미국에서도 NFL의 인기가 대단한 만큼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황제국은 라이브팀 매니저에게 가능성을 검토해보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완성된 [ 젤로 미니 축구 ]가 월드컵 개막 일주일 전부터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오픈했다. 미니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다. 오픈과 동시에 접속자의 70% 이상이 최소 한 게임 이상 플레이했다. 일반 맵은 하지 않고 오직 미니 축구 게임만 하는 게이머도 있었다.
국대 유니폼을 비롯해 축구 관련 아이템은 오픈하자마자 순조롭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빨간 악마 티셔츠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오종석은 황제국도 틀릴 때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월드컵 개막전을 집에서 가족들과 관람한 황제국은 주말이 지나 6월 3일 월요일에 출근했다. 그의 책상에는 귀국을 축하하는 커다란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 오피스에 복귀한 황제국은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오전을 다 보냈다. 오후에는 <젤리 러쉬> 월드컵 마케팅 상황을 살폈다. 반응은 황제국의 예상과 비슷했다. 미팅이 끝나고 황제국이 이신우에게 물었다.
“내일 폴란드 전은 어떻게 보기로 했어요?”
“맥주 가게를 하나 빌릴까 하다가 그냥 회사에서 프로젝터로 보기로 했습니다. 맥주랑 치킨은 배달시키구요.”
“잘하셨어요. 우리끼리 보는 게 편하죠.”
“대표님도 함께 하실 겁니까?”
“당연하죠.”
6월 4일 화요일 저녁 8시 30분. 한국의 첫 경기인 한국 대 폴란드 전이 있었다. HR과 총무팀이 월드컵 관람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체 미팅을 위해 비워놓은 회사 공간에 하얀 블라인드를 스크린 삼아 프로젝터로 방송 화면을 쐈다. 간이 테이블을 놓고 인근 치킨집에서 맥주와 치킨을 공수하고, 오징어와 땅콩 등 마른안주도 마련했다. 사람들이 업무를 마치고 속속 자리로 모여들었다. 오종석은 한국 대 폴란드 스코어 맞추기 내기를 접수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중계방송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맥주잔을 높이 들고 함성을 질렀다. 만약 평범한 날이었으면 당장 다른 층에서 민원이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업무가 종료한 저녁 8시 반에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빌딩 관리인들까지 모두 폴란드 전을 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애국가가 울리고 카메라가 선수들의 모습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황제국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나중에 유럽 축구 무대에서 활약할 선수들도 보였다.
휘슬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했다. 경기 초반 한국의 움직임은 썩 좋지 못했다.
“어어어어???”
사람들은 폴란드가 치고 나올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황제국조차도 한국 골문 앞에서 공이 들어오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폴란드 진영으로 공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전반 25분, 페널티 박스에서 빈공간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대표팀 스트라이커에게 크로스가 들어갔다. 황제국은 그 순간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슛~~!!!!!!”
“골인!!!!!!!!!!!!”
“으아아아아아아!!!!!!!”
“골인!!! 골인!!!!”
왼발 발리슛이 폴란드 골대에 꽂혔다. 한국의 선제골이 터지자 사무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모두가 일어나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대~~~한민국! 짝짜짝짝짝!”
첫 골이 터지자 사람들은 신이 나서 빨간 악마의 응원 소리에 맞춰 박수를 치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황제국은 두 번째 보는데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이 순간을 200% 즐기기 위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꼴~~~~!!!!!!! 꼴이에요~~~!!!!!!!”
후반 8분, 대한민국의 추가 골이 터지자 사무실은 광란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황제국조차 가슴이 뛰고 기쁘기 한이 없었다. 사람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젤리 러쉬>와 <영건 블러드>는 경기 시작 전 접속자가 뚝 떨어졌다가 폴란드 전을 2:0 승리로 장식하자 다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월드컵 관련 상품 매출도 덩달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과는 달라진 점이 있었다. 빨간 악마 티셔츠 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거의 팔리지 않던 빨간 악마 티셔츠가 폴란드 전이 끝나고 24시간 동안 1억 원어치 이상이 팔렸다.
“와~, 진짜 얘는 뭐지? 정말 미래에서 왔나?”
<젤리 러쉬> 매출 현황을 체크하다가 오종석은 처음으로 황제국을 의심했다. 빨간 악마 티셔츠는 결코 보험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도 긁지 않은 대박 복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