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회 - 달러 러쉬
<젤리 러쉬> 정식 출시를 위해 하워드가 미국에 입국했다. 그는 기나긴 입국 과정을 설명하며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짜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검색대 앞에 줄은 만리장성이지. 캐리어고 백팩이고 파우치고 잠겨있는 건 죄다 열어서 파헤치지. 비행기 한 번 타고 내리기가 이렇게 힘들어지다니.”
“고생했어요. 지금 때가 때니까 어쩔 수 없죠.”
아직 9.11 테러가 일어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비행기를 납치해 테러가 일어난 만큼, 보안 검색이 강화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워드는 젤리 러쉬 라이브팀과 인사하고 황제국와 상황을 살폈다. 젤리 러쉬 라이브팀은 같은 건물 다른 층에 공간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젤리 러쉬 라이브팀은 영건 블러드 라이브팀에 비해 콘텐츠 제작 인력이 많았다. 신규 맵과 캐릭터 디자인 등 콘텐츠 업데이트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오~, 역시나 상황이 꽤 좋은데요?”
<젤리 러쉬> 관련 지표를 자세히 살피며 하워드가 감탄했다. OBT 오픈 후 약 한 달 동안, <젤리 러쉬>는 3백만 명 가까운 회원을 모았다. 동접자는 30~40만 사이를 기록 중이었다.
“미국의 인터넷 사용률이 이제 거의 50%에 육박하니까요. 미국 인구가 대충 2억 8천만 명 정도라고 보면 잠재 고객이 1억 4천만은 되는 셈이죠.”
“300만 회원이라고 해도 인구의 고작 2%. 역시 시장 사이즈가 깡패죠.”
“맞아요. 그래서 아직 성장 여력도 충분해요.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올해 최소한 5백만 찍고 2002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휘우~~!”
하워드가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더니 손으로 돈을 만지는 제스처를 했다. 인구 4,700만의 한국과 인구 2억 8천만의 미국은 인구 상으로만 사이즈가 6배 차이가 났다.
그렇지만 한국 역시 인터넷 게임에서는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2000년 들어 PC방 매출은 드디어 1조원을 넘었고, 인터넷 게임 매출도 거의 2천억원에 육박할 만큼 성장했다.
황제국이 기억하는 2001년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 규모는 92억 달러 정도. 환율 1,200원을 적용하면 약 11조원 정도가 된다. 한국의 비디오 게임 시장 성장세가 엄청나긴 하지만 아직 전 세계 최고의 비디오 게임 시장인 미국과는 체급 차이가 컸다.
한국에서 <젤리 러쉬>가 회원 186만 명을 확보한 상태에서 첫날 10억, 3일 동안 35억을 벌어들였다. 미국이라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3일 동안 40억 정도는 충분히 기대해볼 만했다. 그것만 해도 미화로 3백만 달러가 넘었다.
2000년에는 CES에서 인터뷰 후 매출 7백만 달러를 기록했다고 화제가 됐었다. <영건 블러드> 출시 후 석 달 간의 누적 기록이었는데, <젤리 러쉬>는 넉넉히 2주 정도면 당시 <영건 블러드> 매출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관건은 미국 게이머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부분 유료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였다. 우선 뉴퀘스트는 게임 내 화폐인 젤리를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부터 나섰다. 한국에서 금융 벤처 PG사와 손을 잡았듯, 미국에서도 온라인 결제 시스템을 제공해 줄 기업이 필요했다.
황제국이 찾아간 기업은 페이팔(Paypal)이었다. 페이팔은 피터 틸(Peter Thiel) 등이 공동창업한 컨피니티(Confinity)와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창업한 엑스닷컴(X.com)이 합병하면서 시작했다. 이메일 주소만으로 온라인 송금이 가능한 혁신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 페이팔은 곧 온라인 결제 시스템도 제공했다.
페이팔 본사도 실리콘 밸리에 있었다. 황제국은 만약 그가 미국 오피스를 처음 계획대로 애쉬번에 세웠다면 어땠을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크레이그리스트부터 시작해서 소프트펀드, 야후, 픽사, 페이팔까지 성공에 꼭 필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모두 실리콘 밸리 근처에 있었다. 만약 비용을 아끼겠다고 애쉬번에 정착했다면 뉴퀘스트는 여전히 미국에서 이름 없는 중소 게임사로 남아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랬다면 여전히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만든 한국에서의 인지도와 이미지도 없고, 당연히 황제국 특별법도 없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사업과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면 황제국은 아찔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황제국은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페이팔 본사에 도착했다. 황제국과 하워드는 피터 틸, 일론 머스크를 만났다. 황제국은 페이팔에 원하는 바를 설명했다. 틸과 머스크는 게임보다도 부분 유료화 BM에 흥미를 보였다.
“그러니까 매달 일정 금액을 정기 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게임을 무료로 할 수 있게 해주면서 캐릭터 외형만 판매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매출도 아주 높다구요?”
“네, 한국에서 이미 검증된 방식입니다. 물론 절대 돈을 쓰지 않는 게이머도 많습니다. 그래서 모수를 최대한 늘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흥미롭네요. 저도 비디오 게임에 환장했던 적이 있는데 이런 BM은 처음 봅니다. 그러니까 게임 안에서 온라인 쇼핑몰처럼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걸 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죠? 페이팔에 잘 오셨습니다. 우린 완벽한 파트너가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황제국은 페이팔과 결제 시스템 제공 계약을 맺기로 했다. 미팅을 마치고 황제국은 일론 머스크에게 슬쩍 다가가 물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페이팔 하나로 만족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혹시 페이팔 말고도 다른 창업 계획이 있나요?”
“글쎄요. 아직은 모르죠. 자동차도 정말 좋아하긴 하는데, 지금은 페이팔에 집중하고 있어요. 혹시 스포츠카 좋아합니까? 난 세상에서 빠른 스포츠카가 제일 섹시하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슈퍼카를 좋아하는 사람을 한 명 알죠. 혹시 나중에 자동차 회사를 창업하거든 저한테 꼭 연락 주세요. 제가 초기 투자하겠습니다.”
“그레이트! 오늘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내일은 창업자와 투자자가 되는 거죠. 미스터 황, 당신도 다른 회사를 창업하거든 연락해요. 내가 백만 달러 꽂아 넣고 시작할 테니까, 하하하!”
일론 머스크가 고급 시거를 피우며 유쾌하게 웃었다. 황제국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팔은 얼마 후 이베이에 팔리고, 지금 미팅룸에 있는 페이팔 이사진들은 모두 억만장자가 된다. 그리고 몇 년 후, 머스크는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꿀 전기차 기업을 창업하게 된다.
황제국은 미래의 억만장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인터넷 비즈니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 생에는 이런 자리가 생겨도 IT 거물들 앞에서 떨려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국은 손정인에게 투자를 받고 실리콘 밸리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CES, E3 등을 거치며 업계의 거물도 여럿 만났다.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시 팔로 알토로 돌아온 하워드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판매용 패션 아이템에 그레이드를 적용하고 젤리 가격을 정했다. 기본적인 젤리 구매 시스템은 한국과 비슷하게 설정했다.
미국에서는 젤리 여덟 개를 묶어 0.99$에 판매하기로 했다. 젤리 하나당 12센트, 한화로는 약 150원 정도에 해당했다.
결제 최소 단위 역시 0.99$. 젤리는 여덟 개, 열여섯 개 등 묶음 단위로만 팔 계획이었다. 만약 젤리 열 개짜리 패션 아이템을 사려면 젤리 열여섯 개를 사야 한다. 그러면 애매하게 젤리 여섯 개가 남고, 그냥 두기엔 아까우니 조금 더 질러서 또 다른 패션 아이템을 사게 만드는 구조였다.
“여기서도?”
“당연히 안 됩니다, 하워드.”
하워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능력치를 강화하는 유료 아이템 판매를 물어보았지만 황제국은 역시 단번에 거절했다. 물론 한국에서 안 하다고 미국에서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글로벌 서비스는 나라마다 게이머 성향과 문화에 맞춰 운영이나 콘텐츠에 변화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쓸수록 강해지고, 결국엔 돈을 쓰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 방식은 황제국이 추구하는 게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에서 부분 유료화를 향한 준비가 차곡차곡 이루어졌다. 황제국은 여러 게임 매체와 인터뷰하며 부분 유료화 BM을 설명했다. 정식 오픈 이후, 게이머들이 혼란이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미국은 종이 잡지 외에 인터넷 게임 매체도 상당히 늘어났다. 인터넷 매체는 인터뷰 후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후에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댓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여론을 살피기에도 좋았다.
홍보대행사는 매주 인터넷 매체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젤리 러쉬>에 관한 반응을 모니터링해 보고했다. 로렌스는 특히 BM 관련 부정적인 여론이 없는지 살폈다. 대부분은 BM이 이상하다는 반응보다는 정식 오픈 후에도 공짜로 게임을 할 수 있어 좋다는 반응이었다.
- 뭐지? 뉴퀘스트 얘네들 바보야? 이걸 그냥 공짜로 풀어주면 누가 돈 내고 해?
-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도 매출이 잘 나온다고 하던데?
- 왜? 나도 매달 1달러 정도는 써 줄 마음이 있어.
- 솔직히 99%는 공짜로 할걸? 나머지 1%가 돈 엄청 써주길 비는 수밖에.
- 결국 정액제 하게 될 거야. 이걸로 내기해도 좋아.
- 할로윈 맵 돈 내고 하라고 하면 난 할 거 같은데. 그거 다시 살려주지.
- 맞아. 그거 진짜 재밌었어. 하다가 박쥐 튀어나오면 깜짝 놀라고 그랬는데.
- 난 그때 그 해골 젤로 너무 갖고 싶어. 정식 출시하면 다시 나오려나. 할로윈 주간 끝나고 사라져서 너무 슬펐어 ;-<
- 난 가족들이랑 <젤리 러쉬> 엄청 즐겨하는데. 아무도 돈 안 내서 이 게임 망하면 어떡하지? 그럼 서비스 접나?
- 이거 동접자 많아서 회선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돈 안 되면 접지 않을까?
- 안 되는데! 나라도 첫날에 돈 좀 써야겠다. 이 게임 너무 소중해.
- 맞아. 온통 총질하고, 칼질하고 싸우는 게임뿐인데.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게임 꼭 필요해. 나도 오픈 첫날에 힘내라고 돈 좀 보태줘야겠다.
- 설마 진짜 망하나? 우리 애기들도 엄청 좋아하는 게임인데?
- 노노노노! 힘내라 <젤리 러쉬>! 망하지 마~~!
- 나도 용돈 보탤게. 제발 망하지 마!!!!
- 내가 망하게 두지 않을 거야!
아무도 <젤리 러쉬>에 돈 쓰겠다는 사람이 없자 게이머들은 <젤리 러쉬>가 BM 때문에 망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터넷에서 <젤리 러쉬>가 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자는 움직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황제국 인터뷰나 게임 커뮤니티에는 댓글창마다 ‘망하지 마! 젤리 러쉬’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몇 명이 울면서 달던 댓글이 조금 지나자 유행이 되서 수십 명씩 똑같은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이거 고마우면서도 좀 당황스럽네요.”
“한국에서도 부분 유료화한다고 할 때 좋지 않은 여론은 있었어요. 여기선 오히려 게임 팬들이 도와주려고 하니까 도리어 좋은 거 같은데요?”
황제국도 황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여론의 방향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부분 유료화 게임에서 돈을 쓰지 않는 유저는 늘 있기 마련이고, 그 수가 다수이기 때문에 모니터링을 하면 여론에 많이 잡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식 오픈 직전, 이런 여론에 휘둘리면 직원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갑자기 <젤리 러쉬> 팬들이 게임이 망하지 않도록 돕겠다고 나서주니 황제국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2001년 11월 21일.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수요일, <젤리 러쉬>의 정식 오픈 예정일이었다. 10월 초에 OBT 오픈하고 한 달 반, 황제국이 <젤리 러쉬> 출시를 위해 미국에 온 지는 석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에도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 주신 여러분들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젤리 러쉬>는 보다 많은 게이머에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성별, 게임 경험이나 실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에서도 정식 오픈을 하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정식 오픈에 앞서 황제국이 미국 오피스 전 직원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황제국은 미국 오피스에서 작은 런칭쇼를 마련했다. 샌디가 OPEN이라고 적힌 빨간 버튼을 구해 왔고, 전용선은 이를 퀘스트넷에 연결했다.
황제국은 젤리 러쉬 라이브팀 멤버들을 앞으로 불렀다. 게임 오픈 직전 모두 함께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시간이 다가오자 전 직원이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삐이이이이이이잉-!
황제국과 라이브팀이 힘차게 오픈 버튼을 누르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젤리 러쉬> 서버가 열렸다. 직원들은 준비해온 폭죽을 터뜨리고 박수를 치며 게임의 정식 오픈을 축하했다. 황제국이 런칭 축하 케이크를 잘라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케이크에 샴페인을 마시며 신작 런칭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제 모두의 눈은 퀘스트넷 모니터링 모니터로 향했다. 정식 오픈 준비를 위해 잠시 닫혔던 서버가 다시 열리자 동접자 그래프가 폭증했다.
황제국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영건 블러드>를 런칭할 때만 해도 동접자가 1만 명만 넘어도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제는 10만 명을 찍고 올라가도 담담해졌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초심을 잃어선 안 돼.’
그는 지난 인생과 처음으로 되돌아온 98년 1월을 떠올렸다. 지금이 바로 그가 언제나 꿈꿔왔던 장면이었다. 황제국은 게이머들이 듣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슬슬 반응이 오는데요?”
하워드가 결제 지표 모니터링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페이팔이 개발한 간편 결제 시스템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게임 내 화폐인 젤리를 구매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만 개 이상의 디지털 젤리가 팔려나갔다.
“사람들이 진짜 우리가 망할까 봐 걱정되서 첫날부터 몰려와 결제하는 걸까요?”
“모르죠. 어쨌든 우리가 망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황제국이 모니터링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픈 첫날, 황제국은 밤늦도록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오전 11시에 오픈한 <젤리 러쉬>는 12시간이 지날 무렵, 젤리 구매액이 2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머니 러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