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 게임 공개
학교에서 시행한 베타 테스트는 대성공이었다. 게임은 친구들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호평을 받았고, 버그도 손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황제국은 덕분에 학교에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황제국은 무엇보다 게임 때문에 서먹해졌던 옛친구 조윤권과 다시 게임 덕분에 친구가 되어 흐뭇했다. 조윤권은 예전 인생에서 게임 덕력을 살려 일간지 게임 기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문화비평가로도 활동했다. 황제국과는 다른 대학에 가지만 황제국은 앞으로도 계속 게임을 만들 것이고, 조윤권도 계속 게임을 할 테니 접점은 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즐겁게 마무리 작업을 거쳐 마침내 <삼국지:공성전> v1.0을 완성했다. 다음 날, 매점에서 팀을 소집해 게임의 완성을 알렸다. 셋은 딸기 우유, 바나나 우유, 커피 우유로 완성을 축하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본격적으로 세상에 우리 게임을 알려야지. 우선 한국에선 PC 통신에 올리고, 그다음엔 영어로 번역해서 FTP 서버에 올려서 전 세계 사람들이 다운받을 수 있게 할 거야.”
“FT··· 뭐?”
황제국은 <삼국지:공성전>을 한국에만 공개할 생각이 아니었다. 기왕 힘들게 만든 게임이고, 또 무료 게임인 만큼 한국을 넘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해주길 바랐다. 게임을 재밌게 한 사람들이 ‘황제국’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고, 큰 성공이었다.
비록 21세기와 같은 인터넷 환경은 아니었지만, FTP(File Transfer Protocol, 컴퓨터끼리 파일을 전달하는 통신 규약)를 통하면 파일을 전 세계로 전송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유즈넷(usenet)을 통해 전 세계 게이머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있었다. 설명을 들은 차현주가 감탄했다.
“와~, 황제국 너 진짜 쫌 멋지다. 처음부터 세계를 바라보네. 스케일이 다르구나.”
“뭘, 그렇게 대단한 건 아냐. 컴퓨터 네트워크에는 원래 국경이 없으니까. 그림도 그렇잖아?”
“그런가? 난 아직 세계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못해봐서.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거지. 제국이 너는 뭔가 우리랑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른 거 같아.”
“우리 게임이 공개되면 네 그림도 세계에 데뷔하는 거야.”
“얼래? 진짜 그렇네? 야! 그럼 첨부터 말하지. 시간도 좀 넉넉히 주고. 더 멋지게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걱정 마, 이 정도도 대단해. 아무도 아마추어가 한 거라고 생각 못 할 걸?”
“피이~~.”
차현주는 얼굴을 찡그리며 남은 커피 우유를 마셨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와, ‘전 세계’ 공개라고 하니까 뭔가 긴장된다. 그럼 오늘 집에 가서 다 공개하는 거야?”
“아니.”
오종석의 질문에 황제국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은 바로 올리면 되지만 세계 공개를 위해서는 아직 단계가 남아 있었다.
“일단 번역을 해야 해. 이게 텍스트가 많거나 시스템이 복잡한 게임은 아니지만, 일단 메뉴부터 전부 한국어라서 외국 사람이 하기엔 장벽이 높아.”
“아~ 하긴. 그럼 번역은 영어로?”
“일단 영어랑 일본어 생각하고 있어. 영어면 미국이랑 유럽은 어느 정도 커버될 거고. 일본도 큰 시장이니까.”
“번역은 누가해?”
“영어는 내가 번역할 거야. 어차피 텍스트가 많지도 않고, 어려운 문장도 아니니까. 뜻만 통하게 하는 건 문제 없어.”
“오오~ 수능 영어 만점자다운 자신감인데? 그럼 일본어는? 너, 일본어도 할 줄 알아?”
“아니, 근데 거의 완벽하게 할 줄 아는 녀석이 있어서. 이미 부탁해 놨지.”
황제국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삼국지:공성전>에 등장하는 텍스트는 많지 않다. 메뉴와 스테이지별로 시나리오를 설명하는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아는 황제국이 일본어까지 번역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게임으로 일본어를 마스터한 조윤권이 황제국의 ‘1호 팬’을 자처하고 있었다. 황제국은 조윤권에게 <삼국지:공성전> 텍스트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고, 조윤권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삼국지:공성전>에 아주 작은 일부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번역은 그렇게 해결하면 되는데. 사실 진짜 문제는 FTP 서버 구축이야.”
황제국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서버를 만들려면 24시간 돌아가는 컴퓨터가 있어야 하고, 컴퓨터는 24시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누가, 언제 접속해도 파일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옛날 부품들로 컴퓨터 하나 더 조립해서 리눅스(Linux, 리누스 토발즈가 개발한 오픈소스 OS) 깔고 집에 FTP 서버를 만들까 했어. 이건 사양이 높을 필요가 없으니까. 근데 인터넷 회선이 문제더라고. 전화선 속도도 속돈데, 24시간 연결해 놓으면 전화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날 거야.”
“음, 앞에는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뒤는 확실하지. 바로 쫓겨나.”
오종석은 멋모르고 PC 통신으로 밤새 텍스트 머드 게임을 하다가 전화세가 20만원이 나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았다. 그날 오종석은 집에서 쫓겨나 황제국 집에서 잤다. 그는 황제국 컴퓨터로도 밤새 텍스트 머드 게임을 했다. 다음 날, 황제국 집에 전화가 계속 통화 중임을 확인한 오종석 어머니가 찾아와 오종석을 집으로 끌고 가면서 사건은 해결(?)되었다.
아직 정액제 초고속 인터넷 회선이 들어오지 않은 환경. 게다가 경제력이 없는 고등학생이라 돈이 필요한 일에는 황제국 능력으로도 해결이 쉽지 않았다. 오종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며 말했다.
“흠, 그럼 어쩌지? 컴 업글하고 예전 부품 아직 안 팔았는데, 전화비에 보태게 몽땅 긁어모아서 팔까? 게임 타이틀 몇 개 중고로 팔아도 되고. 아, 그래도 <툼 레이더 2>는 아까운데······.”
“야, 괜찮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방법이 하나 있겠더라고.”
“방법? 무슨 방법?”
“PC방에 몰래 FTP 서버를 만드는 거야. 게임 용량이 작아서 패킷(packet, 네트워크로 전달하는 데이터 형식)도 얼마 안 될테니 아마 잘 모를 거야.”
“오오~, 그거 괜찮은 꼼순데? 구석 자리에 맨날 켜놓는 컴퓨터 있잖아? 거기에 몰래 해버리면 되겠다.”
오종석도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차현주는 뭔지 모르지만 황제국이 하는 거니 잘 될 거 같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삼국지:공성전> 공개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황제국은 우선 우리나라에 게임을 공개했다. 그날 오후, 집에 돌아간 황제국은 PC 통신 프로그램 ‘말하기’를 실행시키고 ‘마이텔’에 접속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ATDT 01410’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자 곧 컴퓨터에서 전화 거는 소리가 났다.
뚜우~ 띠또띠 또띠띠띠.
이어서 일반 전화를 걸 때처럼 신호가 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곧 ‘삐이이이~ 크으오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파란 화면에 마이텔 메인 화면이 떴다.
황제국은 15번 동호회 카테고리로 들어가 마이텔에서 가장 큰 게임 동호회인 게오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료실에 게임을 업로드하며 글을 남겼다.
‘[자작] 삼국지 전투 게임 <삼국지:공성전> 올려봅니다.’
쳐들어오는 적을 막거나, 반대로 공격하면 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삼국지 전투 게임이라는 설명과 함께 게임을 업로드했다. 고작 몇 메가바이트밖에 되지 않지만, 그가 쓰는 모뎀 속도가 28.8Kbps밖에 되지 않는 데다 업로드 속도는 다운로드 속도에 비해 많이 느렸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라면 1초도 걸리지 않을 업로드를 30분 넘게 기다려 끝낸 황제국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과 통신 속도가 느린 건 도저히 적응이 힘들었다.
그 시각, 오종석과 조윤권은 각각 ‘가온누리’와 ‘만리안’에 접속해 게임 동호회 자료실에 <삼국지:공성전> v1.0을 업로드하고 있었다. 업로드를 마친 두 사람은 황제국에게 업로드 완료를 알리는 삐삐를 쳤다. 일단 주요 PC 통신 서비스에는 모두 업로드를 마쳤다.
곧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삼국지:공성전>을 홍보하는 글을 썼다. 조윤권은 게오동을 비롯해 자기가 활동하는 게임 커뮤니티마다 황제국의 게임 소개 겸 리뷰하는 장문의 글을 썼다.
> 혹시 고전 게임 ‘레밍즈(Lemmings)’를 기억하시나요?
> 수십 마리 레밍즈를 출구로 이동시켜야 하는 독특한 게임이었어요.
> 처음 레밍즈를 했을 때 재미도 있었지만 정말 새로워서 깜짝 놀랐습니다.
> 며칠 전 제 친구가 만든 게임인 <삼국지:공성전>을 하면서 그때의 느낌이 다시 떠올랐어요.
> 단순하지만 전략 요소가 있는 게임 플레이.
> 군주마다 역사성을 반영한 색다른 시나리오.
> 아마추어가 했다고 믿을 수 없는 깔끔한 그래픽.
> 특히 KOEI 삼국지에서도 느낄 수 없는 공성전의 치열함과 스릴까지.
······
> 저도 고등학생이지만 도저히 고등학생이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 이 게임의 거의 유일한 단점은 게임이 너무 짧다는 거예요.
> 설마 제가 친구가 만들었다고 이렇게 칭찬하는 거라 생각하시는 분 없겠죠?
업로드 후 며칠 동안, 다운로드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간간이 ‘이거 물건이네!’, ‘생각보다 재밌음’ 같은 댓글이 달렸지만, 아직 큰 반응은 없었다. 그 사이 황제국은 영어 번역을 마치고, 조윤권에게 일본어 번역을 받아 영어/일본판 게임을 완성했다.
황제국은 디스켓을 들고 오종석과 PC방으로 향했다. 오종석은 PC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잔뜩 긴장해 있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주인을 향해 하이톤으로 인사하며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어, 니들 왔어? 빈자리 찾아서 앉아.”
주인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았고, 황제국은 점 찍어 놓은 구석진 자리로 얼른 오종석을 끌고 갔다. 평소대로 컴퓨터는 켜진 채 모니터만 꺼져 있었다. 오종석은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휴~, 일단 넘어갔네. 야, 제국아. 걱정 말고 차분하게, 응, 그리고 침착하게 행동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알았지? 내가 주인아저씨는 잘 감시하고······.”
오종석이 눈알을 굴리며 얘기하고 있는데, 등 뒤로 PC방 주인아저씨가 양손에 따뜻한 캔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오랜만에들 왔네. 자, 이거 마셔라.”
“앗! 아저씨. 저희가 오늘 온 거는, 아니, 저희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냐면요?!”
오종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횡설수설하자 주인아저씨도 깜짝 놀랐다. 주인아저씨가 황제국을 보며 물었다.
“야, 이 녀석 이거 오늘 왜 이러냐? 뭐 잘못 먹었어?”
“몰라요. 학교에서 여자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나 봐요.”
“아~~, 그랬어? 괜찮아! 그까짓 거! 세상에 반이 여자라고. 대학 가면 저절로 연애하게 되어 있어. 게임하면서 다 잊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요금도 싸게 해줄게.”
주인아저씨는 오종석의 등을 뜨겁게 두드려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종석은 황당한 얼굴로 황제국을 바라봤지만 황제국은 웃으면서 말했다.
“돈 굳었네.”
그는 느긋하게 캔 커피를 따서 마시며 FTP 서버 구축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PC방 컴퓨터의 네트워크와 각종 설정부터 확인했다.
PC방이 PC 수백 대 규모로 발전하고, 관리 프로그램으로 일괄 관리하면서는 손님이 컴퓨터에 함부로 손댈 수 없게 아예 설정을 막아 놓는다. 그러나 지금은 98년 2월. 예상대로 PC방 컴퓨터에는 기본적인 패킷 필터링 같은 방화벽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황제국은 오종석에게 손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다음 단계로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를 실행시키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윈도우 95로 FTP 서버를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했다. PC방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경험한 황제국에게는 인터넷 속도가 끔찍하게 느렸기에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다운로드를 마친 후, 각종 설정을 착착 진행하고는 하드디스크에 FTP 서버로 사용할 폴더를 만들었다. 그리고 폴더에 영어 버전과 일어 버전 게임 설치 파일을 깔았다.
설정을 마친 황제국은 옆에 있는 오종석 컴퓨터로 FTP 주소에 접속했다. 문제없이 접속되는 것을 확인하고 게임 유즈넷 그룹에 누구든 다운로드하라고 영어와 일본어로 글을 남겼다. 그의 게임이 전 세계에 공개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공개 작업을 마친 그는 <삼국지:공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러 마이텔에 들어갔다. 조금씩 그의 게임이 참신하면서 재미있다는 글이 페이지마다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황제국을 대화방으로 초대했다. 처음 보는 아이디였다. 황제국은 오종석에게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오종석도 모른다고 했다.
“누구지?”
“얘기해 봐. 혹시 여잔가?”
황제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수락을 눌렀다. 대화방에 들어가자 상대방이 인사를 했다.
> 겜돌이: 안녕하세요. 혹시 요번에 게오동에 <삼국지:공성전> 올리신 황제국 님이 맞나요?
> LeChuck(리척): 네, 맞는데요.
> 겜돌이: 아, 안녕하세요. 혹시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LeChuck: 네, 가능은 한데요. 누구신가요?
> 겜돌이: 아, 이런 제 소개를-_-;;; 저는 PC 게이머 남동진 기자라고 합니다.
“어? 야! 야! 게임 기자!”
오종석이 호들갑을 떨며 황제국의 어깨를 두들겼다. 황제국도 씨익 웃었다. 이제 그가 기대하던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