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회 - 랭킹 시스템
“우승 축하드립니다.”
“아, 고맙습니다.”
“플레이가 정말 인상적이네요. 평소에 연습은 어느 정도나 하세요?”
“음, 모르겠어요. 그냥 밥 먹고 자는 시간 빼면 거의 항상 하는 거 같은데요?”
경기와 시상식까지 모두 마치고 황제국이 양 팀 주장에게 인사를 갔다. 먼저 우승자인 송진호를 만났다. 예상대로 그는 프로게이머들처럼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연습에 쓰고 있었다.
“플레이가 정말 남다르던데요? 제가 만들었지만 그런 플레이가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원래 게임하면서 이상한 짓을 좀 많이 해요. 그래서 친구들은 쫌 싫어하죠. 그래도 지들이 어쩌겠어요?”
“친구들이랑 주로 PC방에서 많이 하세요? 인천팀 분들하고?”
“네, 학교 앞에서. 거기가 젤 싸거든요.”
“혹시 게임 하면서 좀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점은 없으신가요?”
“음···, 캐릭터에서요?”
“파워 밸런스도 좋고, 맵에 대해서, 아니면 이런 모드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이요.”
송진호는 게임을 하면서 느낀 아주 작은 디테일에 관해 몇 가지 얘기했다. 황제국과 오종석은 송진호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깜짝 놀랐다.
“혹시 나중에 저희 콘텐츠팀이랑 미팅 한 번 잡아도 괜찮을까요? 저희가 참고해야 할 내용이 많은 거 같네요.”
“아, 네. 그럼 저야 영광이죠! 연락 주세요.”
황제국은 한기석에게도 연락처를 물었다. 놀라운 컨트롤로 창의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쇼맨십도 있는 송진호에 비해 한기석은 정석적인 플레이에 집중하는 스타일. 나중에 또 어떤 선수가 등장할지 아직 모르지만 황제국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스타일로 <영건 블러드> 게임판에서 큰 인기를 끌 것 같았다.
그렇지만 e-스포츠 프로리그가 본격화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프로게이머 협회나 게임 전문 케이블 TV 방송국이 설립되기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의 시간이 더 남았다.
예전에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하나였지만, 이제는 <영건 블러드>가 프로리그에 가세하게 될 것이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프로게이머 입장에서도 게임 콘텐츠는 다양할수록 좋은 법이다.
황제국은 당분간 송진호와 한기석을 뉴퀘스트 차원에서 후원하면서 그들과 같은 게이머들이 더 등장하도록 서포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들, 랭커들이 더 생기도록 퀘스트넷에 랭킹 시스템을 추가해야겠어.’
누가 고수인지 아닌지, 직접 해보지 않고도 알려면 전적을 공개하면 된다. 하지만 <영건 블러드> 퀘스트넷은 전적을 본인만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전적이 낮은 게이머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길까 봐 취한 조치였다.
제1회 챌린지 리그를 마친 황제국은 이제 퀘스트넷에 중수나 고수들을 위한 랭킹 시스템이 따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준비에 착수했다.
황제국과 오종석은 챌린지 리그를 중계하고 온 이야기부터 전했다. 송진호, 한기석의 놀라운 플레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 플레이가 가능하다고요?”
“설마? 오버해서 얘기하는 거 아냐?”
“전혀요. 이번 리그는 예선부터 결승까지 전부 영상으로 찍어놨으니까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아직 퀘스트넷에는 게임 리플레이 기능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플레이한 경기를 다시 보려면 비디오카메라로 찍는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유필승과 전용선은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유필승은 뉴퀘스트 입사 전까지 거의 퀘스트넷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역시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아, 혹시 걔가 걘가? 대표님, 그 친구들 아이디가 뭔가요?”
황제국이 송진호의 퀘스트넷 아이디를 들려주자 유필승이 이마를 탁 쳤다.
“아! 걔네. 걔 맞네. 어쩐지!”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12월에 크리스마스 즈음인가? 그때 새벽쯤에 심심해서 일대일을 하는데 이놈이 플레이가 이상한 거예요.”
“어떻게 이상해요?”
“날 보고도 총을 안 쏴요.”
“네?”
“나도 처음에는 뭐지? 총알이 없나? 아니면 버근가? 싶었거든요? 근데 아니었어요. 총알이 없으면 권총을 쏘든, 아니면 일단 도망이라도 쳐야 하잖아요? 근데 이놈은 내가 총을 쏘면 움직임으로만 계속 내 총알을 피하는 거예요.”
“그래서요?”
“내가 그때 황산이었고, 상대가 왕소현이었는데. 알잖아요, 왕소현 빠른 거. 그래도 황산 쌍권총도 느리지 않은데 내가 총구를 움직이면 귀신같이 나보다 먼저 움직여서 총알을 피하더라니까요?”
유필승은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점점 흥분했다.
“뭐지, 이 새끼? 뭐지, 이 새끼? 이러면서 계속 총을 쏘는데, 차츰차츰 거리를 좁히더니 어느새 내 눈앞으로 와서 칼로 쓱-!”
유필승이 손으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는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지 얼굴까지 빨개졌다.
“와~! 그때 열 받아서 어떻게든 저놈 내가 잡고 만다고 다섯 판인가, 여섯 판인가 했거든요? 진짜 완전 능욕만 당했죠. 근데 그놈이 우승자네. 어쩐지~.”
유필승은 이제 모든 것을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는 왜 랭킹 시스템이 필요한지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나 하다 보면 내 위치가 어디쯤 되지? 궁금하잖아요. 근데 현재 퀘스트넷은 그걸 일부러 알 수 없게 해놨죠.”
“그렇지.”
“그래서 자기 랭킹이 궁금한 사람들이 따로 랭킹을 확인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아예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려고 합니다.”
“왜? 그냥 전적을 다 공개하면 되잖아?”
“그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적을 전부 공개하면 전적 관리한다고 일반 게임에서 이상한 짓 하는 사람이 늘어날 거예요.”
“흐음.”
“자기가 생각하기에 중수 이상 실력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진검승부를 벌이는 투기장! 그런 아레나를 열고 싶어요.”
“오! 그 이름 괜찮네, 아레나. 영건 아레나.”
“저도 괜찮은데요?”
황제국이 제일 직관적인 단어를 말한 것뿐인데 랭킹 시스템 이름이 ‘영건 아레나’로 정해졌다. 황제국은 구상하고 있는 영건 아레나 시스템에 관해 설명했다.
“일단은 테스트 삼아 일대일만 열어서 해봐요. 시즌제 형식으로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기간을 정하고, 전적을 따져서 랭킹을 매기는 거예요. 그리고 시즌이 끝나면 전적은 리셋하고요.”
“왜? 누적으로 하지 않고?”
“전적을 계속 누적하면 나중에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 불리하지. 내가 아무리 해도 내 앞에 2,000판을 이긴 사람이 있으면 도전하고 싶겠어?”
“아, 하긴 그렇겠네.”
“그럼 시즌 1에서 1등이었어도, 시즌 2에서는 그냥 똑같이 0에서 시작하는 건가?”
“그렇죠. 이전까지의 전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지금의 실력만으로 랭킹을 매겨야 해요.”
“와, 살벌하겠다. 근데 재밌겠다. 누가 진짜 잘하는지도 눈에 보이고.”
“그게 중요해요. 누가 <영건 블러드>의 진짜 고수인지 한 눈에 드러나게 하는 거. 게임이라는 게 또 자존심을 엄청 자극하잖아요?”
“그치! 딴 건 참아도 나보고 게임 못 한다고 하면 그건 못 참지.”
“그러니까 누가 진짜로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예요. 단, 원하는 사람들끼리만. 맵도 시즌마다 몇 개로 한정합니다. 최대한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요.”
황제국이 랭킹 시스템을 만들려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송진호와 한기석 같은 괴물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럼 ‘영건 아레나’ 개발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볼까요?”
전체 프로젝트 PM은 황제국이 맡기로 했다. 유필승과 오종석은 시스템 기획을 함께하고, 유필승이 매 시즌 아레나용 맵을 선정하면서, 아레나 전용 맵을 하나씩 만들기로 했다. 전용선은 일반 게임과 다른 아레나용 매칭 알고리즘을 개발하기로 했다.
“아레나용 매칭 알고리즘은 좀 골치 아프겠네. 민감한 부분이 있어서.”
전용선이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하며 말했다. 아레나는 누구와 매칭되어 싸우느냐에 따라 전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아레나 공정성의 핵심은 매칭 알고리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승률, 특정 맵에서의 승률, 일반 게임에서의 승률 등 고려할 변수가 많았다. 가능하면 실력이 비슷한 사람과 매칭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붙으면 아레나의 진짜 목적에 위배된다.
“그래서 랭킹은 승패 전적이 아니라 반드시 점수로 매겨야 합니다. 단순히 승률이 높으니까 랭킹이 높으면 안 돼요. 자기보다 승률이 높은 상대를 이겼을 때는 가산점을 주고, 반대일 때는 점수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해야죠.”
“그럼 매칭 알고리즘에, 점수를 매기는 방법까지 같이 고려해야겠네. 그래야 처음 목적에 부합하는 랭킹 시스템을 만들 수 있겠어.”
“네, 알고리즘은 아레나를 하면서 조금씩 개선한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완벽한 알고리즘은 없으니까요.”
전용선 성격을 아는 황제국이 미리부터 주의를 주었다. 이진수나 전용선은 이슈 하나를 붙들고 있으면 완벽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골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국은 퀘스트 엔진을 만들 때도 이진수가 너무 한 기능만 오래 붙들고 있지 않도록 했다.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때때로 숲보다 나무에만 빠져 있는 엔지니어의 시야를 넓히는 것도 황제국이 꼭 체크해야 할 일이었다.
아레나 프로젝트는 뉴퀘스트 내부에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콘텐츠 팀과 개발 엔지니어가 협업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개발팀은 엔진과 서버를 만들고, 콘텐츠팀은 스토리와 캐릭터와 맵을 만들었다. 그러면 다시 개발팀이 코딩해서 게임을 완성했다.
그러나 퀘스트넷은 싱글 플레이와는 달랐다. 정해진 세계를 반복하는 싱글 플레이와 달리, 퀘스트넷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태계고, 우주였다. 개발팀의 의도가 제대로 통할지 아닌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레나라는 대형 프로젝트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콘텐츠팀과 서버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콘텐츠팀은 기능과 운영에서 서버의 운영 능력과 개발 기간을 생각해야 하고, 서버팀 역시 알고리즘과 랭킹 점수에 관해 콘텐츠팀의 검증이 필요했다.
팀 구성이 철저히 기능적으로 나뉘어 있는 뉴퀘스트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오직 황제국만이 전체적인 관점에서 기획과 개발을 조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구성원들의 시야를 넓혀야 할 때였다. 그런 면에서 아레나 프로젝트는 기획과 개발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겉으로 보기엔 경쟁심을 자극하는 아주 단순한 랭킹 시스템이지만, 잠재적 파급력은 커다란 프로젝트였다. <영건 블러드>를 즐기는 문화를 바꾸고, 장래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는 새싹들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서비스였다.
뉴퀘스트는 <영건 블러드> 확장판 콘텐츠 개발과 함께 영건 아레나 시스템 개발을 위해 겨울방학에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커뮤니티 매니저 엄지원도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뉴퀘스트에 정식으로 합류했다. 이제 랩실에는 전용선, 박태권, 유필승, 엄지원까지 네 명으로 늘었다.
“벤처라서 그런가. 회사가 대학 안에 있으니까 엄청 신기하네요. 꼭 캠퍼스가 다 우리 회사 같고 엄청 좋은데요?”
엄지원은 다행히 S대 컴퍼스 안에 있는 근무 환경에 아주 만족했다. 다만 공간이 동방과 랩실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좀 아쉬워했다.
“빨리 친해지려면 다들 함께 있는 게 좋은데. 그게 좀 아쉽네요.”
“사실 저도 그게 지금 제일 아쉬워요. 그렇게 많은 인원도 아닌데.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네요.”
처음 황제국, 이진수, 차현주, 오종석 네 명으로 시작했을 때만 해도 동방은 넓게만 느껴졌다. 온통 지저분한 동방을 청소하고, 큰 책상에 소파까지 새로 놓고, 컴퓨터는 물론 콘솔까지 설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유진이 들어오자 더이상 업무 공간을 늘리긴 힘들었다. 실험실 벤처를 창업하며 랩실 공간을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뉴퀘스트는 돈을 잘 벌고는 있지만, 창업 멤버들이 모두 S대에 기반하고 있어서 쉽게 자리를 옮기기 힘들었다. 또한 S대의 모든 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는 장점도 만만치 않았다.
‘서버를 IDC로 옮기면 전부 랩실로 들어갈까?’
사실 뉴퀘스트가 벤처 창업을 한 이후, 뉴퀘스트가 동방을 계속 이용할 명분은 없었다. 워낙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덕분에 공대에서 눈 감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영건 블러드>의 모든 추억이 담긴 뉴퀘스트 동방에 황제국은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분명 사무실을 옮겨야 할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 생활을 누리고 싶었다.
새로운 멤버가 합류하고, 확장판과 아레나 프로젝트가 착착 돌아갔다. 뉴퀘스트는 멤버들은 본편을 만들며 쌓았던 노하우를 고스란히 확장판에 적용할 수 있었다.
이제 황제국이 초기 기획을 잡아놓으면 예전처럼 디테일한 피드백은 필요 없었다. 확장판과 아레나가 본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 황제국은 홀로 일본 출장길에 올랐다. <영건 블러드>를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