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회 - 가련한 운명의 여인
<영건 블러드> 확장판의 기본 줄거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배신자 이록을 찾아가 민족의 배신자요, 장건의 뒤통수를 때린 이록을 죽이는 것이다.
이록은 일본 관동팔군의 비밀 기지에 있는 것으로 합의했다. 전유진의 과제는 이록이 왜 거기에 있는지 백스토리를 만들고, 장건이 이록을 찾으러 떠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록을 살리기로 한 날부터 계속 생각했어. 이록은 왜 거기 있을까? 이록이 비밀 연구소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될까? 장건은 누구와 함께 배신자 이록을 처단하러 갈까?”
“장건이 황산, 왕소현이랑 셋이 가는 거 아니에요?”
“확장판인데 아무래도 메인에 새로운 캐릭터가 한 명 들어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잠깐!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드는데······. 설마, 그 캐릭이 유희철은 아니겠죠?”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개념 없진 않다고!”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누구예요?”
황제국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전유진이 약간 망설이다 말했다.
“음, 이번에는 여자야. <영건 블러드>에 이미 남자 캐릭터가 많잖아. 여자를 한 명 더 넣어 봤는데.”
“봤는데요?”
모두 답답한 얼굴로 전유진을 바라봤다. 전유진이 눈동자를 굴리다 대답했다.
“그 여자는, 이록의 여동생이야.”
“......!”
생각지도 못한 존재에 충격을 받은 듯 동방이 고요했다. 전유진이 모두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확장판은 이렇게 시작해요. 장건에게 어떤 묘령의 여자가 찾아와요. 여자는 창백한 피부에 정말 아름답지만, 어딘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요.”
전유진은 뉴퀘스트 멤버들을 1930년대 스팀펑크 세계의 만주로 다시 안내했다.
***
장건은 폭렬왕에게서 탈취한 스팀 탱크를 처분하고 제법 큰 돈을 마련했다. 그는 그 돈으로 새로운 스팀 바이크를 사고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한다. 하지만 뒤로는 계속 이록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건에게 여자가 찾아온다. 여자는 자신을 이수련이라고 밝히며 말했다.
“당신이 이록을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허튼소리 할 거면 가시오.”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다시 말하지만, 허튼 소리하면 무사하지 못해.”
가짜 정보에 수없이 속았던 장건은 그녀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어디 있는지 알지만, 그게 어딘지는 몰라요.”
“뭐요, 지금 나랑 장난하나? 어디 있는지 아는데, 그게 어딘질 모른다?”
“그말대로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록을 찾는 걸 도와줘요. 그게 내가 이록이 어딨는지 알려주는 조건이에요.”
“하! 이거 참. 그래, 어디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관동팔군의 비밀 연구소. 당신들이 설계도를 가져간 비밀 병기를 만든 연구소. 바로 거기에 이록이 있어요.”
쾅!
장건이 주먹으로 수련이 등지고 있는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벽이 울릴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수련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개소리 지껄일 거면 빨리 꺼져! 머저리를 찾으러 온 건가? 내가 그딴 소리를 믿을까 봐?”
“이록은 제 오라버니예요.”
이수련이 장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장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를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반드시.”
장건은 이수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알았지? 이록이 거기 있다는 걸?”
“편지가 왔었어요. ‘나는 만주 모처에 일본군과 있다. 투항해라. 내가 본 걸 너도 본다면 같은 생각일 거다. 이런 걸 만든 일본군을 이길 상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홍콩에 있는 곽 사부를 찾아라’라고.”
“그것만 가지고 비밀연구소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지?”
“바보예요? 보면 몰라요? 뻔하잖아요?”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어. 편지는 어디 있지?”
“무관학교 사령관에게 드렸어요.”
“뭐야? 독립군인가? 젠장, 이제야 알겠군!”
장건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그 비밀 연구소로 가서 친오빠를 죽이고 민족과 독립군 앞에 네 결백을 증명하겠다 이건가? 그것도 날 이용해서? 정말 독립군이라면 지긋지긋하군.”
“마음대로 생각해요. 갈 건가요? 아닌가요? 당신이 아니라도 나는 어쨌든 갈 테니까.”
“진짜 자기 오빠를 죽이겠다고?”
“그래요.”
장건이 이수련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녀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속는 셈 치고 믿는다고 치자. 그런데 네가 그놈처럼 날 배신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증명하지? 그놈의 더러운 피가 너한테도 흐르고 있을 텐데?”
그러자 그녀는 품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배신하면, 아니면 이록을 앞에 두고도 죽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으면 이걸로 날 쏴요.”
장건은 이수련의 단호함에 총을 받아 들었다.
“정말 독한 여자군. 좋아. 만약 이록처럼 배신했다간 널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뭐죠?”
“이록은 내가 죽인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어요. 겨우 배신 한 번 당했다고 징징거리지 말아요. 그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람이 당신 하나가 아니니까.”
***
“장건의 벙찐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인트로가 끝나요.”
전유진이 확장팩의 인트로를 설명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뉴퀘스트 멤버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그 담에는요?”
오종석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전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진데···? 이수련이라는 캐릭터가 OK가 나야 이야기를 진행하지?”
“아후! 감질나게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그러는 게 어딨어요?”
오종석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전유진이 황제국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어때?”
“좋아요. 이수련이라는 캐릭터가 가슴 아픈 사연과 복잡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가 될 거 같아요. 이록이 편지를 보내 자기를 노출했다는 게 약간 무리수긴 하지만, 가족이니까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나도 그 복잡한 심리를 그려 볼 생각이야. 그래서 이름도 수련이라고 지었고.”
“이록이 왜 비밀 연구소에 가 있는지는 정하셨어요?”
“응,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야.”
“어떻게요?”
“이록은 도망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당연히 일본군은 그에게 정보를 좀 캐다가 죽이려고 하지. 그때 이록이 러시아가 일본군에 심어 놓은 스파이를 죄다 불어.”
“야~, 진짜 나쁜 놈이네요. 결국 지만 살겠다고.”
“이록은 그런 놈이니까. 이록에 관해 알아보던 일본군은 이록의 능력을 높이 사. 그만한 총잡이를 구하기는 일본도 쉽지 않거든. 하지만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놈이니까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는 곳으로, 바로 비밀 기지에 데려간 거야.”
“음, 그렇게 흘러간다? 하긴, 어느 군대든 스나이퍼는 귀중한 인재죠.”
“어때? 괜찮아 보여?”
“네, 고급 정보를 팔아 목숨을 구하고, 능력을 팔아 연구소 수비대로 들어가고. 말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이록을 죽이러 가는 과정과 결말이 더 중요하니까 설정은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예스! 그럼 이 설정으로 확장판 이야기 진행 시켜볼게.”
“네, 유희철 캐릭터는 어떻게 넣을지 정하셨어요?”
“아니, 아직. 뭔가 멋있고, 신비스럽고, 유쾌하지만 약간 얄미우면서도, 결코 또 밉지 않은······.”
“네네, 그렇죠. 그렇죠.”
전유진의 유희철 찬양이 시작되자 황제국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정했어. 항상 기타 케이스를 메고 다녀. 근데 그 안에는 총이 들었어.”
“뮤지션의 특성을 살렸네요. 개성 있고 좋은데요?”
“그럼 나는 이수련과 유철 캐릭터 디자인을 시작하면 되겠네?”
차현주가 금방 자기가 할 일을 캐치했다. 순간 황제국은 예전에 봤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 생각이 났다.
“그럼 아예 총을 기타 모양으로 디자인하면 어때?”
“총을 기타 모양으로?”
“응. 스트랩으로 몸에 걸고 총 손잡이는 접을 수 있게 하는 거야. 어쿠스틱 말고 일렉 기타 스타일로. 평소에는 기타 모양이다가 손잡이를 펴면 총이 되는 거지.”
“일렉 기타면 디자인이 좀 더 자유롭긴 한데.”
차현주가 즉석에서 유희철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유철의 무기가 될 기타-건을 몇 가지 스케치했다. 총 손잡이가 기타로 쓸 때는 접혀있다가, 총을 쏠 때는 옆으로 펴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응, 멋진데? 현실에서야 불가능하지만 우리 게임은 리얼리티보다 스타일이 중요하니까.”
“좋다. 우리 오빠한테 딱이야!”
차현주의 디자인을 전유진도 좋아했다.
“그럼 이수련은요, 언니? 스타일이나 총은 어떤 걸 써요?”
“스타일은··· 약간, 전형적인 비극적인 여인상 있잖아? 청순가련형에.”
“그럼 왕소현하고는 반대 스타일로?”
“그렇지. 그렇지. 캐릭터는 겹치면 안 되니까. 이수련은 아무리 민족 반역자라지만 자기 오빠랑 싸워야 하는 캐릭터거든. 남자들의 비장미라면, 이건 여성의 비련미라고나 할까?”
“음, 속은 강하지만 겉은 비극적인 인상. 알았어요. 그럼 총은요?”
“총은 처음부터 정해졌지. 오빠 이록이 뛰어난 스나이퍼라면, 동생 수련은 더 위대한 스나이퍼야.”
“아, 그렇다면 수련에게 딱 어울리는 총이 있어요. 러시아의 자이체프라는 군인 아세요?”
“자이체프? 아니, 모르는데?”
“2차 세계 대전 소련군 최고의 전설적인 저격수에요. 200명이 넘는 독일군을 저격으로 죽였다고 알려졌어요.”
“어후, 200명이 넘게?”
“자이체프는 총알이 빗나가지 않고 원샷 원킬 저격수로 유명해요. 근데, 그 사람이 쓴 저격총이 러시아의 모신 소총이었어요. 청산리 대첩에서도 쓰인 총이니까 그 총 디자인을 활용하면 될 거 같아요.”
“지금 당장 도서관에서 찾아봐야 겠다.”
“어떻게 이렇게 설정이 딱딱 맞게 떨어지지?”
“언니가 캐릭터 설정을 잘한 거죠.”
전유진과 차현주가 짝짜궁을 하며 좋아했다. 황제국도 추가되는 이수련과 유철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기존 <영건 블러드> 캐릭터와 연결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이 확실했다.
“그럼 유진 선배님은 이 설정에서 확장판 스토리와 추가 캐릭터들 개발해 주세요. 이수련과 유철 외에 미국과 유럽 캐릭터, 가능하면 흑인 캐릭터까지 한 명 넣어서 최소한 5명 정도는 추가하면 좋겠어요.”
“30년대 만주에서 미국인에, 유럽인에, 흑인까지! 완전 국제화, 세계화네.”
“미국이나 유럽 쪽 해외 유통은 <영건 블러드> 확장판이 나오면 처음부터 합본으로 묶어서 유통할 계획이에요. 그러면 싱글 플레이 볼륨도 꽤 나오고, 그쪽 사람들이 감정이입 하기 쉬운 캐릭터도 생기니까요.”
“처음부터 묶어서 팔면 가격은 좀 손해 아닌가?”
오종석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그렇겠지. 하지만 미국에서 뉴퀘스트나 <영건 블러드>는 완전 무명이니까. 최대한 즐길 거리를 잔뜩 담아서 하나라도 더 파는 게 이익이야.”
“그럴까?”
“응, 이 게임 하나가 전부가 아니니까. 이걸로 이름을 알리고, 또 다음 게임, 그 다음 게임으로 계속 성공해야지. 블리자드가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터뜨리기 전에도 <워크래프트 2>, <디아블로> 같은 히트작을 꾸준히 쌓았잖아.”
“그건 그렇지.”
“너무 한방에 모든 걸 이루려고 할 필요 없어. 지금 속도도 우린 충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황제국은 혹시라도 손해를 볼까 걱정하는 오종석을 달랬다. 그는 사실 아직 밝히지 않은 전략이 있었다.
<영건 블러드>와 확장판이 나오고 시간이 3~4년 정도 흐르면 <영건 블러드>를 온라인 멀티 플레이만 무료 게임으로 전환할 생각이었다. 그의 기대대로 <영건 블러드>가 한국과 미국에서 수백만 장이 넘게 팔리고, 계속해서 멀티 플레이를 즐기는 게임이 되면 큰돈을 벌 수는 있지만 <영건 블러드>가 네트워크에 부담으로 남게 된다.
‘적절한 때를 봐서 <영건 블러드>를 무료 게임으로 전환하자. 그리고 부분 유료화를 추진하자.’
2000년대 초반이면 부분 유료화 BM을 사람들이 충분히 접할 만한 시기다. <영건 블러드>를 구매한 사람들도 시간이 상당히 지났기 때문에 무료화 돼도 반발이 적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영건 블러드>를 그때까지 계속해서 즐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무료화를 추진하면서 ‘리마스터’ 등의 이름으로 그래픽을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어야 한다. 패키지 게임을 몇 년 후에 무료 온라인 게임으로 바꾸는 작업은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영건 블러드>가 대성공을 거두면, 아이러니하게 그만큼 뉴퀘스트에게는 나중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황제국은 이 점을 잊지 않고 게임의 미래 전략에 무료화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무료 게임과 부분 유료화 BM 얘기를 꺼내기에는 아직 한국에서 인터넷은 이제 걸음마를 떼는 수준이었다. 가정에서도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한 ADSL/VDSL이 이제 곧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뉴퀘스트 사람들이 인터넷의 중요성을 황제국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고 해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까.’
황제국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시대를 몇 발 앞서나간 개척자 중에는 오히려 성공의 때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사례가 더 많았다. 준비만 하고 있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흐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게 최상이었다. 그날을 위해 지금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럼 이제 만주에 왜 미국인, 유럽인들이 등장하는지 풀어야겠네요.”
“그래야겠지?”
“이런 건 어때요?”
황제국이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만주에서 금광 개발 러쉬가 시작되는 거예요. 고화력 석탄을 찾으려고 만주를 파헤치던 사람 중에 금맥을 발견하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서구 열강이 금광 이권 개발을 노리고 들어온다?”
“그렇죠. 만주의 이권을 틀어쥔 일본 관동팔군은 주요 금광은 꽉 틀어쥐고 있지만 그걸 혼자 다 먹을 수는 없어요. 만주는 너무 커서 다 커버할 수도 없죠. 그래서 작은 금광은 쪼개서 팔아요. 하지만 절대로 팔지 않는 구역들이 있어요.”
“아! 그럼 거기에 바로?”
“네, 그 구역 중 하나에 비밀 연구소가 있는 거죠.”
“그거네! 그걸 열쇠로 찾아가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 유럽인 사업가도 만나고. 흑인은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니까 사업가는 좀 무리니까 사설 경호원 정도로 설정하면 되겠다.”
전유진이 신이 나서 혼자 손뼉을 쳤다. <영건 블러드> 메인 캐릭터와 핵심 설정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제 기존 멤버가 확장판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퀘스트넷 콘텐츠 전담 인력을 채용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