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 비주얼 담당(2)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차현주는 오종석의 집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원래는 합격 소식만 알리고 미술 학원에 가서 선생님에게 인사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다른 손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황제국이 있어서 조금 당황했는데,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말에 보통 사람이 게임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조금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그렇다고 게임을 해보고 싶은 건 아니었고, 그림을 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국이라는 아이의 진지함에 끌려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 앉아 버렸다.
그림도 그렇다. 친구들이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거나, 예쁜 만화 좀 그려 달라고 하면 장난으로 쓰레바를 던지며 공짜그림은 없다고 외치던 그녀였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 게임을 했으니, 떠오르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게임이란 거 생각보다 꽤 재미있네.”
여러모로 이상한 하루였다. 집에 가는데 오종석이 삐삐를 쳐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것도 이상했다. 평소 분식집에는 가도, 패스트푸드점에 가자고 한 적은 없었다.
다음날, 차현주는 오종석이 얘기한 패스트푸드점으로 갔다. 나가보니 황제국도 옆에 있었다. 차현주는 황제국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오종석에게 틱틱 거렸다.
“뭐냐? 왜 이런 데서 보재? 나 햄버거는 안 먹는데? 치킨만 먹을 거야.”
“알았어. 맘대로 시켜. 너 합격 기념으로 내가 살 테니까.”
“진짜? 웬일이래? 여기 뭐가 맛있어? 넌 뭐 먹을 거야?”
“난 감자튀김 먹을 거야. 여긴 케이준 감자튀김 먹으러 오는데 거든.”
차현주가 니가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오종석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치킨과 케이준 감자튀김, 콜라를 푸짐하게 주문했다.
셋은 금방 나온 치킨을 맛있게 뜯어 먹었다. 치킨을 먹고 있자니 황제국은 오랜만에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직은 엄연히 고등학생이었다. 지금은 콜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려고 나 부른 거야?”
“어? 할 얘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치킨을 다 먹고 차현주가 묻자 오종석이 당황했다.
“내가 바보냐? 갑자기 삐삐쳐서 나오라더니 치킨을 사 주는데? 뭔데?”
“어, 그게······.”
“우리 게임에 그림을 그려줄 수 있어?”
오종석이 망설이자 황제국이 말을 꺼냈다. 차현주는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싶었다. 잠깐 생각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나 컴퓨터로 그림 그려본 적 없어. 게임에 들어가는 그림이면 컴퓨터로 그릴 거 아냐?”
“그 말은 컴퓨터로 그리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네?”
“응?”
“넌 컴퓨터로 그릴 필요 없어. 그냥 평소처럼 손으로 그리면 돼. 색까지 칠해주면 더 좋고.”
“손으로 그려도 된다고? 그럼 내 그림이 그대로 화면에 보이는 거야?”
“아니, 내가 너가 그린 그림을 보고 컴퓨터로 다시 그릴 거야.”
그 말에 오종석도 놀랐다.
“어? 스캔할 거 아니었어?”
“그거 때문에 스캐너를 살 수는 없잖아. 또 게임 용량 문제도 있고.”
“아, 하긴.”
높은 해상도의 스캔 기능까지 갖춘 복합기는 구하기 어려울 때였다. 게다가 게임을 CD-ROM으로 만들어 배포할 게 아닌 이상 용량을 단 1KB라도 줄여야 했다. 덩치 큰 이미지 파일을 막 넣을 수는 없었다.
차현주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황제국이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 그림을, 제국이 네가 컴퓨터 화면 크기에 맞춰서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컴퓨터에 맞는 그림으로 다시 그린다구?”
“응, 디럭스 페인트2(Deluxe Paint II)라는 프로그램이 있어. 그 수수깡 그래픽도 내가 그린 거고.”
“신기하네. 그림은 어떻게 그려?”
“마우스로.”
“뭐? 그걸로 그림을 그린다고?”
차현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컴퓨터로는 뭔가 전혀 새로운 도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마우스라니. 황제국이라는 친구가 컴퓨터를 부리는 마술사처럼 보였다.
황제국은 차현주가 호기심을 보이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그림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너 컴퓨터 화면이 전부 픽셀(pixel)이라는 점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건 알지?”
“아니. 너한테 첨 듣는데.”
“아, 모르는구나. 그러면 어떻게 설명을 하지···? 미술학도니까, 쇠라 알지? 점묘법으로 그리는.”
“당연하지.”
“그럼 쇠라의 그림은 점을 몇 개를 찍었을까?”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셀 수도 없지.”
“모르지? 사실 나도 몰라. 그런데 만약 내가 컴퓨터로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린다고 하면 몇 개의 점을 찍어야 하는지 알지.”
“몇 갠데?”
“너가 어제 봤던 게임 화면 해상도가 640x480이거든? 그 말은 가로 640개, 세로에 480개의 픽셀이 있다는 뜻이야. 둘을 그냥 곱하면 돼. 나는 총 307,200개의 점으로 쇠라의 그림을 컴퓨터로 옮길 수 있어.”
“어후, 30만 개라니. 못해. 난 못해.”
얘기를 듣던 오종석이 고개를 흔들며 남은 콜라를 쭉 빨았다. 차현주는 황제국의 예상대로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 설마 마우스로 30만 개 점을 일일이 찍는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러다간 몇 년은 걸릴 텐데. 물론 디테일한 부분은 그렇게 하지만, 그래픽 프로그램에는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게 도와주는 다양한 효과가 있어.”
이쯤에서 황제국이 차현주에게 제안을 했다.
“너가 그림을 그려주면, 내가 컴퓨터로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가르쳐 줄게. 어때?”
“내가 컴퓨터로 그림 배워서 뭐 하게? 난 서양화과 가는데? 우린 캔버스에 붓으로 그려.”
“알지. 하지만 손으로 그리는 그림도 결국 네가 상상하는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기는 거잖아. 컴퓨터 그래픽도 똑같아. 내가 장담하는데 앞으로 컴퓨터 그래픽은 엄청나게 발전할 거야. 지금 배워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돼.”
“예를 들면?”
“예를 들자면··· 네가 나중에 유명한 화가가 돼서 엄청나게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봐. 아마 아이디어 스케치를 수백 장씩 하겠지? 그때 만약 컴퓨터 그래픽을 할 줄 알면 네 상상을 이미지화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컴퓨터 그래픽을 내 그림의 프로토타입으로 쓰라고?”
“바로 그거지! 엄청 똑똑하구나. 이해가 진짜 빠르네.”
황제국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차현주가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컴퓨터 그래픽을 배워두면 나중에 절대 손해는 아닐 거야. 오히려 남들보다 몇 배는 앞서갈 수 있는 지름길이지. 미술도 결국 생각의 싸움이잖아. 컴퓨터는 생각을 실현하는 걸 도와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야.”
“오, 생각을 실현하는 도구! 그 말 멋있는데?”
오종석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고, 차현주는 황제국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황제국은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멋진 말을 내뱉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남의 스타일이나 흉내 내면서 담배 빨고 허세나 부리는 놈들하고는 확실히 다르단 말이지.’
차현주는 미술 학원에서 허세에 가득한 사람들을 제법 봤다. 그들은 입바른 소리와 온갖 멋있어 보이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이룬 것도 없으면서 세상을 다 산 듯 염세적이고,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황제국은 달랐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알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제대로 알고 지낸 적은 없지만 자기가 만드는 게임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허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이참에 나도 컴퓨터 좀 배워보지 뭐. 대학 가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잘 생각했어. 후회하지 않을 거야.”
황제국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차현주도 그 손을 잡고 씩씩하게 악수했다.
“오··· 맙소사!”
그리고 오종석은 옆에서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인 개발을 목표로 했던 <삼국지:공성전>에 오종석에 이어 생각지도 않게 또 한 명이 합류하게 되었다. 황제국은 그 자리에서 차현주에게 그려야 할 그림과 내용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적은 문서를 건넸다.
“어제 정리한 <삼국지:공성전>에 필요한 그림을 정리한 내용이야. 한 번 읽어 봐.”
“이런 것도 준비했어?”
차현주는 파일에 담긴 A4 문서를 보며 감탄했다. 잉크젯 프린터로 깨끗하게 뽑은 문서에는 필요한 그림과 그림에 들어가야 하는 요소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황제국은 게임 회사 막내 시절부터 외주 프리랜서에게 수없이 작업 의뢰서를 썼기 때문에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필요한 그림은 각 스테이지별 전투맵과 타이틀 화면, 군주 초상화 등이었다.
“그리고 이거.”
“이건 또 뭐야?”
“A4 크기의 드로잉북이야. 해상도가 4:3 비율이니까 그림도 비율을 비슷하게 맞춰야 해. A4는 정확하게 4:3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해. 이 프레임에 맞추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와, 진짜 철저하다.”
“처음 정할 때 내용이랑 스펙을 확실하게 해야 해. 안 그러면 서로 생각이 달라서 시간만 낭비하거든.”
“봤냐? 우리가 이렇게 일해.”
차현주가 감탄하자 옆에서 오종석이 끼어들어 으스거렸다.
“사실 우리가 시간이 별로 없어. 대학 입학 전에 다 마칠 계획이라서 시간이 좀 촉박하거든. 그래서 미안한데, 3일 뒤에 러프 스케치를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3일? 꽤 빠르네? 그래, 알았어. 해보지 뭐.”
방학에다 입시도 모두 끝난 상황이라 차현주도 선뜻 수락했다. 그렇게 결성된 <삼국지:공성전>팀은 2~3일 간격으로 모여서 서로의 작업 과정을 확인하며 게임 개발을 진행했다.
황제국은 20년의 간극만큼 달라진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절감했다. 슬랙이나 잔디, 노션과 같은 고도화된 커뮤니케이션 툴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다못해 텍스트만 전달할 수 있는 메신저조차 없으니 실시간으로 대화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면 할 얘기가 있으면 삐삐를 쳐서 PC 통신 채팅방에서 만나야 했다. 그나마 차현주는 집에 PC조차 없었기 때문에 미팅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게임 회사는 개발실 조직이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커뮤니케이션과 스케줄링을 조절하는 PM이 따로 존재할 만큼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커뮤니케이션 툴이 없어지자 모든 이야기를 미팅을 통해야만 했다.
게다가 황제국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 게임 개발에는 완전 초보였다. 황제국은 직접 모든 것을 개발하는 개발자이면서 동시에 팀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결과에 피드백을 주고, 결과물을 조합해 게임을 완성하는 PD였다.
진짜 게임 회사라면 PD는 실무를 하지 않는다. 그건 총사령관이 직접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서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셋 중에 해야 할 일이 가장 많은 것은 황제국이었다. 다행히 그는 15년 이상 숙련된 실무자이기도 했다.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항상 기획에 관심이 많았고, 수많은 형태와 규모의 조직에서 다양한 미팅에 참여하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웠다. 적은 인원이지만 팀 단위로 바뀐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황제국의 몫이지만 그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었다.
황제국은 무엇보다 회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회의는 작업물 검토, 피드백, 투두리스트(To-do-list, 앞으로 해야 할 일)의 3단계로 구분하고, 회의 끝에는 반드시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혼선이 없도록 했다.
협업이라고 하지만 초보자 둘을 데리고 일을 하는 만큼, 그만큼 황제국이 해야 할 일은 더 늘어났다. 그래도 황제국은 짧은 시간이지만 점차 나아지는 결과물을 보며 함께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종석은 오소 추격전을 중심으로 조조 스테이지를 개선하고 있었고, 차현주는 낯선 스타일 때문에 초반에 좀 버벅댔지만 곧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삼국지:공성전> 개발에 매진했다.
어느새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