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회 - 어둠의 씨앗
내부 임직원에게 <어둠 속으로> 개발 필요성을 설득한 황제국은 곧 <어둠 속으로> 개발팀 세팅에 들어갔다. 네이트와 올슨 역시 바빠졌다. 그들은 게임 기획을 보다 체계적인 문서로 심화해 작성했다.
지금까지는 몇 명만 보는 문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은 간단하게 적고 넘어갔다. 하지만 새로운 합류하는 사람이 보려면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담고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은 이참에 기획안을 전체적으로 다듬으며 문서를 작성해나갔다. 또한 샌디와 인력 구성을, 회계 담당 켄트와 개발 비용을 다시 정리했다.
이제 팔로 알토 오피스는 더 이상 추가 인력을 배치하기 힘들 만큼 빈자리가 없었다. 황제국은 샌디와 함께 팔로 알토 일대를 돌며 더 넓은 오피스를 찾아 돌아다녔다. 때마침 리모델링 공사로 비어있는 3층 건물을 발견했다.
막바지 작업 중인 건물을 둘러보며 황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도 충분히 넓었고, 리모델링이 마무리 중이라 인테리어에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1, 2, 3층이 전부 비어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통째로 빌리죠.”
황제국은 건물주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건물 외벽에 ‘뉴퀘스트’ 로고를 달고 싶다는 조건이었다. 건물주는 두말없이 OK했고, 샌디는 곧바로 사무실 임대 계약을 맺었다.
회사로 돌아온 황제국은 매니저들을 불러 모아놓고 새로운 오피스 자리 세팅을 논의했다. 큰 책상에 도면을 펼쳐놓고 자리 배치를 어떻게 할지, 어느 팀이 어디로 갈지 난상 토론이 시작됐다.
논의 끝에 1층은 로비와 라운지 공간을 크게 빼고 내부에 보안문을 따로 만들어 오피스 공간은 인사와 회계가 쓰기로 했다. 2층은 <영건 블러드>와 <젤리 러쉬> 라이브팀, 3층은 게임 엔진 개발 및 비즈니스 본부와 <어둠 속으로> 개발팀이 사용하기로 했다.
집 한 채를 빌려 출발했던 팔로 알토 오피스는 어느덧 3층짜리 건물 전체를 빌려야 할 만큼 늘어났다. 그만큼 샌디가 해야 할 일도 매번 늘어났지만 그녀는 몇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의 달인이었다.
“샌디는 뇌가 쿼드 코어(Quad Core, 프로세스를 처리할 수 있는 코어가 4개)로 구성된 게 분명해.”
“무슨 소리야. 4개로는 저렇게 일 못해. 최소 옥타 코어(Octa Core, 코어가 8개)는 될걸?”
직원들은 팔로 알토 오피스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서 굵직한 일까지 전부 꿰고 있는 샌디를 보며 이렇게 농담했다. 황제국 역시 그녀가 팔로 알토 오피스 성장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샌디는 뉴퀘스트의 어느 누구보다 도전적인 과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오직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샌디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샌디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겼다. 몇 달만 지나도 몰라보게 달라져 있는 뉴퀘스트가 곧 그녀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황제국은 그녀와 하워드와 썩 잘 맞는 커플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사랑조차 잠시의 외도에 불과했다. 황제국은 가뜩이나 바쁜 그녀에게 차기작 프로젝트의 미래가 달린 일을 부탁했다.
“샌디, 바쁜 건 알지만 <어둠 속으로> 아트 디렉터 채용이 1순위입니다. 적어도 E3 전에는 아트 디렉터가 꼭 필요해요.”
“알고 있어요. 요청하신 대로 게임 업계뿐만 아니라 할리우드까지 폭넓게 알아보는 중이에요. 좀 더 기다려 주세요.”
게임 기획과 개발 방향성은 네이트와 올슨이 방향타를 잡고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주얼 아트는 아니었다.
<어둠 속으로>는 전투만큼이나 그래픽이 중요한 게임이다. 그래픽이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들이 감탄할 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면 무엇보다 게임 아트 자체가 멋있어야 한다.
팔로 알토 라이브팀에도 디자이너는 있었다. 아직 <던전 속으로>였던 시절, 몇몇 디자이너들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느끼고 배경과 몬스터 디자인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게임 전체의 비주얼 컨셉을 잡고, 캐릭터와 몬스터, 배경까지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춰 디자인하고 다른 매니저들과 커뮤니케이션할 감각 있는 리더급 아트 디렉터가 필요했다.
황제국은 가능하면 게임과 가장 가까우면서 비주얼 아트 분야에 수많은 인재가 넘쳐나는 할리우드에서 아트 디렉터를 뽑고 싶었다. <어둠 속으로>는 지금까지 뉴퀘스트가 만든 게임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최고의 리소스를 투입할 실험작인 만큼 인력 구성도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음악 감독 역시 헐리우드에서 명성이 높은 영화음악 작곡가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뉴퀘스트는 이제 대학 동아리방에서 몇 명이 모여 <영건 블러드>, <젤리 러쉬>를 개발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황제국은 <어둠 속으로>를 계기로 기술은 물론 미학적인 스타일과 제작 프로세스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물량을 투입하고 최고의 인재와 작업할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인터넷 게임에 비해 패키지 게임은 한 편에 회사의 역량을 응집해 넣을 수 있었다. 설령 <어둠 속으로>가 상업적으로 흥행하지 못한다 해도 이런 제작 경험은 회사에, 그리고 황제국에게도 큰 경험과 자산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샌디는 마침내 할리우드에서 여러 편의 영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비디오 게임 매니아이기도 한 미술 감독을 찾아냈다. 황제국은 샌디, 네이트와 함께 면접을 보기로 했다.
남자는 올랜도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독특한 패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직 검은색만, 그것도 무광의 검은색 아이템만 착용했다. 셔츠, 재킷, 바지는 물론이고 양말과 구두, 반지와 귀걸이까지 검은색이었다. 황제국은 그의 차가 무슨 색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혹시 우리가 배트맨을 뽑는 건 아니죠?
네이트가 슬쩍 황제국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황제국은 피식 웃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패션은 몰라도 올랜도의 경력은 훌륭했다. 업계에서 이름난 미술 감독들과 함께 여러 영화를 작업했다. 장르도 SF, 드라마, 호러, 시대극 등 다양했다. 최근에는 미술 감독으로 참여하기로 한 영화 두 편이 연달아 엎어져 잠시 일을 쉬고 있다고 했다. 황제국은 그의 경력에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첫 경력이 영화가 아니라 게임회사네요? 사이버드림스에서 어드벤쳐 게임 <어둠의 씨앗(Darkseed)> 제작에 참여하셨다고요? 그럼 H.R. 기거(H.R. Giger, 스위스 아티스트로 에일리언 디자인으로 유명함)를 만나보셨나요?”
“그럼요. 딱 한 번이었지만. 취리히에 살고 있어서 제가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사실 원래 게임 아트 쪽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거의 작업을 보고 완전히 반해서 영화로 방향을 틀었죠. 그리고 10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다시 게임으로 돌아오게 되네요.”
어린 시절 <어둠의 씨앗>의 비주얼에 큰 충격을 받았던 황제국은 몹시 반가웠다. 두 사람은 <어둠의 씨앗>에서 시작해 90년대 각종 어드벤처 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호러 게임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그럼 <어둠 속에 나홀로(Alone in the Dark)>도 해보셨나요?”
“정말 혁신적이었죠! 그때는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캐릭터 그래픽이 하도 구려서 다시는 3D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죠. <바이오하자드(Biohazard)>나 <사일런트 힐(Silent Hill)>보다 몇 년은 앞섰던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랜도가 비디오 게임 팬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게임을 즐겼고 황제국, 네이트와 함께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올랜도의 과한 패션 컨셉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네이트도 게임 이야기를 하자 금세 첫인상을 잊어 버렸다.
“게임도, 영화도 눈에 보이는 스타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나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게임 아트 디렉터를 맡아 멋진 게임을 만든 다음, 게임을 기반으로 영화를 찍을 때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거죠. 그리고 게임과 영화의 아트북을 동시에 내는 겁니다. 작업 과정과 자료들을 싹 모아서요.”
“멋진 꿈이네요.”
“소박한 꿈이죠. 기거는 스위스에 아예 성을 하나 사서 자기 박물관을 만들었는데요. 물론 그의 아트웍이 워낙 독보적이니까 가능한 일이지만요. 전 박물관까지는 필요 없으니 제가 좋아하는 게임과 영화를 연결해서 작업해보고 싶습니다.”
“저희랑 함께하신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황제국은 올랜도에게 <어둠 속으로>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면접을 시작한 지 이미 한 시간이 넘은 후였다. 면접을 보기 전 올랜도는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네이트는 그에게 <어둠 속으로>를 플레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임 화면을 본 올랜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맙소사. 이런 그래픽이 가능합니까?”
그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기사 데릭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네이트가 횃불을 휘두르는 방법을 가르쳐주자 그는 던전을 쏘다니며 계속 횃불을 휘두르고 다녔다. 그러다 늑대인간을 만나 1분 만에 죽었다.
올랜도는 던전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데릭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네이트에게 물었다.
“던전은 계속 이렇게 밋밋한 동굴로 이어집니까? 좀 더 멋진 장식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늑대인간과 여러 신화나 민담 속 괴물들이 나온다고 했죠? 그럼 늑대인간의 영역에는 벽에 늑대를 닮은 석상이 서 있거나, 늑대 벽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양각으로 새겨진 늑대의 형상에 늑대인간의 피가 튀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언데요? 사실 지금 던전 배경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분위기 때문에 놀라지만 조금 지나면 곧 익숙해지니까요.”
올랜도는 이미 게임 아트를 맡은 것처럼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그는 <어둠 속으로>의 컨셉과 그래픽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준비 중이던 영화 프로젝트가 엎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네이트와 올랜도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황제국과 샌디는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국은 <어둠 속으로> 조직도에서 비어있던 아트 디렉터에 자리에 이렇게 적었다.
‘배트맨’
올랜도는 뉴퀘스트와 2년 계약을 맺고 <어둠 속으로>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첫 출근날, 그는 면접 볼 때와는 정반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아이템을 착용했다. 반지와 귀걸이는 백금이었다.
“누가 배트맨이라는 거예요?”
네이트는 배트맨이 아트 디렉터로 합류할 거라고 말했다가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패션에 중간이라고는 없는 올랜도는 출근하자마자 E3 2002 부스 디자인을 시작했다.
소프트펀드와 함께 참여했던 지난 2000년 CES와 E3와 달리 이번 E3는 뉴퀘스트가 단독으로 참가한다. 황제국은 E3에서 퀘스트 엔진 2를 공개하고, 퀘스트 엔진 2의 성능을 홍보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프로젝트의 일부를 시연하기로 정했다.
“예산은 얼마나 됩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있나요?”
황제국의 설명을 들은 올랜도는 대뜸 예산부터 물었다. 황제국이 반문하자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슥슥슥슥.
그리고는 8B 연필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깎더니 스케치북을 펼쳐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즉석에서 부스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서 황제국에게 내밀었다. 스케치북에는 동굴의 입구가 그려져 있고, 입구 양쪽으로 늑대 얼굴이 새겨진 기둥 두 개가 서 있었다.
“<어둠 속으로> 던전의 입구네요!”
“<어둠 속으로>가 그냥 기술 시연용 데모라면 굳이 일회용 행사에 큰돈을 들일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차기작이라면 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게임의 컨셉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요?”
“진짜 바위를 잘라서 던전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면 곤란하지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일단 던전으로 들어가면 어두워서 잘 안 보일 테니까 눈속임이 더 쉬울 겁니다.”
올랜도의 아이디어는 과감했다. 네이트와 올슨도 부스에 아예 던전을 만들어 버리자는 올랜도의 아이디어에 적극 찬성했다. 황제국 역시 처음으로 단독으로 참가하는 E3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2002년 E3에는 <둠 3>를 비롯해 <하프 라이프 2>, <헤일로 2> 등 굵직굵직한 게임이 줄줄이 등장할 예정이었다. <어둠 속으로>를 알리고, 퀘스트 엔진 2를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대형 게임들과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만듭시다. 던전.”
황제국이 올랜도의 아이디어를 승인했다. 올랜도는 게임 아트보다 먼저 E3 부스 디자인부터 시작했다.
팔로 알토 오피스는 E3 준비에 분주해 졌다. 이진수는 퀘스트 엔진 2 기술 시연을 준비했고, 네이트와 올슨은 E3용 <어둠 속으로> 데모를 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제국은 게임 기자들에게 E3 관련 소식을 흘렸다.
- 뉴퀘스트가 이번 E3에서 신작 발표하나 본데?
- 벌써? <젤리 러쉬>가 작년 가을이 나왔는데?
- 뉴스 뜸. E3에 나오나 보네.
- 작년 E3는 건너뛰고 갑자기 <젤리 러쉬> 런칭하더니. 이번에는 무슨 게임이길래 E3 나오지?
- 뉴스에는 RPG라고만 되어 있고 다른 내용은 하나도 없네.
- 온라인 RPG 만들겠지? 3D로 제대로 만든 <디아블로> 같은 거 하나 내주면 좋겠다.
- E3 나올 정도면 MMO 아닐까?
- MMORPG면 개발 기간 꽤 걸릴 텐데. <젤리 러쉬> 출시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 예전부터 준비했겠지. 원래 게임사들 프로젝트 몇 개씩 개발하니까. 그중에 똘똘한 놈 출시하는 거고.
웹진에서 관련 기사를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자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반응이 나타났다. <젤리 러쉬>의 대성공으로 뉴퀘스트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위상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뉴퀘스트의 신작이 어떤 게임일지 추측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2002년 5월, 황제국은 E3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다. <영건 블러드>로 베스트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상을 수상한지 2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