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회 - 배틀 패스
하워드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저런 건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요?”
“제가 저 말에 얼마나 감명받았는데요. 어떻게 잊겠어요? 전 매일 밤 자기 전에 ‘스페셜원’을 되새기면서 잠듭니다.”
황제국의 농담에 회의실에 웃음이 터졌다. 회의실을 누르던 긴장감도 풀리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오피스를 옮기고 잔뜩 상기되어 다큐멘터리 인터뷰를 찍었던 날을 떠올렸다. 뉴퀘스트가 한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회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회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런데 막대한 개발비용 앞에 다들 웅크리고 있었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 다시 용기를 내야 할 때였다. 황제국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농담이면서 진담입니다. 전 크게 성공한 게임 회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건 이제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여러분들을 영입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에도 우리 오피스를 운영하고, 수많은 게이머들이 우리 게임을 즐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단지 규모가 크고 돈을 많이 버는 게임 회사가 목표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까보다 훨씬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제국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저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히딩크 감독님의 말을 빌리면 아직 배가 고픕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합니다. 한계를 만나면 저는 그 한계마저 뚫고 나가고 싶습니다. 서양 판타지로 컨셉을 정한다면 분명 동양 판타지보다는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서울 오피스에서 개발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 오피스에서 서양 판타지와 RPG에 정통한 사람을 훨씬 쉽게 뽑을 수 있습니다. 실제 <어둠 속으로>도 그렇게 나왔구요.”
“음, 분명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서양 중세 판타지를 한다면 미국이나 아니면 영국에서 개발하는 게 훨씬 낫겠어요. 시장도 그쪽이 훨씬 크구요.”
“맞습니다, 하워드. 뉴퀘스트는 한국에서 창업했지만 우리의 최대 시장은 미국입니다. 서양 판타지를 만든다면 기획과 개발도 미국에서 하는 편이 여러모로 훨씬 낫습니다.”
미국은 서양 대중문화의 본거지고, 영국 역시 J.R.R. 톨킨이 태어나고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등이 탄생한 판타지의 대국이다. 이미 팔로 알토와 런던에 오피스가 있는 뉴퀘스트가 중세 판타지 RPG를 만든다면 중세 판타지가 탄생한 곳에서 개발하는 편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이제 완전히 납득이 갑니다. 왜 우리가 동양 판타지를 만들어야 하는지.”
“지지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워드.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네?”
“아직 한 가지 방향성이 더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특별히 하워드가 반길 내용인 것 같네요.”
황제국이 다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가리켰다. 프로젝트 TW의 여덟 번째 방향성이 화면에 떴다.
8. 부분 유료화 고도화로 세계 최대 규모의 가입자와 동접자를 보유한 MMORPG
“현재 대부분의 MMORPG는 정액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유저들에게 매달 일정 비용을 받고 있죠. 일정 규모의 가입자를 확보하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정액 요금이 부담스러운 유저에게는 그만큼 진입 장벽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젤리 러쉬>에서 부분 유료화를 도입해 고객의 전체 모수를 최대한 넓히는 데 집중했고, 그 전략은 대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부분 유료화라는 말에 하워드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황제국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그렇다면 드디어?! 대표님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하워드, 능력치를 올려주는 아이템을 돈 받고 팔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구요.”
“아아~~.”
스탯 강화 아이템을 갈망하는 하워드는 황제국의 발언에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는 오종석이 황제국 대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게임의 BM은 아주 중요합니다. 게임의 시스템과 재미 요소의 설계까지 BM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죠. 그래서 TW는 어떤 과금 체계로 할 것인가 많이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안정적인 정액제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동양 판타지 컨셉이라면 역시 일단 게이머를 끌어들이는 게 먼저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컨셉이 생소한데 BM에 진입 장벽까지 있다면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그러면 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능력치 아이템이 아니라면 <젤리 러쉬>처럼 외모를 꾸미는 방식이 되나요? 그런데 <젤리 러쉬> 방식은 정말 외모만 꾸밀 수 있는데요. 가령 상점에서 투구를 샀는데 능력치는 전혀 없고 디자인만 그럴듯하다면 RPG 게이머라면 안 살 거 같은데요?”
이번에는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 PM 유필승이 물었다. 그는 <영건 블러드> 부분 유료화 방식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캐릭터의 시그니처 총에 파괴력을 올리거나, 특수 스킬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템으로 캐릭터 간 파워 격차가 생기는 걸 황제국이 승인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필승 PM님의 말씀대로 프로젝트 TW는 외모 아이템을 파는 방식으로는 BM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RPG는 아케이드 게임과는 다르니까요. 저는 TW의 유료화 방식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봐주세요.”
황제국은 PPT 슬라이드를 넘겨 부분 유료화 세부 장표로 넘어갔다.
- 부분 유료화 1 : 게임 편의성 증대(인벤토리 확장, 포탈, 탈 것 등)
- 부분 유료화 2 : 계정 및 외모(캐릭터 서버 이동, 클래스 변경, 외모 초기화, 특수 커스텀 룩 등)
- 부분 유료화 3 : 게임 내 재화(화폐) 판매
- 부분 유료화 4(★) : 토템 패스(특정 조건 이상을 달성할 때마다 보상 제공, 시즌제)
사람들은 황제국이 나눈 부분 유료화 방식을 바라보며 술렁거렸다.
“토템 패스? 시즌제? 이건 뭐지?”
“글쎄요. 전혀 처음 보는 방식인데요?”
“특정 조건을 달성한다? 어떤 레벨에 도달하면 보상을 주는 방식인가?”
소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럴만 했다. 배틀 패스 형식의 과금 체계가 등장한 것은 2010년대 초반. 2002년 기준으로는 10년 이상 앞선 방식이었다.
‘처음 부분 유료화 얘기를 꺼냈을 때도 비슷했지.’
황제국은 배틀 패스 방식을 꺼내면서 게임의 역사를 너무 빨리 발전시키는 게 아닌가 우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양 판타지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맞붙는데 같은 정액제로 출시하는 건 위험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정액제 요금을 낮추는 것은 결코 좋은 접근이 아니었다. 가격을 낮추면 자칫 경쟁 게임보다 퀄리티가 낮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가격을 낮춘 만큼 더 많은 게이머를 유입시켜야 하는데 아무리 가격이 낮아도 정액제 자체의 진입 장벽은 여전했다.
“그럼 하나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게임 편의성 부분은 금방 이해가 가실 겁니다. RPG에는 게이머마다 아이템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인벤토리가 있는데 시작할 때는 인벤토리 공간이 작게 만들 겁니다. 확장권을 구매하면 인벤토리를 확장할 수 있고, 창고를 판매해 아이템을 따로 저장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그리고 MMORPG는 공간이 굉장히 넓습니다. 이동에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래서 공간을 도약하는 포털이나, 말처럼 이동을 도와주는 탈 것을 판매합니다. 물론 전부 돈으로만 판매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냥 등으로 얻은 게임 머니로도 일부는 이용할 수 있게 해야죠. 게이머가 바가지라고 느끼지 않도록 밸런스를 잡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황제국은 TW의 부분 유료화 방식을 소개했다. MMORPG는 정액제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부분 유료화 방식을 도입해 BM을 발전시켰다. 황제국은 초반부터 고도화된 BM 시스템으로 게임의 규모와 매출을 만들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맞설 계획이었다.
“계정 이동이나 캐릭터 전직, 스킬 초기화, 게임 내 재화 판매 등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실 겁니다. 다만, 이런 요소를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가, 가격을 얼마로 할 것인가 등은 굉장히 세부적인 논의와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합니다. 기획팀 안에는 게임 경제와 BM 파트를 따로 구성해 이런 부분을 논의할 생각입니다.”
황제국의 설명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지막 ‘토템 패스’에 관한 설명을 기다렸다. 황제국이 가로로 긴 직선이 있고 선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원이 놓여 있는 슬라이드를 띄웠다.
“토템 패스의 개념은 간단합니다. 가령, 토템 패스를 5,000원에 판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한 전사에게는 아무것도 없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물약 하나도 귀합니다. 그런데 토템 패스를 결제하면 사냥터에서 몬스터 다섯 마리를 잡아 경험치 500을 달성하면 회복 물약을 줍니다. 경험치 1,500을 달성하면 30분 동안 전체 체력을 10% 늘려주는 비급을 주죠. 다음에는 독에 면역을 주는 주술사의 축복을 줍니다. 이런 식으로 달성하는 경험치에 따라 보상을 주는 시스템입니다.”
“오~, 그거 신선하네요. 토템 패스를 구매했다고 해서 바로 보상이 주어지는 게 아니네요?”
하워드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게 핵심입니다. 구매와 동시에 보상이 아니라 구매 후 게임을 하면 할수록 추가 보상이 주어지는 형태입니다. 당연히 토템 패스를 구매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죠. 토템 패스는 한 달, 혹은 두 달 정도의 기간을 정해두고 팝니다. 다음 시즌이 시작되면 지난 시즌 토템 패스는 구매할 수 없죠.”
“이거 생각해 보니 굉장한데요, 대표님? 1, 2, 3번은 언제, 얼마나 구매가 일어날지 알기 어렵지만, 시즌제 패스라면 시즌 초반에 많은 구매가 일어날 테고 지난 패스 판매량으로 다음 패스 판매량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겠네요. 이건 부분 유료화지만 정액제의 장점을 절묘하게 뒤섞은 거 아닙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부분 유료화의 단점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에 의해 매출액이 널뛰기를 한다는 거죠. 하지만 토템 패스의 경우는 한 번 구매했던 사람은 반복 구매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만큼 빠른 성장을 원하는 게이머일 테니까요. 당연히 다음 시즌 매출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게다가 토템 패스는 하나만 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반 토템 패스, 전사의 토템 패스, 신격 토템 패스 등 가격에 따라 보상에 차등을 주는 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매 시즌 패스 구성은 구매자 비율, 그로 인해 게임 내에서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구성합니다. 이는 라이브 운영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될 겁니다.”
“과연···!”
하워드가 토템 패스 시스템에 감탄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TW의 배틀 패스 개념을 각자 상상해 보았다. 굉장히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시스템 자체가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다.
“진짜 획기적이다. 이거 처음 부분 유료화를 하자고 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인데요?”
“정말요. 게임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패스를 구매해도 소용이 없으니 구매한다고 무조건 강해지는 것도 아니구요.”
황제국은 긍정적으로 바뀐 리더십 미팅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내내 불안해 보였던 전유진의 얼굴도 이제 밝게 변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생소하고 불리한 컨셉으로 만드는 MMORPG라는 걸 인정하고, 정액제 MMORPG와 경쟁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습니다. TW가 어떤 이야기와 모습으로 나올지 저도 아직 모릅니다. 초기 컨셉을 가다듬는 데만 적어도 2~3개월은 걸릴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감히 프로젝트 TW가 MMORPG의 역사를 바꾸고, 새로운 기준이 될 게임이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우려와 걱정은 저도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그 역시 뉴퀘스트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황제국은 진지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뉴퀘스트가 우리가 사랑하는 뉴퀘스트로 남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건 블러드>와 <젤리 러쉬> 덕분에 아주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안주하고 안전한 선택을 하면 뉴퀘스트는 앞으로 10년, 괜찮은 실적을 내는 그럭저럭 훌륭한 회사로 남을 겁니다. 하지만 <어둠 속으로>와 함께 프로젝트 TW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기술, 콘텐츠, 운영, 마케팅 등 모든 부분에서 앞서가는 전 세계 최고의 게임 회사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황제국은 자기도 모르게 웅변하듯 힘을 주어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가슴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미 <어둠 속으로>와 프로젝트 TW로 성공한 뉴퀘스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개성이 뚜렷하고 완성도 높은 게임으로 전 세계 게임 팬들에게 사랑받으며 비평의 찬사와 인기를 모두 누리는 게임. 게임 개발자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환희였다.
짝짝짝짝짝!
그때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곧 따라서 박수를 치더니 이내 회의실은 온통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황제국이 뉴퀘스트 리더십 그룹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제 그의 꿈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