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 수수깡 대결(2)
양옆으로 나란히 있는 이진수의 스피커와 황제국의 스피커에서 총소리가 났다. 몇 밀리 초 차이로 두 스피커의 총소리가 겹치며 묘한 잔음을 만들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황제국은 소름이 돋았다.
‘죽었···!’
퉁!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총알은 황제국을 빗겨 갔다. 황제국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크으~~!!!”
“어우~~!!!”
저격에 실패한 이진수는 입술을 깨물었고, 뒤에서 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황제국은 총알이 정말 가까이서 비껴갔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그는 달리면서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계속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진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진수는 옥상에서 계속 황제국을 겨냥해 총을 쐈다.
탕! 탕!
그러나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저격 모드로 맞추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리고 황제국은 그제야 이록 캐릭터의 주특기가 스나이퍼라는 걸 생각해 냈다.
탕!
또 한 번의 총소리가 들리자 황제국은 마우스를 움직여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를 노리고 있는 이진수가 보였다. 황제국은 얼른 뒷걸음치며 이진수를 향해 총을 쐈다.
탕! 탕!
탕! 탕! 탕!
황제국이 이진수가 자리 잡은 옥상 건너편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며 총을 쐈다. 그렇지만 위치상 높은 곳에 있는 이진수가 훨씬 유리했다.
그도 건물 입구를 통해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문은 대로 방향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이진수의 시야에 몸을 내밀어야 한다. 자살 행위였다.
둘은 잠시 그대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프로토타입이라 캐릭터들의 총알은 무한대였다. 탄창은 갈아껴야 하지만 탄창이 무한 제공이다. 이진수의 총알이 떨어지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네. 이판사판이다!’
황제국은 무기를 두 번째 보조 무기로 바꿨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모퉁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옥상에서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이진수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통 저격 모드로 황제국을 맞출 수가 없었다. 비록 유리한 위치에 있긴 했지만 황제국을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때, 황제국의 수수깡 인형이 모퉁이에서 튀어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이진수는 숨까지 참고 황제국을 조준했다. 조준선에 수수깡 머리가 정확하게 잡혔다. 이진수는 헤드샷을 직감하며 마우스 클릭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이진수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폭발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화면이 빨갛게 변하며 중앙에 검은 선이 생기더니 커다랗게 ‘YOU DIED’ 메시지가 떴다. 황제국이 <다크 소울(Dark Soul)>의 다잉 메시지를 떠올리며 만든 장난이었다. 황제국의 화면에도 같은 메시지가 떴다.
“아~~, 무승부네요.”
황제국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진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어, 어떻게···?”
“아, 제가 다이너마이트 던졌거든요. 보조 무기로 수류탄 대신에 다이너마이트 넣었잖아요.”
이진수는 비로소 자기가 왜 죽었는지 알았다. 황제국이 총에 맞기 직전 옥상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졌고, 다이너마이트가 정확하게 이진수 옆에서 터진 것이다.
“와~, 명승부였다. 진짜 쩔었다.”
“그러게. 나 구경만 했는데도 손에 땀 난 거 봐.”
“이거 보는 것도 엄청 재밌다. 근데 난 긴장돼서 못할 거 같아.”
오종석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차현주와 전유진은 FPS 승부의 팽팽한 긴장감을 처음 제대로 느낀 듯했다.
네트워크 플레이를 직접 해 본 황제국은 게임의 반응성과 타격감이 기대 이상이었다. 심지어 아직 프로토타입일 뿐인데도 그랬다. 앞으로 손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즉, 앞으로 게임이 훨씬 더 좋아질 거라는 뜻이었다.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켜본 동아리 멤버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황제국은 뉴퀘스트의 FPS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 돌아가면서 한번 해 볼까? 종석아. 나랑 한 판 붙어 볼래?”
“조오오오오오~~~치!”
“나, 나랑 하, 하, 한 판 더 하고.”
뜻밖에도 이진수가 승부욕을 드러냈다. 오종석은 기꺼이 기회를 이진수에게 양보했다. 이진수가 이번에는 캐릭터를 바꿨다. 아직 이름이 없는, 왼손이 기관총으로 된 파워형 캐릭터였다. 전 판에서 조준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진수는 전략을 바꿔 화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황제국 vs. 이진수. 두 개발자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이 시작됐다. 두 번째 경기는 간발의 차이로 이진수의 승리였다. 그는 체력을 8% 남기고 황제국을 잡았다.
그러자 황제국도 캐릭터를 이록으로 바꿨다. 시작과 동시에 옥상으로 올라간 황제국은 옥상으로 쫓아오려는 이진수를 한방에 헤드샷으로 잡았다. 둘의 전적은 1승 1무 1패가 됐다.
“이제 다른 멤버들도 할 수 있게 양보하죠. 우리 둘만 할 수는 없잖아요.”
“므므.”
이진수는 아쉬워하는 듯했으나 결국 황제국의 말에 물러났다. 다른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네트워크 플레이를 진행했다. 오종석은 게임에 금방 적응했지만, 전유진은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마우스를 쥔 손을 덜덜덜 떨었다.
“오지 마, 현주야아아아아앚!”
“언니이이이이~!!!! 기다려요!!!!”
차현주와 전유진의 대결은 기괴했다. 장건을 선택한 차현주는 시작하자마자 전유진을 향해 돌격하며 총을 쏴댔고, 기관총 파워 캐릭터를 선택한 전유진은 겁이 나서 뒷걸음질 치며 총을 난사했다.
결과는 전유진의 승리였다. 차현주는 나름 총알을 피하겠다며 좌우로 지그재그로 움직였지만 애초에 전유진은 조준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먼 총알에 얻어맞은 차현주는 ‘You Died’ 메시지를 허탈하게 바라봤다.
“와, 말도 안 돼! 언니, 한 판 더 해요!”
“아니, 안 할래. 나 무서워.”
“언니, 이겨 놓고 그런 게 어딨어요?!”
차현주를 떡실신시킨 전유진은 그러나 차현주의 결투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독이 오른 차현주는 대신 오종석을 때려잡았다. 차현주의 이록에게 한방에 헤드샷으로 쓰러진 오종석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뉴퀘스트는 프로토타입으로 몇 시간을 서로 물고 물리는 대결을 펼쳤다. 뒤늦게 저녁을 먹으며 황제국은 잔에 소주 한 잔씩을 따라주며 말했다.
“자, 이 술 한 잔으로 아까 승부의 앙금은 모두 털어버리는 겁니다~!”
“짠~!”
네 잔의 소주와 한 잔의 사이다를 털어 넣으며 뉴퀘스트는 프로토타입을 즐기다 과몰입해버렸던 감정을 털어 버렸다. 그만큼 FPS 프로토타입은 몰입감이 있었다.
“하~, 지금이야 얘기지만, 나 솔직히 과연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 솔직히?”
“그랬어?”
“음··· 처음에 FPS 한다고 <퀘이크> 보여 줬을 때, 그때 솔직히 좀 깼어. 저런 못생긴 괴물들하고 싸우는 게 재밌나? 총 쏘고 죽이는 게 전부인데, 이게 뭐지? 싶었지.”
“근데 왜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했어?”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차현주가 그동안 얘기하지 않았던 속내를 조심스레 털어놨다. 모두 차현주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올찍히 말하면 이게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 삼국지 게임 만들 때는 방학 동안 뚝딱 해치웠잖아? 길어야 두, 세 달 일 거라 생각했지. 후딱 끝내고 다음에 더 재밌는 거 만들자고 할 생각이었지.”
“야, 너 스팀펑크 한다니까 디자인할 거 많다고 좋아했잖아?”
오종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오종석조차 차현주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기는 한데 총 쏘는 게임이 뭐 그리 재밌나 싶었거든. 새로운 거 디자인하고, 재밌게 만들어 보는 게 좋긴 하지만 기왕이면 내가 해서 재밌는 게임이면 더 좋잖아?”
“다 같이 만드는 건데 개인 취향 내세우면 게임은 산으로 가는 거야.”
“야, 누가 뭐래? 그래서 나도 입 꾹 다물고 따라왔잖아.”
차현주와 오종석이 또 티격태격할 기미를 보이자 황제국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 따라와 줘서 고마워. 그래서 오늘 프로토타입 해 보니까 마음이 좀 달라졌어?”
“응, 우리가 만들어서 그런가? 다른 FPS 했을 때랑은 많이 다른 거 같아서. 수수깡 대전에 이렇게 진심이 될 줄 몰랐어. 솔직히.”
“넌 옛날부터 수수깡 귀여워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아무튼 우리 게임은 뭔가 달라. 진수 선배님이나 제국이 너처럼 기술에 관해서는 모르고, 종석이처럼 게임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해보면서 느꼈어.”
“나도. 정말 내가 게임에 들어가 있는 거 같았어. 두 사람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아, 아, 아직 마, 많이 부족한데······.”
전유진도 거들면서 황제국과 이진수를 칭찬했다. 이진수는 칭찬을 받자 어색하고 불편한지 눈동자를 굴리다 연거푸 사이다를 마셨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현주야. 이제 확신이 섰으니까 더 열심히 할 수 있지?”
“야, 나 지금까지도 열심히 했거든! 하여튼 쪼금 틈만 보이면 은근 재수 없게 군다니깐?”
뉴퀘스트는 프로토타입 뒤풀이에서 그동안의 속마음도 터놓고 얘기했다. 이후 게임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다양한 피드백이 오갔지만, 한 가지 만큼은 일치했다. 그들은 게임의 재미와 성공을 확신했다.
“지금까지 모두 수고 많았어요. 오늘로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이 게임을 끝까지 완성도 있게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제가 함께 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제국이가 있는 한 뉴퀘스트는 끄떡없지.”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다시 짠~!”
프로토타입으로 게임성을 확인한 황제국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점검했다.
먼저 기술 분야에서는 이진수와 함께 게임 엔진을 완성해야 한다. 콘텐츠는 전유진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게임 세계를 채워 나가야 한다. 차현주는 캐릭터는 물론, 게임에 들어갈 다양한 요소들을 디자인하고, 오종석은 동아리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캐릭터의 전투 타입과 무기, 파워 발란스를 조절하는 임무를 맡길 계획이었다.
게임 컨셉이 잡히고, 주인공과 메인 빌런 등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메인 플롯을 완성하고, 프로토타입까지 거쳤다. 그렇지만 게임을 완성하려면 앞으로도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국은 프로토타입을 더 서둘러야만 했다.
아무리 좋은 뜻과 열정으로 뭉쳤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지치기 마련이다. 개발에 몇 년씩 걸리는 대작 AAA 게임들은 그래서 유저들의 관심을 잡아두기 위해 정기적으로 트레일러나 인게임 플레이 영상을 공개한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똑같다. PD는 계속해서 다양한 부서의 결과물을 보면서 머릿속에 전체적인 게임의 형태를 수정하며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맡은 일만 하기 때문에,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게임의 일부만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뭘 위해 일하고 있는지 길을 잃기도 한다.
뉴퀘스트는 인원이 적고, 제작 회의를 모두 모여서 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적었다. 하지만 모두 나이가 어리고, 게임 개발에 관한 경험도 거의 없었다. 처음에야 열정에 불타지만, 젊은 혈기는 그만큼 빨리 식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토타입이라는 눈에 보이는 중간 결과가 꼭 필요했다.
예상대로 프로토타입은 뉴퀘스트 멤버들의 가슴에 새로운 열정을 지폈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 게임이 재밌을 거라는 확신과 게임을 망칠 수 없다는 각오, 그리고 빨리 완성된 게임을 해보고 싶다는 설렘과 기대가 차올랐다.
이제 뉴퀘스트 멤버들은 수업 시간 외에는 대부분 동방에 나왔다. 그들은 그날그날 자기가 한 일을 바로바로 사람들과 공유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좋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서로를 부추겼다.
어느새 98년 1학기도 저물어 가고, 대학생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기말고사 시즌이 돌아왔다. 황제국과 이진수가 게임 엔진을 제출해야 하는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