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회 - 떡밥 던지기+_+)b
“어, 그래.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 나도 되는 데까지 힘써볼게. 너무 김칫국 마시진 말고.”
“네,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전용선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황제국은 역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속으로 웃었다.
게임 엔진의 완성도를 위해 실력 있는 사람의 도움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이제 전용선은 지도교수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뉴퀘스트의 성공을 위해 진심으로 애쓸 것이다.
게임 엔진뿐 아니라, 뉴퀘스트 전용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도 전용선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미리부터 그와 좋은 관계를 쌓아 나가는 편이 훨씬 좋았다.
전용선 역시 이광철에게 촉망받는 학생이다. 그는 실력만큼이나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천상 엔지니어였다. 그는 한 번 마음에 문을 열자 황제국, 이진수에게 그의 네트워크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황제국과 이진수는 전용선 덕분에 네트워크 모듈 개발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다. 전용선 역시 두 사람의 습득력과 기술적 이해도에 또 한 번 놀랐다.
랩실 생활에 다소 지쳐있던 전용선에게 황제국, 이진수와 게임 엔진을 만드는 과정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그는 게임이 정식으로 출시할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엔진이 착착 완성되어 가는 사이, 콘텐츠도 작업물이 쌓이고 있었다. 학기 중에는 수업을 들으며 공강 시간이나 저녁 시간에만 일할 수 있었지만, 방학이 되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게임 개발에 쏟을 수 있었다.
황제국과 이진수는 매일 동방에 나오고 있었고, 다른 멤버들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습관처럼 동방에 나왔다. 일도 일이지만, 함께 있는 게 재밌고 좋아서이기도 했다. 차현주는 과제 평가를 마친 장건 초상화를 가져와 동방 벽에 걸었다.
“오~, 진짜 유화로 그린 캐릭터 초상화를 보니까 느낌 전혀 다르네. 옛날 귀족들이 왜 그렇게 초상화 많이 그렸는지 알 거 같다.”
“그러게. 진짜 멋있다. 근데 점수는 잘 나왔어?”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차현주가 얼굴을 찌푸리고 무지개가 된 머리를 손으로 흔들었다. 그래도 장건 초상화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황제국이 그림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영건 블러드>가 성공하면 메인 캐릭터들 초상화랑 스팀펑크 도시랑 비행선, 탱크 같은 것들 그려서 전시회 하면 되겠다.”
“헐, 그게 될까? 전시장 구할 수 있을까?”
“그럼. 돈 내고 빌리면 되지. 게임만 성공하면 뭐가 어렵겠어?”
“진짜 그럴 수 있음 좋겠다. 그림은 경매로 팔고, 수익금 일부는 기부하는 거야! 어때?”
“좋은데? 완전 새로운 게임 마케팅도 될 거 같고.”
“빨리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조금만 기다려 봐. 머지않았어. 분명.”
황제국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황제국은 ‘마케팅’이라는 단어에 생각이 멈췄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주야, 너 이 그림 컴퓨터로도 그릴 수 있지?”
“도트 이미지로? 그럼, 당연하지. 왜?”
“그럼, 이 분위기대로 장건 이미지 하나만 그려줘.”
“이걸? 음, 그래. 얼마나 자세하게 그려?”
“엄청 자세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디테일은 좀 죽여도 괜찮아. 저 그림의 분위기랑 느낌이 중요해.”
“야, 그게 더 어렵잖아.”
“알지, 어려운 거. 그래도 현주 넌 할 수 있잖아.”
“으유, 하여튼 저 여우. 알았어.”
차현주는 황제국의 요청에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장건의 그림을 이미지 파일로 만들었다. 몇 시간 후 파일을 받은 황제국은 흡족했다.
“오, 이제 2D는 곧잘 하네? 내가 뭘 더 가르쳐 줄 것도 없겠다.”
“그럼 이쯤에서 하산하면 되는 건가?”
차현주가 깔깔거리며 소리 내 웃었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컴퓨터를 도구로 써서 기술을 활용할 뿐, 당연히 미술이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뜻을 두고, 좋은 그림과 디자인을 많이 접하고,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생각하고, 연습하고, 익힌 감각이 중요한 분야다.
기술을 쓰는 법은 반복하면 누구라도 익힐 수 있지만, 미적 감각이란 단시간에 익힐 수 없었다. 노력만큼이나 재능이 필요한 분야였다.
‘그런 면에서는 프로그래머랑 또 비슷하단 말이지.’
프로그래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재능은 논리적인 사고력이다. 그리고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통찰력도 필요하다.
사고력과 통찰력을 키우지 않으면, 아무리 코딩 실력을 키우려고 해도 성장에 한계가 있다. 황제국이 머지않아 이미지 후처리 프로그램의 대세가 될 포토샵을 아무리 연마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차현주의 시각적 상상력과 표현력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근데 갑자기 이건 왜 그려달라고 한 거야?”
“잠깐만 기다려 봐. 내가 곧 설명해 줄게.”
“어?!”
황제국은 차현주의 이미지를 흑백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디테일이 너무 뭉개지지 않도록 명암을 살짝 손을 봤다.
“어때? 괜찮아?”
“대충 분위기는 전달 되는 거 같은데. 뭐 하려고?”
“PC 통신에 올리려고. 일종의 티저 마케팅으로.”
“티저?”
“어, 영화 예고편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PC 통신 게임 동호회 사람들한테 우리가 이런 거 준비하고 있다고 살짝 흘리는 거야.”
“아~~!”
“오, 그거 좋겠다. 사람들이 미리 우리 게임을 알고 있으면 출시할 때 반응도 훨씬 좋을 테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오종석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1998년에는 티저 광고 방식이 아직 생소했다. SNS도, 유튜브도, 인터넷 커뮤니티도 없는 시대라 게임 잡지에 광고하고, 데모를 뿌리는 정도가 거의 유일한 마케팅이었다.
그 유명한 ‘선영아 사랑해’ 광고가 나온 게 2000년. 안타깝게도 ‘선영아 사랑해’는 정작 알려야 할 광고주는 알리지 못했고, 티저 광고 방식만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았다.
방학을 하면서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황제국의 목표는 빠르면 올해 가을, 아무리 늦어도 12월 전에 <영건 블러드>를 출시하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확장판 브루드워가 나오는 게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 12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에 내야만 한다.’
지금이 7월 초. 반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부터 조금씩 마케팅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게이머들에게 미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퍼블리셔와 계약을 해야 할 때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서려면 최대한 유명한 게 유리했다.
황제국은 PC 통신 마이텔에 접속해 게임 동호회 ‘게오동’에 들어갔다. 어느새 <삼국지:공성전>을 올린 지도 넉 달이 지나있었다. PC 게이머 4월호에 번들 CD에 게임과 맵 에디터를 공개하면서 절정에 달했던 <삼국지:공성전>의 인기는 이제 많이 식어있었다.
하지만 황제국의 마이텔 ID ‘리척(LeChuck)’은 게오동에서는 <삼국지:공성전> 개발자로 이미 네임드였다. 그는 오랜만에 자료실에 새로운 글을 올리며 장건의 흑백 이미지 파일을 첨부했다.
> 10853 | 황제국 | LeChuck | [생존신고] 요즘 만들고 있는 게임 올려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얼마 전 여름방학에 들어갔습니다^^
...만 1학기 성적은... 음... ㅠ.ㅠ
그래도 괜찮습니다.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있거든요^0^/
<삼국지:공성전> 함께 만들었던 친구들, 그리고 또 새로운 엄청난 분들과 함께 작업 중이에요.
앞으로 몇 달 더 걸릴 것 같은데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글만 올리긴 그래서 만들고 있는 게임 이미지 한 장 올리고 갑니다.
반응 좋으면 컬러 버전도 공개할게요.
추천 많이 부탁드려요! +_+)b
“자, 올렸다. 이제 윤권이한테 알려 줘야지.”
황제국은 게오동에 글을 올리자마자 조윤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윤권은 여름방학이 되자 PC 게이머에서 풀타임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응, 제국아.”
“어, 윤권아. 너 내가 동아리에서 FPS 게임 개발하고 있는 거 알지?”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개발 중인 게임 컨셉 이미지 한 장을 지금 게오동에 올렸거든?”
“뭐? 지금? 잠깐만. 들어가서 볼게.”
조윤권은 곧바로 접속해서 게시물을 확인했다. 어떤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가 특이한 총을 들고 황량한 배경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바로 추천 눌렀다. 분위기 근사한데? 누구야? 주인공이야?”
“응, 반응 보고 며칠 후에 컬러 버전 올릴 거야. 전화로 설명하긴 좀 긴데, 혹시 8월호에 기사 하나 내 줄 수 있을까? 자세하게는 필요 없고, ‘<삼국지:공성전> 개발자 황제국, 차기작 이미지 공개’로 이슈 소개 코너 한 꼭지 정도면 돼.”
“에이, 무슨 소리야. 황제국인데. 나야 아직 기사 낼 권한 없지만 말씀 드리면 그 정도는 바로 내주실 거야. 인터뷰는?”
“아직 출시하려면 시간 좀 더 필요해서 인터뷰는 좀 빠르고. 소개 기사 정도면 돼.”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대신 인터뷰 할 때는 제일 먼저 우리랑 해야 된다?”
“뭐야? 벌써 PC 게이머 사람 다 된 거야? 알았어. 그건 걱정 마. 준비되면 내가 요청할게.”
“알았어. 그럼 기사는 어떻게 쓸까? 그래도 내용이 좀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필수적인 내용만 짧게 정리해서 보내줄게. e-메일 주소 있지?”
“어, 너가 스튜디오 X랑 메일 주고받는 거 보고 바로 만들었지.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석 달이 지났네.”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조만간 일본 한 번 또 가야겠네. 스튜디오 X에서 플스 용으로 만드는 거 어떤지 한 번 봐달라고 할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황제국은 <영건 블러드>에 관해 짧은 코멘트를 적어서 조윤권에게 메일로 보냈다. 컨셉과 배경, 풀3D FPS 게임이 될 거라는 아주 단순한 정보였다.
“왜 그것만 알려 주는 거야? 진행된 거는 훨씬 많잖아? 이미 인터뷰도 할 정도는 되지 않나?”
오종석이 물었다. 메일을 전송한 황제국이 대답했다.
“물론 이미 정보는 충분히 있지. 근데 뭘 하든 가진 패를 한꺼번에 다 까는 게 아냐. 그럼 오히려 손해야.”
“그런가?”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걸 계속 보여주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거든.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해. 말 나온 김에 종석이는 나랑 마케팅 계획 짜자. 어느 시점에, 어떤 정보를, 어느 정도 공개할지 정리를 해야겠어.”
“마케팅! 말만 해. 내 전문 분야니까.”
경영학과 오종석이 으쓱거리며 허세를 부렸다. 황제국은 웃으면서 게오동 게시판을 확인했다. 벌써 수십 건의 추천에,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황제국이 뿌린 떡밥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뭐지? 카우보이인가요?
> 그림 보는 데 1분 걸렸습니다. 내 전화비;;; 무슨 게임인지는 알려주세요ㅠ.ㅠ
> 카우보이 맞는 거 같은데 총이 뭔가 이상? 하네요?
> 와! 리척! 와! 황제국! 드디어 새로운 게임! *0*/
> 딱 보니까 총 쏘는 게임인듸, 넥스트 둠???
> 서부극을 만들어요? 흠...한국에서? -_-a
> 캄캄해요. 그림에 불 좀 켜주세요. 빨리!!!
> 일단 분위기 합격! 장르가 모에요?
> 게오동의 아들! 응원합니다!
황제국은 사람들이 남기는 댓글을 확인했다. 확실히 90년대 PC 통신 시대는 온라인 문화가 순하다. PC 통신을 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소수라 다들 한 식구 같은 느낌도 있고, 대체로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10년만 지나도 내용에 상관없이 일단 조롱하는 댓글이 서너 개는 달고 시작할 텐데.’
황제국은 우호적인 댓글 분위기를 보면서 혼자 웃었다. 일부러 흑백 버전을 올려서 반응 좋으면 컬러 버전도 올리겠다고 반응을 유도한 효과가 있었다. 황제국의 떡밥 글은 월등히 높은 조회수에, 추천과 댓글을 받았다.
그는 약속대로 며칠 후 컬러 버전 장건 이미지를 올렸다. 이번에는 ‘FPS 게임 개발 중^^v’을 덧붙였다. 게오동 게시판이 몇 배로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