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 - 뜻밖의 제안
조윤권이 깜짝 놀라서 다카하시 사장에게 재차 질문을 확인했다. 그리고 황제국에게 그의 말을 전했다.
“나보고 스튜디오 X에서 일하자고?”
“응, 분명 그렇게 말했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황제국은 잠시 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3백 5십만 엔을 불렀는데 나보고 여기서 일하자고? 그 돈을 내 연봉으로 주겠다는 뜻인가?’
황제국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다카하시를 바라봤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황제국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국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3백 5십만 엔으로 절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노노! 완전 오해입니다. 함께 일하자는 것은 라이선스 계약과는 별개입니다.”
다카하시가 손사래를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개라고요?”
“그렇습니다. 라이선스 비용은 오늘 정해지는 데로 지급할 겁니다. 스튜디오 X는 <판타지 삼국지>를 플레이스테이션 버전으로 꼭 낼 겁니다.”
“그럼 함께 일하자고 하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스튜디오 X에 콘솔 게임 권리를 팔고, 미스터 황은 스튜디오 X에서 <판타지 삼국지> 기획을 총괄하는 게임 디자이너로 일해 달라는 제안입니다.”
“게임 디자이너로요?”
“그렇습니다. 후지타 군에게 아마 얘기 들으셨겠지만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서드 파티로 조금 늦게 참여한 편입니다. 회사 규모는 아직 작고, 게임 타이틀도 부족하죠. 우리도 <파이널 판타지 7> 같은 대작 게임을 만들고 싶지만 아직은 무리입니다. 분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죠.”
다카하시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말했다.
“<삼국지:공성전>을 했을 때, 볼륨은 작았지만, 아마추어가 만들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기획과 완성도가 뛰어났습니다. 여기서 컨셉을 업그레이드한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미스터 황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조윤권은 초집중 상태로 다카하시의 말을 또박또박 황제국에게 전달했다. 다카하시도 흥분해서 말이 빨라지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쩌다 우연히 좋은 게임 하나가 나온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미스터 황에게 <삼국지:공성전>은 인생 최고의 게임이 아니라, 그저 시작점에 불과할 겁니다. 삼국지에 판타지를 입힌다는 생각이야 아주 단순하고 간단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게임 컨셉으로 연결해서 발전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발자 역량으로는 천지 차이입니다.”
황제국은 다카하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하시는 스튜디오 X의 사장답게 게임 개발자의 역량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게임 회사는 출시하는 게임 하나하나에 회사의 운명이 걸려있다. 게임 하나로 갑자기 몇 배로 크기도 하지만, 반대로 문을 닫기도 한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뛰어난 게임 기획자, 개발자, 아티스트를 채용하려고 혈안이 된다.
“판타지 삼국지 컨셉도 놀랐지만, 영웅 시스템은 완전히 날 KO 시켰습니다. 삼국지에서 영웅을 빼놓을 수 없죠. 솔직히 이런 말씀까지 드리긴 뭐 하지만 우리도 게임 컨셉 논의를 하면서 영웅을 등장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셨나요? 어떤 방식이었죠?”
“그것이······.”
다카하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미스터 황의 영웅 시스템과 비교하면 좀 부끄럽지만, 우리가 생각한 영웅 시스템은 스테이지가 시작할 때 장수가 한 명씩 나와서 싸우는 겁니다. KOEI <삼국지>에서처럼 일기토(一騎打ち)를 벌이는 거죠.”
“아···, 하지만 이 게임은 격투기 게임이 아닌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컨셉이 전혀······.”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장수가 꼭 등장해야 한다는 기획자들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일대일이 맞을까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황의 영웅 시스템을 보고서야 내가 바라던 게 뭔지 깨달았죠.”
황제국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저 웃었다. 사실 황제국에게 삼국지 영웅마다 독특한 능력을 주고,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영웅을 열어 주는 방식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디펜스 게임뿐 아니라 수많은 모바일 게임에서 사용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플레이스테이션이 아니라 모바일 게임이었다면 돈을 내고 영웅을 사서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갔겠지. 영웅 능력치를 부스터 시켜주는 아이템도 팔고.’
황제국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만약 지금이 모바일 시대였다면 황제국도 같은 방식을 제안했을 것이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식인 데다, 게임성을 해치는 과도한 과금도 아니었다. 영웅 캐릭터에 얼토당토않은 액수만 붙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어떻습니까? 나는 미스터 황의 능력을 싼값에 이용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미스터 황의 능력을 아주 높이 사고,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조건은요?”
“연봉 3백 5십만 엔. 그리고 일본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당연히 스튜디오 X가 필요한 편의는 모두 제공하겠습니다.”
“음······.”
황제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조윤권이 긴장한 눈빛으로 황제국의 눈치를 봤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괜찮은 조건이다. 졸업은커녕 이제 대학교 1학년인 황제국에게 초봉으로 약 3,500만원을 주면서 일본에서 살 집과 통역, 일본어 교육까지 제공하겠는 뜻이니까.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게임 업계의 우려와 달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콘솔이다. 전 세계에 무려 1억 240만 대 이상이 팔렸다. 2000년에 출시하게 될 플레이스테이션 2는 이를 뛰어넘어 1억 5,500만 대가 팔린다.
스튜디오 X에 취직해서 <판타지 삼국지> 게임 디자이너로 일한다면 경력을 쌓기 좋은 기회였다. 게임을 히트시키고 커리어를 쌓아나가면 PC 게임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스퀘어나 남코와 같은 일본 최고의 게임사에 들어갈 수도 있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건너가 몸값을 올리며 훗날 콘솔 게임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다.
황제국은 잠시 머릿속으로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를 오가며 온갖 히트 게임을 만든 거물이 되어 막대한 투자를 받아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였다.
“어떻습니까? 미스터 황?”
“정말 감사한 제안입니다.”
다카하시가 대답을 재촉하자 황제국이 입을 열었다. 다카하시의 눈에 잠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황제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스튜디오 X의 직원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연봉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연봉이 적은 편은 아닙니다. 저에게 지금 당장의 연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거요?”
“저는 이미 한국에서 게임 개발팀을 만들었습니다. 아직 회사는 아니고 동아리 단계이긴 하지만 모두 게임 개발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합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 통역을 도와준 윤권이를 포함해서요.”
“아······.”
조윤권은 자기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는 비록 뉴퀘스트 팀이 아니지만 잊지 않고 언급해줘서 마음이 뿌듯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희는 이미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저희 팀은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심점인 제가 사라지면 프로젝트는 십중팔구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 겁니다. 다카하시 사장님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와 저희 팀은 이제 막 시작입니다.”
“너무하네요, 미스터 황.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더 높은 금액으로 당신을 스카우트하면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하게 만드는 악덕 사장이 되는 거 아닙니까?”
“아, 그렇게 되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잠시 웃었다. 다카하시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너무나 아까웠다. 황제국은 정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늘 프레젠테이션부터 미팅까지 이미 자리 잡은 게임사 사장인 그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태도 역시 남달랐다.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잘 키울 수 있는 어린 강아지가 아니다. 이미 자기 무리를 이끌고 있는 늑대야. 그저 나이가 어려 아직 성과가 적을 뿐.’
다카하시는 바로 눈앞에 정말 탐나는 인재가 있지만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안타까웠다. 생각 같아서는 황제국과 그의 팀을 통째로 인수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국이 거절할 거라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결코 남의 밑에서 누구의 승인을 받아 가며 일할 타입이 아니었다.
“너무 아깝네요, 미스터 황. 하지만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나한테 바로 연락 주세요. 당신 자리라면 언제든지 준비할 테니.”
“고맙습니다.”
말을 하는 다카하시도, 대답하는 황제국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비즈니스의 어법이었고, 일종의 예절이었다. 이번에는 황제국이 물었다.
“그럼 다카하시 사장님. 이번에는 사장님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네? 무엇을?”
“라이선스 계약의 금액 말입니다.”
“아아아, 그렇지, 그렇지. 미안합니다. 오늘 미팅의 목적이 그거였지요. 제가 미스터 황의 아이디어보다 미스터 황을 영입하고 싶어서 잠시 깜빡했습니다. 음, 가격은, 3백 50만 엔을 원한다고 하셨죠?”
다카하시는 잠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3백 50만 엔.”
“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황제국은 약간 당황했다. 스튜디오 X가 판타지 삼국지 컨셉과 영웅 시스템 아이디어를 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한 푼도 깎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다카하시는 심지어 가격을 깎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국이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다카하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1엔도 깎지 않으니까 이상합니까?”
“네, 솔직히 조금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 가격을 들었을 때는 좀 비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입씨름을 좀 하면 50만 엔 정도 깎을 수도 있겠죠.”
황제국도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실제 계약은 3백만 엔 전후 정도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미스터 황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못할 거라는 건 아마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가 만드는 게임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이 있다고 했죠? 장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플랫폼은 아마 똑같이 PC로 만들고 있겠지요?”
다카하시의 질문을 들은 황제국은 그제야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PC 플랫폼입니다.”
“그렇다면 그 게임이 성공한다면 당연히 콘솔용으로 컨버전이 필요하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황제국도 굳이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다카하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미스터 황이 다음 게임을 만들고, 콘솔로 컨버전한다면 그 파트너로는 우선적으로 우리 스튜디오 X를 고려해 주십시오.”
“하더라도 어떤 방식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라이선스가 아니라 단순 컨버전 외주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도 우리 이름으로 내기 위해서요.”
“그러면 우리도 부담 없이 개발하고 돈만 챙기면 되는 거죠.”
다카하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카하시가 더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황제국은 그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돈 50만 엔을 아끼느니 어떤 식으로든 황제국과 연결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황제국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는 다카하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스튜디오 X에 <판타지 삼국지>의 컨셉과 영웅 시스템에 관한 기획안, 그리고 콘솔 게임을 개발해 판매할 수 있는 라이선스 권리를 총 3백 50만 엔에 팔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지금 개발 중인 게임을 콘솔로 컨버전할 때 파트너사로 최우선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스터 황.”
라이선스 계약이 황제국의 제안 그대로 확정됐다. 두 사람은 웃으며 악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