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회 - OST 데모 vol. 1
조촐한 법인 설립 축하 파티를 마치고 황제국은 동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워크맨에 유희철이 보낸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 Young Gun Blood OST demo vol. 1 ]
테이프는 유희철이 작곡한 <영건 블러드> 배경 음악이었다. 황제국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볼륨을 높였다. 그러자 귀에 익은 신디사이저 소리가 들렸다. 퓨처의 히트곡 중 하나의 전주였다.
‘뭐지? 테이프가 잘 못 왔나?’
황제국이 워크맨을 멈추려고 하는 순간, 익숙한 유희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웰컴 투 더 퓨처~, 안녕? 너희가 기다리던 유희철이야.”
유희철이 마치 라디오 방송을 하듯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고막을 버터로 비비는 듯했다.
“그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 신나게 부르고 집에 왔는데, 갑자기 막막해지는 거 있지? 음악 작업할 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나도 제국이랑 뉴퀘스트에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유희철은 바로 노래를 들려주지 않고 앞에 이야기를 깔았다. 꼭 그의 프라이빗 라디오 방송을 듣는 기분이었다.
“얼른 가방을 열었는데 다행히 그날 받은 시나리오가 얌전히 들어있었어. 다시 시나리오를 찬찬히 읽어 봤지. 다시 봐도 재미있네. 이거 게임 나온 다음에 꼭 소설로 한 번 써보라 그래. 내 생각에 못 해도 10만 부는 나갈 작품이야.”
황제국은 유희철이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영건 블러드>가 흥행하면 차현주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고, 전유진은 게임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소설을 써서 출간하는 것이다. <영건 블러드> 이야기를 그대로 써도 좋고, 아니면 게임 빙의물을 써서 <영건 블러드> 세계에 들어가는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희철은 곧 본격적인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도 재밌어서 침대에 걸터앉아서 세 번을 다시 읽었어. 그러니까 머릿속에 무대가 쫙 그려지면서 드디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하더군. 난 목차를 다시 봤어. 총 7개의 챕터잖아? 그래서 난 일단 챕터마다 하나씩 곡을 쓰기로 했지.”
그는 곧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설명했다.
“사실 나는 앨범을 만들 때 뭘 딱 정해놓고 하지 않아. 특별한 컨셉을 정하기보다는 그냥 떠오르는 노래를 만들어. 수십 곡을 만들고 그중에 어울리는 걸 모으지. 그냥 직감대로. 꼴리는 대로. 유남생(You know what I’m saying)? 근데 이건 그렇게 하면 안 되겠더라.”
황제국은 유희철의 녹음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철은 보이를 할 때도, 퓨처를 할 때도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장점이었다. 그는 계산되고, 잘 짜여진 형식보다는 틀을 깨는 데 명수였다. 그래서 작곡과에서는 항상 학점이 낮다고 회식 때 푸념을 했었다.
“그래서 다시 시나리오 목차로 돌아갔지. 튜토리얼 빼고 챕터 일곱 개! 이제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더라고. 우선 각 챕터 별로 기본 테마를 쓰는 거야. 튜토리얼까지 여덟 곡을. 그리고 각 챕터별로 서브 테마곡을 추가로 해. 하나는 심심하고 왠지 정이 없으니까. 그럼 몇 개야? 열다섯, 아니 열여섯 곡이지?”
유희철이 <영건 블러드>에서는 그의 평소 방식과 반대로 접근했다. 챕터별로 메인과 서브 테마로 접근하는 방식은 황제국이 듣기에도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야. 총 16개의 트랙을 대표할, 작품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메인 테마가 있어야지. <스타워즈>, <조스>, <슈퍼맨>처럼 말이야! 그리고 이게 진짜 기똥찬 아이디언데, 크,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진짜 천재 같아.”
유희철은 특유의 자뻑 타임을 가지더니 말을 이었다.
“메인 테마의 멜로디를 이용해서 <영건 블러드> 주제가를 쓰는 거야. 물론 분위기는 좀 바꿔야지. 메인 테마는 웅장하게, 주제곡은 비장하게! 어때? 죽이지? 하~~, 내 작업을 할 때 이런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는 건데. 아깝다. 아까워.”
“오~, 과연 유희철 형님.”
황제국도 유희철의 메인 테마-주제곡 연계 아이디어를 듣자 그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하나 작곡해서 노래까지 만들려는 일석이조 가성비 작업법인가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봐. 첫 시작은 <영건 블러드> 메인 테마곡. 제목은 당연히 <영건 블러드>지. 이건 어디까지나 신디사이저 하나로 만든 데모니까 알아서 상상하며 들어. 그러니까 너희 언어로는 OST의 ‘프로토타입’이라 이거지.”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음악이 흘러나왔다. 황제국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더블 베이스의 묵직한 소리가 깔리면서 음악이 시작했다. 곧이어 쓸쓸한 하모니카 소리가 황량한 웨스턴 느낌을 자아냈다. 잠시 후 어쿠스틱 기타가 하모니카와 화음을 맞추기 시작하더니, 그 위에 일렉 기타와 드럼 사운드가 마치 거칠게 문을 두드리듯 고막을 때렸다.
황제국은 눈앞에 스팀 바이크를 타고 이록을 뒤쫓는 장건과 황산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음악은 마치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록처럼 긴장감을 조성했다 풀어졌다 긴장감을 조성했다 풀어졌다는 반복했다.
원맨 밴드도 운영하는 유희철의 솜씨답게 신디사이저 하나로 여러 악기를 전자음악으로 구현한 데모 음악이었지만 멜로디와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밴드 하나와 소규모 챔버 오케스트라만 동원하면 정말 멋진 음악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OST 제작은 유희철의 영역이었다. 제작비를 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전자음악으로는 부족하니 녹음도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무리였다.
황제국은 메인 타이틀에 이어 챕터 별로 이어지는 음악을 쭉 감상했다. 도박장의 음산한 분위기, 스팀펑크 대도시의 활발한 분위기, 하늘을 날아가는 건십의 느낌 등 챕터마다 중요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괜히 음악 천재가 아니야.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지?’
황제국은 음악을 들으며 이 기이한 행운에 대해 생각했다. <영건 블러드>가 마치 자석처럼 성공의 기운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자, 그리고 마지막은 대망의 주제곡이야. 제목은 <피의 랩소디>야. 아직은 가제고. 메인 테마의 멜로디를 활용해서 정통 락 발라드로 만들었다. 가사는 없는 가이드 버전이니까 감안해서 듣고.”
드디어 마지막 곡이었다. 황제국도 자세를 고쳐 앉고 음악에 집중했다. 첫 시작은 잔잔하게 들어가는 듯했지만 곧 메인 테마의 멜로디를 일렉 기타를 이용해 귀에 확 꽂히는 기타 리프로 변주했다. 이어서 베이스 기타가 아래를 받치고, 드럼 사운드가 힘을 더했다. 첫 소절을 듣는 순간부터 황제국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스따르라르라아아아아~~~
가사가 없는 노래에 유희철이 노래의 멜로디만 입으로 소리를 냈다. 메탈리카와 본 조비의 중간쯤 되는 느낌이었다. 첫 후렴구가 끝나자 메인 테마에서 나왔던 하모니카가 다시 등장했다.
비장함과 자기 연민이 느껴지는 노래에 씁쓸함이 다크 초콜릿을 녹인 듯 더해졌다. 깊은 가을밤에, 혼자 훌쩍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어지는 노래였다.
“끝장이네. 그냥 끝이네.”
황제국은 컴퓨터 스피커에 워크맨을 연결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희철의 <영건 블러드> OST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음악을 듣기만 할 뿐 전문적인 지식은 없는 사람들이라 기술적인 피드백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 유희철의 작업 방식과 음악 분위기에 수긍했다. 그만큼 게임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었다. 마지막 주제가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저···, 제국아. 회장님.”
“네, 테이프 복사하셔도 돼요. 다만 게임 발매하기 전까지는 누구 들려주지 마세요.”
“응! 알았어! 그건 걱정 마. 절대로 나만 들을 거야!”
전유진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도를 눈치챈 황제국에게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황제국은 곧 유희철과 통화했다.
“어때? 들어봤어?”
유희철의 목소리에서 살짝 긴장이 느껴졌다.
“끝내주는데요, 형? 모두 게임 분위기랑 너무 잘 어울린다고 난리에요.”
“그렇지? 그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유희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응이 좋다고 하자 신이 나서 의기양양해졌다.
“네, 저희들이야 음악 쪽은 거의 문외한이라 형에게 뭐라고 피드백을 하기가 어렵네요. 특별히 어색한 부분은 없으니 이대로 형님이 발전시켜서 진행해 주세요. 다만 어떤 포맷인지만 알려주세요.”
“포맷?”
“네, 만약 모두 전자 악기로 하시면 미디 데이터만 전해주시면 돼요. 그런데 녹음을 하시면 MP3 파일로 넣어야 하니까 준비를 해야 해요. 물론 지금 게임 엔진으로 두 가지 방식 모두 가능합니다.”
“MP3? 그건 뭐야?”
전 세계 음반 산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사운드 압축 형식인 MP3는 이제 막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황제국은 CD 음질의 사운드를 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멀티미디어 형식이라고만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럼 그 MP3라는 게 있으면 컴퓨터에서 음악을 재생해서 들을 수 있어? CD처럼?”
“네, MP3 플레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컴퓨터로도 똑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요. 주제가 나오면 싱글 플레이 엔딩 크레딧에 노래 나오게 할 생각인데요?”
“와이씨! 뭐라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 야, 나 다음에 동방에 한 번 들를 테니까 그 MP3라는 거 뭔지 나 좀 가르쳐줘.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참, 화분 고맙습니다. 랩실 썰렁했는데 화분 덕분에 꽉 찬 거 같아요.”
“뭘~, 이렇게 빨리 회사 차릴 줄 알았으면 돈 받는 건데. 아~, 잘못했어. 나 완전 후배한테 사기당했어.”
“그래도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형님?”
“이 얄미운 자식, 옆에 있었으면 그냥 엉덩이를 뻥! 차 버리는 건데!”
유희철이 장난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가 유쾌하게 웃고는 전화를 끊었다. 황제국은 유희철을 한국 뮤지션 중에 MP3와 스트리밍 시대에 가장 빨리 대응하는 뮤지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작은 답례가 될 것 같았다.
<영건 블러드>는 베타 버전을 향해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4명으로 늘린 모델러가 보조 인물들과 각종 오브젝트 데이터를 말 그대로 뽑아내고 있었다. 공간을 채울 오브젝트가 생기는 대로 이진수가 바로 게임에 적용했다.
황제국은 게오동에 벤처 기업 창업 사실을 알리고, PC 게이머와 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오랜만에 남동진 기자가 조윤권과 함께 뉴퀘스트 동방과 랩실을 방문했다. 황제국은 인터뷰를 마치고 두 사람에게 <영건 블러드> 알파 버전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기절초풍할 기세였다.
“야~! 황제국! 넌 이런 게임을 만들고 있으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안 보여줬던 거야?!?!”
“미안. 이상하게 기회가 없었어. 그동안 너무 바쁘기도 했고.”
조윤권은 PC 게이머 인턴 기자 신분으로 인터뷰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황제국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정도였다. 황제국이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인터뷰는 9월호에 나올 수 있을까요?”
“일정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이 정도 소식이면 무조건 내보내야지. 심지어 유희철까지 엮였는데. 편집장님이 인쇄 일정 늦춰서라도 내보내자고 할 거야.”
남동진 기자가 확신했다. PC 게이머에게 황제국은 너무나 소중한 소스였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네. <삼국지:공성전> 만들 때도 남다르긴 했지만, 그때는 아마추어 느낌이 있었는데. 이젠 진짜 프로 냄새가 물씬 난다. 대학교 1학년이 벤처 기업 창업이라니. 진짜 놀라워. 난 네가 존경스럽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이거 나오면 한국이 뒤집어 질거야.”
남동진과 조윤권은 <영건 블러드>의 성공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한 황제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설 생각이었다.
98년인 지금은 아직 전문적인 VC(벤처 캐피탈)가 없었다. 벤처 기업이 이제 막 시작하는 태동기라, 벤처 투자자 역시 비슷했다. 인터넷 관련 사업만 한다고 하면 아이템이 뭔지 묻지도 않고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묻지마 투자’가 이뤄지던 시대였다.
황제국 역시 90년대 후반, 2000년대 극초반기까지 벤처 기업이 떠올랐다가 인터넷 버블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사그라졌던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투자자가 어디서 봤는지 갑자기 문 두드리고 찾아와서 계약서 3장 들이밀고 몇억을 투자했다는 일은 예사였다. 벤처 기업들이 투자받자마자 강남으로 오피스를 옮기고, 대표가 외제 차를 뽑고, 룸살롱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떠돌았다.
황제국은 그런 역사가 다시 반복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돈의 유혹은 강력하다. 반대로 투자를 받았다가 연대 보증 조항에 묶여서 회사가 망하면서 자살한 벤처 기업 대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잘못 다루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투자자 역시 사업의 파트너로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