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회 - 수수깡 대결(1)
평소라면 정규 제작 회의를 시작할 시간. 뉴퀘스트 동방에는 전과 다른 긴장감이 맴돌았다.
황제국은 프로토타입 시연할 준비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옆에서 이진수가 마지막으로 소스 코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수 선배님, 어제 검토 끝냈잖아요.”
“그, 그랬지. 드듭.”
황제국 눈에 그 모습이 꼭 시험 시작 직전, 마지막 몰아치기로 답을 암기하려는 수험생처럼 보였다. 이진수는 상당히 긴장한 듯 보였다. 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빌드를 점검하던 날의 황제국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문제 없을 거예요. 그리고 문제 좀 생기면 어때요. 고치면 되죠. 그러려고 만들어 보는 프로토타입이잖아요?”
“그, 그렇지. 맞아.”
황제국이 이진수의 어깨를 양손으로 가볍게 쥐면서 말했다. 그러자 이진수도 긴장이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오종석, 차현주, 그리고 얼마 전 합류한 전유진이 초조하게 프로토타입 시연을 기다렸다. 혹시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잘 못 되면 어떡하나는 긴장감과 몇 달을 공들여 만들어 온 게임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설렘이 동시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야,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삼국지 게임 만들 때랑은 완전 다르네.”
“다르지.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제국이만 따라갔을 뿐이었잖아.”
“부럽다. 다들 경험이 있네. 난 이번이 처음이라.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게임 개발이 처음인 전유진이 프로토타입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오늘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모두 지금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이렇게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들 프로토타입을 즐길 준비 되셨나요?”
“우리야 아까부터 준비 끝났지!”
황제국의 말에 오종석이 씩씩하게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황제국이 엔터키를 눌렀다. 모두 황제국 뒤에 몰려와 모니터를 주시했다.
아직 제목도 없는 게임이었기에 타이틀 화면도 없었다. 다만 아주 짤막한 자막이 잠시 떴다가 사라졌다.
[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 FPS by 뉴퀘스트 ]
잠시 후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더니 기차 내부가 나타났다. 화면에는 주인공이 들고 있는 총의 총부리가 보였고, 양옆으로 의자가 놓여있었다. 창밖으로 황량한 대지가 펼쳐지고, 기다란 원통 하나가 빠르게 사라졌다.
“전봇대 덕분에 움직이는지 알겠다.”
“저거 전봇대가 아니라 나무야. 아직 나뭇가지랑 나뭇잎이 없어서 그래.”
“아, 그런 거야?”
“응, 그리고 스팀펑크 시대라 아직 전기가 대중화되지 않았어. 대부분 증기기관이랑 톱니바퀴로 돌아가.”
“아 참, 그랬지.”
“이그, 오종종. 그렇게 스팀펑크를 팠는데 도대체 그동안 뭘 배운 거야.”
황제국이 정정해주자 차현주가 오종석을 핀잔했다. 오종석은 무안해져서 입맛을 다졌다.
“근데 종석이 말대로 기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좀 더 명확히 할 필요는 있겠어. 게임에는 기차가 조금씩 흔들리는 효과를 줘야겠다. 자, 그럼 들어가 볼게.”
황제국은 ‘W’키를 눌러 캐릭터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조작키는 곧 FPS 게임의 국룰이 될 WASD로 설정했다.
화면이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캐릭터가 다음 칸으로 가는 문 앞에 도착했다. 전유진은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다 확인하듯 물었다.
“지금 움직이는 게 주인공 장건인거지?”
“네, 맞아요.”
“진짜 신기하다. 얘가 장건이 되는 거구나.”
화면에는 장건이 들고 있는 리볼버형 라이플, 그것도 사각형으로 보이는 총부리뿐이지만 전유진의 마음인 이미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소설로 쓸 때와 게임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자, 들어갑니다.”
황제국이 F키를 누르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화면에 [누구야?]라는 자막과 함께 몇 명의 사람들이 권총을 들고 위협했다. 물론 사람은 모두 수수깡 형태였다. 황제국이 그중 하나를 조준하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탕!
총소리와 동시에 라이플 가운데 실린더가 돌아가고 적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적의 머리 위에 [ headshot(헤드샷) ]이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쓰러졌다. 그러자 적들이 권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황제국은 재빨리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퉁! 퉁!
의자에 총알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효과음은 예전에 PC 게이머에서 얻은 사운드 샘플을 활용했다. 황제국은 소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현장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황제국은 잠시 의자 뒤에 숨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적들을 상대하며 한 칸씩 앞으로 전진했다.
“앜!!!”
그러다 총에 맞으면 화면에 피가 튀었고, 체력 게이지가 줄었다. 총에 맞으면 전유진은 마치 자기가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후.”
황제국은 가볍게 첫 칸에 있는 적들을 해결하고 둘째 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적이 나타나 황제국을 덮쳤다.
“엄마!”
차현주가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오종석을 껴안았다. 이미 알고 있던 황제국은 재빨리 숫자 키를 눌러 보조 무기 단검을 꺼내 들고 적과 육박전을 벌였다.
팔도 굽히지 못하는 수수깡들끼리의 칼싸움이었지만 대결은 진지했다. 황제국은 상대방이 칼을 휘두르는 타이밍에 똑같이 휘둘러 공격을 막은 다음, 상대를 공격했다. 적이 쓰러지자 곧바로 총소리가 들렸다. 황제국은 재빨리 의자 뒤로 숨었다.
퉁! 퉁! 투두두두두두둥!
첫 번째 칸과는 다른 막강한 화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총알 소리만으로도 머리를 밖으로 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자, 여기서 장건의 주특기가 나올 거야.”
황제국은 총알이 담긴 실린더 탄창을 갈아 끼워 라이플에 서른 발을 채웠다. 그리고 잠시 총소리가 줄어든 틈에 의자 밖으로 나와 적에게 총알을 쏟아부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탕!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30발의 총알을 모두 쏟아부은 황제국은 다시 의자 뒤로 숨었다. 적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서부의 건맨들이 리볼버로 자주 쓰던 연발 기능을 극대화한 장건의 스킬이었다. 다만 이 스킬은 총알 30발이 가득 든 실린더를 끼웠을 때만 발동한다는 제한이 있었다.
“흠흠, 저거 아주 속이 시원한데?”
상황이 종료되고 차현주가 슬쩍 품에서 나오자 오종석이 뻘쭘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진수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이, 이 스킬 쓸 때는 총부리에서 나오는 부, 불꽃을 더 크게 하자.”
“이펙트가 좀 약한가요? 불꽃 색깔도 좀 다르게 해 볼까, 현주야?”
“응? 어, 어~~불꽃?! 그러자. 그러자. 내가 몇 개 샘플로 만들어 볼게.”
“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 스킬 쓸 때는 총 반동도 더 강하게 해야겠어요. 조준이 너무 쉬워서 발란스가 깨질 거 같아요.”
“응, 여, 연기도 좀 추가하고. 브브.”
이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국의 피드백을 자기 메모리에 암기했다. 황제국은 기차 세 번째 칸까지 들어가 적군을 모두 제압했다. 싱글 모드 프로토타입 시범을 마친 황제국이 모두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아요?”
“훌륭한데? 아직 동작이나 무기나 제한적이긴 해도, 프로토타입이란 걸 생각하면 좋아.”
“나도. 수수깡들이 피 흘리고 죽는 게 좀 불쌍하긴 하지만.”
“난 이런 게임 처음인데 막 진짜 내가 쏘는 거 같고, 맞는 거 같고 그래. 글로 쓰는 거랑 체감하는 거랑 정말 다르다.”
다들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반면 이진수의 눈에는 여러 가지 보완해야 할 점이 엄청나게 보였다. 게임 엔진 자체가 미완성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 역시 한 가지는 인정했다.
“그,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특히 우, 움직임이.”
“제 생각도 그래요. 조작하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고 아주 쾌적해요. 오브젝트랑 배경 들어가면 달라지겠지만 일단 지금 단계에서는 합격인 거 같아요.”
“오예~!!!”
황제국도 흡족해하자 차현주가 만세를 불렀다.
“실제 게임으로 나올 때는 장건 라이플에 탄창 실린더 교체할 때, 그 모션도 다 나오는 거지?”
“그래야지. 총싸움을 다루는 FPS니까 그런 모션 중요하지.”
“크으~~, 벽 뒤에 숨어서 실린더 멋지게 딱! 교체한 다음에 한 방에 쓸어버리는 거 생각만 해도 피가 끓어오른다.”
오종석이 기대된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오종석의 어린애 같은 반응에 황제국이 웃으면서 고백했다.
“실은, 나도 그래.”
동방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싱글 플레이 프로토타입 시범을 마친 황제국은 이어서 이진수와 멀티플레이 시범에 나섰다. 아직 인터넷 네트워크 기능은 게임 엔진에 넣지 못해서 급하게 로컬 네트워크 기능으로 황제국과 이진수의 컴퓨터를 연결해 멀티 플레이를 실행했다.
좁은 실내였던 기차에 비해 이번에는 넓은 들판에 대로가 있고, 양옆으로 건물이 각 4개씩 총 8개가 있었다. 프로토타입이라 건물은 그냥 회색이고 모두 똑같이 생겼다.
황제국은 주인공 ‘장건’ 캐릭터를, 이진수는 변절자 ‘이록’ 캐릭터를 선택했다. 멀티플레이가 시작하자 대로 두 사람이 양쪽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약하게 안개가 끼어 있었다.
“와~, 이 분위기! 꼭 를 보는 거 같아!”
전유진이 감탄했다. OK 목장의 결투는 서부 시대 가장 유명했던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와 악당의 결투를 그린 작품이었다.
“아무리 프로토타입이라도 건물이 너무 썰렁해서요. 특수 효과는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라 제가 추가해 봤어요. 선배님, 그럼 시작할까요?”
“OK.”
이진수가 대답하자마자 황제국을 향해 총을 쐈다. 황제국은 총알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치 총알이 자신을 뚫고 가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총알은 황제국을 비켜 갔다. 황제국도 곧바로 라이플로 응수했다. 그렇지만 이진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건물을 끼고 돌면서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긴장감을 더했다.
“후, 후, 후, 후!”
이진수는 캐릭터가 걸을 때마다 숨소리를 더했다. 프로토타입에는 숨소리가 없어서 이진수 스스로 효과음을 더했다. 그는 황제국의 꼬리를 밟고 뒤를 노렸지만, 안개 속에 황제국은 없었다.
당황한 이진수는 걸음을 늦추고 몸을 한쪽 벽에 붙인 채 천천히 주변을 탐색하며 움직였다. 마을 맵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건물 8개 주변에서 멀리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분명 황제국은 가까이에 있었다.
“드드드득.”
이진수가 불안한 듯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황제국의 수수깡 캐릭터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몰입해 있는 이진수의 눈에는 그 수수깡이 살인마로 보였다.
“히이익!”
투두두둥!
이진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총을 쐈지만, 황제국이 재빨리 옆으로 돌아 움직이며 칼을 휘둘렀다. 화면에 빨간 피가 튀며 이진수의 체력이 줄었다. 이진수는 얼른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곧 총알이 떨어진 그는 탄창을 갈아 끼우며 도망쳤다. 황제국도 총에 맞아 체력이 줄었다. 근접전은 상대를 끝장내지 못하면 자기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남은 체력은 56%. 생각보다 큰 피해를 당했다. 총에 한 번 더 맞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다른 세 사람은 둘의 대결을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이 수수깡 대결이 뭐라고 이렇게 긴장돼?”
차현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전유진도 100% 동감이었다.
이진수는 전략을 바꿨다. 그의 캐릭터 변절자 이록은 장거리 저격이 장기였다. 그의 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소에는 기관단총이지만, 필요할 때는 총신이 길어지면서 저격총으로 변한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게임이라 가능한 설정이었다.
그는 건물로 들어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총을 저격 모드로 바꾼 다음 아래를 내려다보며 황제국을 추적했다.
‘찾았다.’
이진수는 숨을 죽이고 황제국을 겨냥했다. 온 사방이 고요했다.
황제국은 무기를 다시 장건의 시그니처 라이플로 바꾸고 주변을 탐색했다. 그런데 안개 때문인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안개가 조금씩 짙어지면서 자기가 어디쯤인 지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진수 선배는 어디 있는 거지? 분명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미니맵이랑 센서도 추가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탕!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