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회 - 온라인 데모
네트워크 플레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황제국은 즉시 전용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딸깍.
“여보세-.”
타다다당!
“어?”
황제국은 황당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황제국이 인사말도 끝내기 전에 전용선이 그를 죽여 버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용선의 숨넘어갈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용선은 무기고를 돌며 황제국을 찾아다녔다. 그가 황제국을 발견하는 순간, 황제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이진수에게 윙크를 한 번 하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황제국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이걸로 밤샌 고생 스트레스 다 풀렸다. 퀘스트넷 죽이네, 이거.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진짜 환상이야.”
“이제 다른 맵에서도 잘 돌아가는지 확인해요. 이제부터는 저도 안 봐 드립니다.”
“크크크, 그래. 얼마든지.”
동이 터오는 새벽녘, 뉴퀘스트 동방과 랩실 사이에서 맵과 게임 모드, 캐릭터를 계속 바꿔가며 황제국과 전용선의 치열한 1대1이 벌어졌다. 약 한 시간의 테스트 결과, 그들은 퀘스트넷이 문제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단 문제없네요.”
“응, 하지만 아직 모르지. 테스트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해. 우리는 지금 환경이 너무 좋잖아.”
테스트를 마친 전용선이 말했다. 황제국 역시 동의했다. 콘솔 게임과 달리 PC 게임은 게이머마다 PC가 천차만별이다. 또한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연결하는 시대라 회선 속도도 집집마다 차이가 컸다.
온라인 게임은 출시 전 반드시 ‘스트레스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서버가 과연 얼마나 많은 동접자를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사전에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클로즈베타(Closed Beta, 초청된 소수만으로 진행하는 테스트)-오픈베타(Open Beta,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테스트)로 이어지는 검증 단계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였다. 더욱이 <영건 블러드>는 패키지 게임이라 온라인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기는 무리였다.
“어떻게 생각한 방식이라도 있어? 테스트할 사람 돈 주고 불러 모으면 가능은 할 텐데.”
“아뇨. 그러면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우리가 게임 환경도 제공해야 하니까 비효율적이에요.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기도 힘들구요.”
“그럼 어떻게?”
“데모를 뿌리려구요. 온라인 게임에서 일부만 가능한 버전으로. 일단 우리 학교부터요.”
황제국은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었다. 이제부터는 게임을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야 할 때였다. 황제국은 자체적으로 클로즈베타와 오픈베타 실행 계획을 세웠다. 우선 클로즈베타는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황제국은 곧장 온라인 데모 버전 제작에 착수했다. 온라인 플레이만 가능한 버전으로 맵은 무기고와 비행선을 비롯한 다섯 개, 캐릭터는 장건, 이록, 황산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게임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줄이고 줄여서 압축까지 해도 1.44MB 플로피디스크로는 10장이 넘었다. 황제국은 데모 게임을 여럿 복사해 제일 먼저 컴공과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에 가장 익숙한 부류 중 하나였다.
“이게 제국이 너랑 바이너리 선배가 만든 게임이란 말야?”
“응, 온라인 FPS 게임이니까 인터넷에 접속해서 해야 해.”
“오~~, 인터넷 게임이야? 기대되는데?”
만약 다른 사람들이면 “인터넷이 뭐야?” 혹은 “인터넷에 어떻게 접속해?” 부터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컴공과 친구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데모니까 인터넷 가능한 친구면 얼마든지 복사해 줘. 대신 컴퓨터 사양은 좀 높아야 해. 그리고 혹시 기숙사 사는 친구 아는 사람 있어?”
S대 기숙사에는 1학기부터 시범적으로 인터넷이 들어와 있었다. 학생들이 하도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스타크래프트>를 해서 기숙사에서는 게임을 금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기숙사도 <영건 블러드> 데모를 돌릴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데모 게임을 하려고 로비에 들어갔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으면 꽝이었다. 아무리 학교에서 일종의 클로즈베타를 실행한다고 해도 더 많은 사용자를 확보해야 했다. 황제국은 오종석과 학교 인근 PC방을 찾았다.
“학생들이 만든 게임이라고? 흐음······.”
PC방 주인은 이름도 없는 회사, 그것도 학생들이 만든 게임을 설치하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는 망설였다. 혹시 바이러스라도 걸리면 낭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국과 오종석은 주인을 끈질기게 설득해 PC방을 찾아다니며 데모 게임을 설치했다. 집 근처 예전 단골 PC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 어서들 와.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예전보다 PC가 많이 늘었네요?”
“응, 그때 말 듣길 잘했지. 요즘은 저녁마다 자리가 없어서 손님들이 기다린다니까? 허허허!”
한때 PC방 접고 당구장으로 전업을 고민했던 주인은 다행히 황제국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PC방 카운터 뒤 선반에는 <스타크래프트> 패키지가 PC 개수대로 쭉 늘어서 있었다.
황제국은 잠시 선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종석이 황제국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저기에 우리 게임이 쫙 꽂혀 있는 거 상상했지?”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랬거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단골 PC방 아저씨는 황제국의 요청을 군말 없이 받아 주었다.
“그래, 그 정도야. 일단 사람 없는 자리에 설치하고, 설치 디스크는 놔두고 가. 빈자리는 알바시켜서 설치해 놓을 테니까. 사람들 오면 해보라고 말도 해주고.”
“고맙습니다!”
학교와 근처 PC방에 온라인 데모를 뿌린 황제국은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학교를 베이스로 클로즈베타를 한다면, 다음에는 전국을 대상으로 오픈베타가 필요했다.
그는 PC 게이머에 연락해 PC 게이머 10월호 번들 CD에 <영건 블러드> 온라인 데모 버전을 넣고 싶다고 전했다. 9월호에 인터뷰 기사가 뜨거운 반응을 보인 만큼, PC 게이머 입장에서도 대환영이었다.
황제국은 낮에는 오종석과 PC방에 게임을 배포했고, 저녁이면 동방에 돌아와 번들용 데모를 만들었다. 번들 데모는 CD에 담아 배포하는 만큼 용량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그는 싱글 플레이 튜토리얼을 번들 버전에 포함하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굴러갔다.
전용선은 회원 가입 없이도 온라인 데모를 할 수 있도록 마스터 DB에서 데모용 DB를 따로 분리했다. 데모 버전은 매칭 알고리즘도 손봤다. 상대 전적에 상관없이 랜덤으로 매칭되도록 단순하게 변경했다.
본격적으로 교내에 데모를 유포하고 나서 전용선은 몇 시간 단위로 황제국에게 접속 현황을 문자로 알렸다. 처음 며칠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들어왔다. 그들은 매칭할 상대가 없으면 사격장에서 놀다가 나갔다.
“안 되겠다. 나라도 공강 시간마다 게임을 해야겠어.”
상황을 본 차현주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뉴퀘스트 멤버들은 시간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퀘스트넷에 접속해 사람들과 게임을 플레이했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 손님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퀘스트넷에 조금씩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당 동접자는 아직 30~50명 수준이었지만 이제 외부인들이 퀘스트넷 서버를 통해 <영건 블러드>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전용선은 서버 상황을 체크하면서 사람들의 게임 로그를 확인했다. 로비까지 왔다가 한 번도 안 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일단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최소 30분 이상 게임을 하고 나갔다.
그들은 사람이 없으면 로비에서 몇 분씩 기다리기 일쑤였다. <영건 블러드>를 맛본 게이머들은 매칭될 사람이 올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초반에는 대부분 1대1이었지만, 점차 2:2, 3:3 섬멸전도 늘어났다. 고무적인 신호였다.
- 안녕하세요, 황제국입니다.
- 진짜요? 게오동 리척?
- 어? 제국이야? 나 형규. 학교서도 못 보는데 여기서 보네 ㅋㅋㅋ.
- 설마 진짜 이 게임 만든 분?
- 진짜 재밌어요!
- 이겜 언제 정식으로 출시해요?
- 와, 황제국이다!!!!!
- 정식판은 캐릭 몇 명이에요???
- 여캐 있어요? 있겠죠? 있는 거죠?
- 사람 없을 때 심심해요ㅠ_ㅠ 컴퓨터랑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줘요.
- 배틀넷처럼 따로 채널 만들어줘요. 여기 넘 씨끌d-_-b
황제국도 틈틈히 퀘스트넷에 접속했다. 그가 로비에서 인사를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반겼다. 그는 사람들과 게임 만큼이나 채팅도 즐겼다. 인터넷에 접속해 온라인 데모에 들어올 정도면 게임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황제국은 사람들과 게임을 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적용할 수 있는 건 바로 실행했다. 가장 먼저 혼자 놀고 싶을 때, 혹은 승부에 부담 없이 하고 싶을 때 컴퓨터와 싸울 수 있는 AI 모드를 만들었다. 아직 퀘스트 엔진의 AI 수준은 상당히 낮았다. 렌더링, 애니메이션, 특수 효과 등에 치중하느라 AI는 뒷순위였다.
황제국은 몇 번 1대1로 AI와 싸워봤지만 너무 쉬웠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AI 모드에 10초마다 새로운 AI 적이 나오게 했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AI가 계속 불어나 결국 포위당하고 만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적인 대신, 숫자를 엄청나게 늘려서 긴장감을 주었다.
“해보자. 어차피 데모잖아.”
그가 새로운 모드를 만들면 전용선이 잠깐 살펴보고 바로 서버에 업데이트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했다. 생각나면 바로 만들어 업데이트하고, 반응이 없으면 바로바로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누구에게 보고할 필요도, 긴 회의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재미있어 보이면 바로 만들고, 바로 실행했다. AI 모드는 사람들이 마치 람보가 된 기분이라면서 좋아했다. 사람들은 AI 모드를 무제한으로 플레이하면서 누가 제일 오래 버티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영건 블러드> 온라인 데모가 조금씩 사용자를 늘려가는 사이, 이진수는 싱글 플레이를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알파 버전에 이어 모든 챕터 내용이 들어간 베타 버전을 만들었다.
“형, 내용이 너무 많지 않아요? 컴공 친구 중에 알바라도 뽑을까요?”
“그럼 엔진 사용법부터 가, 가르쳐야 하는데? 그냥 혼자가 펴, 편해.”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바쁠 때라도 인력 충원은 신중해야 한다. 개발자라고 코딩만 할 줄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일의 맥락을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라도 중간에 투입되어 곧바로 한 사람 몫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력이 있어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런데 중간에 사람을 함부로 투입했다가는 가르치는 데 시간만 더 들어간다. 자칫 그가 큰 실수라도 하면 프로젝트 일정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이진수 성격상 새로운 사람을 뽑아서 손발을 맞추려면 적응 기간이 남들보다 배로 필요했다.
이런 경우는 투입된 사람이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제대로 일을 익힐 시간조차 주지 않고 투입한 관리와 경영 실패에 더 가깝다.
황제국은 일정 관리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게임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프로그래머에게 일이 몰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방학 동안 베타 버전을 완성하지 못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변수였는데,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죄송해요, 형. 다음엔 좀 더 미리미리 대비를 할 게요.”
“괜찮아. 난 이게 편해. 드득.”
이진수는 개의치 않았지만, 황제국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영건 블러드>를 출시하면 새로운 게임 프로그래머를 채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국과 이진수는 하마터면 휴학계를 내는 것까지 놓칠 뻔할 만큼 게임 개발에 매진했다. 그들은 하루를 48시간으로 쓰는 것처럼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한참 개발에 힘쓰고 있을 때, 황제국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윤 변호사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소프트펀드에서 투자 사실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발표가 나면 한국 매체에서도 다루게 될 테고, 인터뷰 요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인터뷰는 어떤 식으로 하게 되나요?”
“제 예상으로는 아마 대부분 전화 인터뷰일 것 같습니다.”
“네, 저도 그쪽이 편한데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윤 변호사의 말대로 일본에서 먼저 투자 사실이 기사화되고, 황제국에게 곧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황제국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휴대폰은 계속 전원을 연결해 충전 중이었고, 나중에는 너무 뜨거워 귀에 대기도 힘들었다.
개발로 하루하루가 바쁜 상황에 인터뷰로 시간을 뺏기는 게 싫긴 했지만, 회사와 게임을 알릴 기회는 적극 활용해야 했다. 한국 메이저 언론사와 각종 경제지의 인터뷰에 응하고, 뉴퀘스트 동방과 멤버들 사진 몇 장을 언론사에 퀵으로 보냈더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다음날, 각 신문사 경제면에 뉴퀘스트의 15억 투자 유치 기사가 실렸다. 신문마다 기사의 양과 배치는 제각각이었지만, 웬만큼 이름 있는 매체에는 빠지지 않고 나왔다. 재일교포 3세이자 IT 투자계의 거인인 손정인의 이름값과 소프트펀드가 선택한 첫 한국 벤처 기업 투자라는 화제성, 여기에 뉴퀘스트가 고작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기업이며 CEO가 대학 1학년이라는 점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 손정인의 소프트펀드, 국내 게임 벤처 기업에 15억 투자 결정.
- 소프트펀드, S대 실험실 벤처 ‘뉴퀘스트’에 15억 투자 발표.
- 창업과 동시에 손정인에게 100억대 기업 인정받은 ‘뉴퀘스트’.
- 승부사 손정인의 과감한 선택, 투자인가 도박인가?
- IT 거인 손정인에게 15억 투자 유치한 대학 신입생 CEO 황제국.
- 벤처 기업 세상 열리나? 소프트펀드 한국 게임 벤처에 15억 투자.
오종석은 투자 기사가 난 신문을 가판대에서 종류별로 싹 쓸어서 동방에 가져왔다. 기사가 나가고 황제국은 인터뷰할 때보다 더 많은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부모님이 놀라지 않도록 미리 기사가 나갈 거라고 알려 드렸다.
갑작스러운 유명세로 밀려드는 전화의 홍수가 한 차례 지나가고, 조금 안정을 되찾을 즈음. 황제국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제는 전화 응대의 달인이 된 황제국이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뉴퀘스트 황제국 대표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PC게임을 유통하는 늘빛소프트 영업팀 이남준 차장이라고 합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유통사가 제발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