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 v0.99
개학 하루 전날, 세 사람은 황제국 집에 모였다. 그동안은 주로 패스트푸드 점에서 모였는데, 오늘은 학교에 게임을 배포하기 전 최종 빌드를 점검하는 날이다.
두 사람은 아직 전체 게임이 어떤 모습인지 몰랐다. 전체 볼륨이 큰 게임은 아니지만, 황제국은 현재 인력에서 각자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쪼개서 일을 맡겼다.
오종석은 오직 조조 편의 오소 추격전을 비롯한 게임 스테이지만 알고 있었다. 차현주는 황제국이 흑백으로 프린트한 그림을 보았을 뿐, 화면으로 본 적이 없었다. 오종석이 먼저 도착했다.
“와, 드디어 완성작을 해보겠네.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잖아. 내 조조 스테이지 많이 살아남았어?”
“기다려 봐. 현주 오면 보여줄게.”
“근데 내가 한 거 진짜 괜찮아? 제국이 네가 하라는 대로 거의 고치긴 했는데.”
“걱정 마. 게임은 처음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만약 조조 때문에 게임 밸런스가 무너지면 그건 내가 디렉팅을 잘못해서 그런 거지, 종석이 네 잘못이 아냐.”
오종석은 게임을 확인하기 전에 조바심과 불안함이 뒤섞여 안절부절못했다. 황제국은 그런 오종석을 보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도 옛날에 빌드를 평가하는 날이면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곤 했다.
황제국이 오종석을 다독여 주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리더니 차현주가 도착했다. 황제국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여자 손님이 찾아오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제국이, 친구라고?”
“네, 안녕하세요. 차현주라고 합니다.”
차현주가 후드를 내리고 공손하게 인사드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와 방문을 닫자 다시 후드를 눌러 쓰고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오종석이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어른들 앞에서만 살랑~살랑~ 곰살맞게 굴기는.”
“오자마자 시비 털래? 중요한 날에 조무래기는 조용히 있어라. 제국아, 준비 끝났어?”
“응, 거의.”
황제국이 컴퓨터 앞에 앉아 [공성전] 폴더를 열자 두 사람은 입을 닫고 화면에 집중했다. 황제국이 게임을 실행시켰다. 오종석이 긴장했는지 두 손을 비비고, 차현주는 안경을 끌어 올렸다.
둥-! 둥-! 북소리가 들리며 어두운 화면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병사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차현주가 처음 그렸던 그림을 타이틀용으로 다시 그린 이미지였다. 보병, 창병, 궁수, 기병, 쇠뇌 등 병과의 모습이 빠짐없이 있고, 동작과 표정에서 전투의 긴장감과 생동감이 흘러나왔다.
“오왕, 내 그림이 이렇게 바뀐 거야?”
차현주가 오종석을 밀치고 화면에 거의 들어갈 듯 모니터를 차지하고 바라봤다.
“해상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일부 디테일은 살리지 못하고 날렸어. 그래도 꽤 비슷하지?”
“오히려 그림이 심플해지니까 동작이 눈에 확 들어오고 좋은데? 와, 여기 표정 살린 거 봐, 대박!”
“거긴 확대해서 도트(dot, 점) 찍느라 고생 좀 했지. 눈 빠지는 줄.”
“그림 스타일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아, 그림자는 이렇게.”
“맘에 들어?”
“응, 완전 신기해.”
“다행이네.”
차현주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래픽 이미지를 하나하나 뜯어봤다. 오종석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국이 흐뭇하게 웃으며 스페이스 바를 치자 이미지가 천천히 사라지며 [삼국지:공성전]이라는 타이틀 로고가 떴다.
“어? 내 이름 있다! 내 이름!”
“크흐, 크레딧에 내 이름이 뜨다니, 완전 감동!”
타이틀 로고 아래, 두 줄의 크레딧이 나왔다.
[ title image(타이틀 이미지) by 차현주 ]
[ level design(레벨 디자인) by 황제국, 오종석 ]
그리고 다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 created by 황제국 ]이라는 텍스트가 떴다.
“크으···, 저 말은 언제 봐도 멋있어. 크리에이티드 바이 황제국. 진짜 게임 개발자 포스가 막 느껴진다니까? 부럽다, 황제국. 역시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해!”
오종석이 감명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틀 이미지 하나가 제대로 들어간 것만으로도 시작할 때 느낌이 전혀 달랐다. 오종석은 그제야 왜 황제국이 차현주를 영입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 군주를 선택하는 화면으로 넘어갔다. 텍스트로만 유비, 조조, 손권이 표기됐던 프로토타입과 달리 화면을 셋으로 나누고, 각 군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와~, 화면 꽉 채운 초상화가 들어가니까 박력 넘치네. 차현주가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악!”
오종석이 혼잣말을 하다 차현주가 팔을 꼬집자 비명을 질렀다. 황제국이 마우스를 움직여 조조를 선택했다.
“종석이가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먼저 조조부터 해볼까?”
황제국이 조조를 클릭하자 유비와 손권의 초상화가 흑백으로 바뀌고, 조조 초상화의 배경이 움직였다. 작은 애니메이션 효과지만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연출이었다. 오종석과 차현주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이거, 움직이는 거? 이것도 네가 한 거야?”
“응, 노가다를 좀 했지만.”
차현주는 애니메이션 효과를 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국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컴퓨터 그래픽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조를 선택하자 시나리오가 짧게 나타나고, <삼국지:공성전>판 관도대전이 시작했다. 황제국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밋밋한 황야였던 전투맵이 풍성해지고, 허수아비였던 유닛들이 리얼하게 보였다. 그는 능숙하게 초반부를 통과하고, 곧 공성전을 시작했다.
“어? 이게 뭐야?”
긴장하며 지켜보면 오종석은 공성전 시작 장면에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황제국이 병사 배치를 마치자, 원소 군대가 투석기를 설치하더니 성에 바위를 던졌다. 조조의 군대는 시작하자마자 죽거나, 체력이 줄었고, 성벽에는 금이 갔다. 그리고 원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성전 요소를 조금 바꿨어. 공격군이 일정 시간마다 이렇게 투석기 공격을 할 거야. 수비는 최소 3%에서 최대 20%까지 피해를 입어. 랜덤으로.”
“20%라고? 우씨, 살벌한데? 근데 더 진짜 같고 재밌겠다.”
오종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소군의 공격으로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황제국은 위기의 순간마다 바위 떨어뜨리기와 불화살 등 특수 공격으로 벗어나며 원소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이어서 오소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게임을 지켜보았다. 황제국의 기마 부대가 오소를 급습하고, 군량을 지키는 순우경의 군대를 포착했다. 순우경을 추격하자 곧 길에 매복해있던 방어 부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국은 이를 어렵지 않고 격퇴하고, 기병 일부를 활을 쏘는 기병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첫 전투가 끝나자 순우경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한 원소의 기마 부대가 도착했다. 황제국은 자원을 분배하고, 부대를 나눠서 원소의 지원군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순우경을 뒤쫓았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한쪽에서는 추격을 하고, 한쪽에서는 추격을 당했다. 군대를 소환하고,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자원은 빠듯했다. 맵을 꿰고 있는 황제국은 절묘하게 자원을 나눠 수비하면서 공격했다.
그런데도 원소의 지원군은 강하고 빨랐다. 다섯 번째 맵까지 이동하자 원소의 기마부대가 꽁무니까지 쫓아왔다. 오종석이 손바닥을 바지에 닦으며 말했다.
“야, 잡히겠는데? 원소 기마대 왤케 쎄냐?”
“당연하지. 지금 원소 기병이 조조 기병보다 1.2배쯤 빠를 거야.”
“엥? 같은 기병에도 이속(이동속도)에 차이를 뒀다고?”
“응, 게임이 난이도를 알아서 조절해. 너가 제안했던 거잖아?”
“아니, 속도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지!”
황제국은 게임을 하며 겉으로는 침착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속으로는 약간 쫄렸다. 그는 어젯밤 몇 번이나 오소 추격전을 해보면서 밸런스를 조절했다. 특히 플레이어가 게임을 잘 할수록 원소 군대에 버프(buff, 능력 강화 효과)를 주도록 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무리 능숙해도 원소의 기마부대를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황제국 생각에 이 게임의 가장 큰 단점은 스테이지가 적어 플레이타임이 짧고, 한 번 클리어 하면 굳이 또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군주가 셋이니 세 번은 하겠지만 그 이상 플레이어를 끌어들일 요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플레이어 수준에 따라 자동으로 변하는 난이도를 선택했다.
“으아~, 어떡해?! 어떡해?! 잡히겠어!”
“걱정 마! 어림없지!”
차현주가 소리 지르자 황제국은 공격 중이던 기병 몇을 뒤로 돌려 원소 지원병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원소의 기병에게 따라잡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순우경의 부대를 붙잡았다.
그러자 순우경 부대의 군량 수레가 불에 타더니 클리어 메시지가 떴다. 조조 시나리오가 모두 끝났다. 차현주가 뒤에서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세 사람은 돌아가며 유비와 손권도 플레이했다. 차현주가 유비를 맡아 한중 전투를, 오종석이 손권이 되어 이릉대전을 플레이했다.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플레이했고, 세 군주의 엔딩씬을 모두 보았다.
“후아···!”
최종 빌드 시연은 성공적이었다. 오종석은 게임을 끝내고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그는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계속 긴장 상태였다. 이제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뿌듯함이 올라왔다.
시연을 마치자 황제국은 서랍에서 CD-ROM 2장과 플로피디스크 두 세트를 꺼냈다. 그리고 오종석과 차현주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받아. <삼국지:공성전> v0.99 오리지널 카피야. 딱, 세 세트 만들어서 너희한테 하나씩 주는 거야. 같이 게임 만들어 준 보답이야.”
“야, 황제국! 뭘 이렇게···!”
“어···, 고마운데 난 이게 있어도 쓸 수가 없는데.”
오리지널 카피를 받은 오종석은 감동을 숨기지 않았고, 차현주는 당황했다. 그녀는 집에 컴퓨터가 아직 없었다.
“이제 곧 쓸 수 있을 거야. 너 컴퓨터 그래픽 안 배울거야? 집에 컴퓨터 한 대 없이 배울 수 있겠어?”
“아! 하긴 그렇네?”
차현주도 그제야 웃으며 가방에 게임을 챙겨 넣었다. 오종석도 오리지널 카피를 챙기고 외쳤다.
“나가자! 이런 날은 가만 있을 수 없지! 우리의 첫 게임을 끝낸 기념으로 파티하자!”
“오, 오종종. 어디 근사한 술집이라도 알아?”
“야, 우리 그래도 아직 고등학생이야. 난 그냥 케이준 감자튀김 먹자고 한 건데.”
“으이구, 너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
“늘 가던 팟파이스 가자. 거기서 시작했으니까 쫑파티도 거기가 어울려.”
황제국이 오종석 편을 들면서 외투를 챙겨 들었다. 차현주는 혀를 차면서도 두 사람을 쫓아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모두 수고 많았어. 솔직히 너희가 이만큼 열심히 따라와 줄 줄 몰랐어. 덕분에 게임이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완성도 있게 나왔다. 자, 게임의 완성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짠~!!!”
황제국이 콜라를 들자 두 사람도 콜라를 들어 술잔처럼 건배했다. 그리고 발골사처럼 치킨을 뼈만 남기고 남김없이 뜯어 먹었다. 신나게 먹다가 오종석이 물었다.
“근데, 제국아. 이제 개발은 다 끝난 거 아냐? 왜 버전이 1.0이 아니라 0.99야?”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았거든.”
“마지막 관문?”
“응, QA(Quality Assurance, 소프트웨어 품질 테스트 및 관리)랑 디버깅(debugging, 오류 수정).”
황제국은 QA와 디버깅에 대해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차현주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아까 끝까지 다 해봤잖아? 그럼 완벽하게 작동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렇지 않아.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거든. 아무리 코딩을 잘했어도 오류는 있기 마련이야. 그래서 출시하기 전에 꼭 여러 명이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을 하면서 버그를 찾아야 해.”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 거야? 난 아직 컴퓨터도 없는데?”
“아니, 우리가 직접 할 필요 없어.”
“그럼?”
“지금 한창 시간 많고, 심심해 미칠 지경인 녀석들을 동원해야지.”
“어디서? 아아아···! 설마?!”
오종석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황제국을 바라봤다. 황제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학교 가면 할 일없는 고3이 오백 명쯤 있잖아. 모두 우리 게임 베타 테스터가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