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회 - 젤리 러쉬 CBT(2)
많으면 3~4만 정도를 예상했던 CBT 참가 요청이 12만 명이 넘자 뉴퀘스트 멤버들은 좋으면서도 당황했다. 물론 CBT 참가 신청에 돈이 드는 일은 아니다. 그저 이름과 이메일, 전화번호만 입력하면 끝난다.
그래도 일부러 뉴퀘스트 홈페이지에 접속해 신작 CBT에 참가 신청을 할 정도면 <젤리 러쉬>에 관심이 크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무려 12만 4,358명이나 된다고 하니 민소영을 비롯한 젤리 러쉬팀은 갑자기 압박감을 느꼈다.
“아니, CBT 추첨 경쟁률이 124:1이 되어버리다니···? 이걸 어떡하죠?”
“그러게. 생각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 몰렸는데. 우리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나?”
“CBT 신청자 12만 명 넘었다는 기사 보고 친구들이 자꾸 전화와요. 자기는 꼭 뽑아줘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해도 또 오고, 또 오고. 아주 죽겠어요.”
“어? 저도 그런데. 1,000명이나 1,001명이나 똑같아서 티도 안 난다고. 너랑 나랑 둘만 입 닫으면 아무도 모른다면서.”
“친구는 그나마 낫죠. 저처럼 조카들이 뽑아달라고 난리 치고 땡깡부리면. 어후, 진짜 난감해요.”
친구와 친척들 뿐만이 아니었다. CBT 신청 마감 후 뉴퀘스트 사무실에는 전화와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CBT 신청을 놓쳤는데 어떻게 다시 신청할 수 있냐는 문의와 언제 발표 나오냐는 문의, 그리고 자기를 꼭 뽑아달라는 세 가지 문의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급기야 전화 때문에 일을 하기가 힘들어 전화기 코드를 뽑아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과연 <젤리 러쉬>를 제일 먼저 해 볼 행운의 1천 명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랜덤으로 당첨자를 추출한다고 공지되어 있었지만,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가 뽑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전 <영건 블러드> 본편을 처음 발매하는 날, 용산에서 역사적인 런칭쇼까지 보고 샀던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젤리 러쉬> CBT 참가 자격이 충분하죠.
- 그렇게 따지면 전 발매 전에 S대 축제할 때 데모 해보고 개인전도 3등이나 했네요. 저야말로 자격 만땅입니다.
- 다들 <영건 블러드> 몇 개 사셨어요? 전 본편, 확장판 각각 2개씩 샀습니다. 하나씩은 비닐도 안 뜯고 소중하게 진열 중. 진짜 팬은 소장용을 구매하는 법입니다.
- 저도 처음 본편 발매하는 날, 용산 가서 황제국 사인도 받았어요. 얼굴 보고 생각보다 잘 생겨서 속으로 쫌 놀랬음.
- 전 미국 사는 이모에게 부탁해서 욕먹어가며 미국판도 구매했습니다. 이번 CBT에 뽑히면 그때 욕먹은 거 하나도 억울하지 않을 텐데.
- 아무리 베타 테스트라 소수만 뽑는다지만 천 명은 솔찍히 쫌 너무 적은 듯;;;
- 그러게요. 뉴퀘스트 체면과 위상이 있지 만 명쯤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 천 명 그대로 갈 거면 이건 자격시험 쳐야 합니다. 예선, 본선 치르고 올라온 사람 중에 1000명. 이래야 인정이죠.
- 제국아, 제발 나 좀 뽑아줘ㅠ.ㅠ 궁금해 미치겠어!!!!!!
- 여기 그런 사람 한둘 아니예요. 저도 궁금해 돌아버릴 지경@[email protected];;;;;
전에 없이 회사에 쏟아지는 문의와 각종 커뮤니티 반응을 보고 황제국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워 이대로 진행하기는 무리였다.
“안 되겠어요. CBT 당첨 인원을 3천 명으로 늘리죠. 그만큼 피드백이 늘어나고, 관리에도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대로 두면 회사 앞에서 시위라도 벌어질 거 같아요.”
“3천 명으로 될까요? 만 명쯤은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이 정도면?”
“만 명으로 확대하면 소수만 뽑는 의미가 없어져요. 우리도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데 만 명이나 되면 메시지 관리부터가 험난합니다. 사실 3천 명 의견 정리하는 것도 진짜 만만치 않아요.”
“아, 하긴. 서버보다 그쪽이 더 문제겠네요.”
“전 일단 늘리는 거 찬성입니다.”
“저도요. 일이 좀 늘어도 이 정도 여론이면 뭐라도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저도 찬성. 급한 불은 꺼야죠.”
멤버들 모두 <젤리 러쉬> CBT를 향한 과도한 열기에 화들짝 놀란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CBT 인원을 늘리는 데 찬성했다.
황제국은 즉각 뉴퀘스트 홈페이지에 CBT 인원을 3천 명으로 늘린다는 공지를 올렸다. “더 늘리고 싶지만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인원을 늘렸다고 공지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곧바로 환호성을 질렀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당첨 확률이 세 배로 오른 셈이었다.
뉴퀘스트는 DB에 등록된 12만 명의 신청자 정보 중에 랜덤으로 3천 명을 선별했다. 그중 메일 주소가 이상하거나, 전화번호에 숫자가 모자라는 등 정보가 불분명한 57명을 다시 추출했다.
“이분들은 자기가 잘못 쓴 줄도 모르겠지? 안타깝네.”
“어쩔 수 없지. CBT 기회를 코앞에서 놓치다니. 그래도 자기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까 차라리 다행일지도.”
“맞아요. 저 같으면 열 받아서 잠도 안 올 거예요. 이런 건 모르는 게 약이죠.”
당첨자는 홈페이지에 따로 공지하지 않았다. 접속 링크와 ID/패스워드가 담긴 메일을 보내고, 휴대폰 문자 알림을 보냈다. 3,000명에게 개별 알림을 보내는 것도 일이었다. 홍보대행사가 알바까지 고용해 이틀에 걸쳐 3,000명에게 메일과 문자 알림을 보냈다. 만약 휴대폰이 아니라 집 전화면 전화를 걸어 알려줘야 해서 시간이 더 걸렸다.
CBT 당첨자를 발표하자 게임 커뮤니티는 기쁨과 환희, 슬픔과 탄식이 뒤섞인 감정의 용광로로 변했다. 문자와 이메일을 받은 사람들은 즉각 게시판에 인증하며 기쁨의 느낌표를 남발했지만, 연락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몇몇 사람들은 <영건 블러드> 확장판 컬렉터즈 에디션 구매 예약이 비하면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있는 CBT가 훨씬 낫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영건 블러드> 컬렉터즈 에디션은 E3 수상 이후 덩달아 가치가 급부상하면서 상태만 좋으면 6~70만원대에 거래되기도 했다.
서버/인프라 본부는 급히 CBT용 퀘스트넷 테스트 서버 용량을 증설했다. 동접자가 최대 3천 명을 넘을 수 없었으나 서버 용량은 훨씬 넉넉하게 준비했다.
또한 황제국을 비롯해 민소영, 그리고 게임 엔진 본부의 이진수와 사이먼까지 프로그래머들도 막바지 CBT 준비를 위해 개발에 매달렸다. CBT에 공개할 맵은 총 30개. 비공개 베타테스트이긴 하지만 최대한 버그 없이 깔끔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코딩했다.
처음에 사이먼은 본래 업무인 퀘스트 엔진 업그레이드만 진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제국이 실제로 엔진을 활용해 게임을 만들면서 장단점을 직접 느껴보는 편이 퀘스트 엔진 업그레이드에도 나을 거라고 제안했고, 사이먼도 동의했다.
음악 감독 송보람은 맵 분위기에 어울리는 20곡의 OST 초안과 3곡의 메인 테마 후보곡을 만들었다. 또한 그녀는 신디사이저로 소리를 조합해 레이스 도중에 생기는 다양한 효과음을 직접 만들었다.
가장 신경 쓴 효과음은 부딪힐 때 나는 소리였다. 실제 젤리와 젤리가 부딪힐 때는 결코 재미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인 <젤리 러쉬>는 현실을 얼마든지 왜곡해도 상관없었다. 송보람은 젤로끼리 부딪힐 때 나는 소리, 젤로가 벽이나 장애물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 점프하는 소리, 비탈을 구르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만들었다.
또잉또잉 -
쀼쀼 -
뾱뾱 -
“아아~, 이게 뭐야. 젤로가 더 귀여워졌어!!! 어뜩해!!!”
효과음을 업데이트한 게임을 해보면서 전유진은 송보람 못지않은 돌고래음을 발사했다. 황제국은 효과음이 살짝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최종 버전이 아니라 CBT였기 때문에 완벽하게 준비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메인 테마는 게임 할 때마다 랜덤으로 나오게 할 거예요. 사람들이 피드백 남겨주면 그걸 합산해서 최종 선정할 때 참고하죠. CBT가 끝나면 OST 녹음이랑, 효과음 다시 작업하고, 젤로 목소리 녹음까지 한꺼번에 진행하는 걸로 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송보람 역시 그녀가 음악 및 음향 효과까지 총괄한 <젤리 러쉬>가 뜨거운 반응 속에 런칭을 앞두자 긴장하면서도 흥분했다. 그녀는 이런 기회를 날려버릴 뻔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아찔했다.
그렇지만 일단 잠이 들면 꿈속에서 젤로들과 밴드를 이뤘다. 젤로들이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고, 문어처럼 팔이 여러 개인 젤로가 수십 개의 키보드를 연주했고 송보람도 함께 어울려 놀랐다.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작곡하며 음악 속에 살았다. 이렇게까지 푹 빠져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는 너무나 감사했다.
예전에는 적당한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힘들었는데, <젤리 러쉬>는 정반대였다. 너무나 많은 음악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오히려 골라내느라 힘들었다. 꿈속에서 젤로들과 노래하고 연주할 때면 그녀는 누가 젤로이고, 누가 송보람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CBT를 향한 막바지 테스트까지 마무리하고, 어느덧 10월 <젤리 러쉬> CBT 오픈 시간이 다가왔다. CBT 서버는 아침 10시에 열렸다.
CBT에 선정된 사람들은 다양했다. 학교에 가야 하는 10대 청소년, 컴퓨터 앞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며 10시만 되기를 기다리는 휴학생, 강의실에는 앉아 있지만 점심시간에 바로 PC방으로 달려갈 생각인 대학생, 아이들 학교 보내고 부엌을 치우며 CBT를 기다리는 주부, 아침에 일어나 뭐라도 핑계 대고 휴가를 낼까 말까 백만 번쯤 고민하다 결국 회사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직장인, 가르치는 학생이 CBT에 선발되자 학생 ID를 빌려 쓰자며 은근히 협박하는 미술 학원 선생님, 게임이 너무 궁금해서 오전 수업을 휴강 처리해 버린 대학 교수님까지.
나이도, 직업도, 취향도 전부 달랐지만 오전 10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건 똑같았다. 심지어 CBT에 선정되지 못한 사람들도 10시를 기다렸다. 그들은 빨리 CBT 참가자들이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게임 스크린샷과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어미 새처럼 하나씩 풀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지금 몇 시야?”
“9시 47분.”
“아니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너가 1분마다 물어보니까 시간이 안 가지.”
“아, 패키지 게임 때는 미리 받아서 할 수 있었는데. 인터넷 게임 되니까 그런 것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서버 오픈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부류는 게임 미디어 기자들이었다. 그들도 보통 게이머들처럼 서버 오픈만을 기다리며 투덜거렸다. 히트 게임이 나와야 잡지도 많이 팔린다. 기자들에게 <젤리 러쉬>의 흥행은 그들의 생업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띠띠- 띠띠- 띠띠-.
그리고 마침내 오전 10시가 되었다. 수백 개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여 <젤리 러쉬> CBT 초대 링크를 클릭했다. 퀘스트넷 모니터링 화면에도 사람들의 접속을 알리듯 그래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시작됐다.”
황제국의 말에 랩실에 모여있는 뉴퀘스트 멤버들은 긴장했다. 황제국과 박태권은 퀘스트넷 활동을 파악했다. 몇 분이 지나자 클라이언트 다운로드를 마친 사람들이 게임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CBT가 문제없이 오픈하자 멤버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우리도 사람들이랑 같이 게임하러 갈까요?”
“렛츠 고!”
뉴퀘스트 멤버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CBT 서버에 접속했다. CBT는 동접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적어 매칭이 되지 않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멤버들도 최대한 게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엄지원은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의 활동을 지켜봤다. 사람들의 행동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접속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찬찬히 둘러보고 채팅창에 사람들한테 말부터 거는 사람도 있었다.
“우와~, 뭐가 디게 많다.”
“하나하나 다 이쁘고 귀엽네.”
대부분은 [ 락커룸 ]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젤로 캐릭터와 액세서리를 이리저리 조합해 가며 먼저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들은 캐릭터를 꾸미며 약 5분에서 8분 정도를 보낸 후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게임을 시작하든, 게임을 끝내고 나온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 였다. 곧바로 다음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채팅창에서 떠들기 시작하는 사람.
- 우와, 우와, 우와! 이거 뭐지? 이거 뭔데? 이거 뭐야?
- ㅎㅎㅎ 또 한 분, 엄청 흥분 하셨네.
- 님은 무슨 맵 나왔어요?
- 저, 저, 저 [ 달려라 올림픽 ]이요.
- 어? 나도 방금 그거하고 왔는데. 저랑 같은 방 계셨나 봄. 방가요~~
- 저는 [ 동대문을 열어라 ] 맵이었는데.
- 무슨 성문을 계속 통과하는데 아니 타이밍이 지멋대로야?
- 막 지 맘대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정신 항개도 없뜸.
- 근데 문 닫힐 때 얘들 길 막혀서 버둥거리고 뒤로 날아가는 거 너무 웃기고 귀여워ㅠ.ㅠ
- 으악!!!! 몬지 알아요 그거.
- 저는 [ 수박 마을 ] 맵이었는데 길옆에서 막 대포를 쏘는데 그게 수박씨에요.
- 진짜 하찮아서 증말. 근데 그거 맞고 앞으로 나가질 몬해ㅠ.ㅠ
- ㅋㅋㅋㅋㅋ 이거 맵이 엄청 다양한가 봐요. 다른 거 해보러 가야겠다.
- 첨엔 이게 뭔가 했는데, 한 판 해보니까 장난 아니네요.
- 역시 왜 다들 뉴퀘, 뉴퀘 하는지 알겠어요.
- 근데 캐릭터 고른다고 별다른 능력은 없나 보네요.
- 맵은 못 골라요?
- 그런가 봐요. 그냥 게임하기 누르면 바로 슝~~
- 으아아아아아~~~. 이겜 뭐야? 겁나 귀여워.
- 또 한 분 오셨네. 님은 무슨 맵?
사람들은 저마다 맵과 게임에 관해 정보를 나누면서 <젤리 러쉬>라는 게임을 퍼즐처럼 맞춰보았다. 게임 기자들도 똑같은 입장이라 CBT 참여자들이 <젤리 러쉬>의 선발대요, 개척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누구보다 먼저 게임을 즐길 권리와 함께 의무도 있었다. 개발사 뉴퀘스트에 성실하게 피드백해야 하는 것은 물론, CBT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 줄 의무였다. 그것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CBT에 선정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