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회 - 제국력 1년
<영건 블러드> 출시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각종 게임 잡지가 12월호를 내기 시작했다. 98년 마지막 호 잡지에 등장하는 게임은 하나같이 모두 쟁쟁했다.
먼저 포문을 여는 대작은 <스타크래프트 - 브루드 워>와 액션 RPG의 명작 <발더스 게이트>였다. 두 작품 모두 12월 중에 발매를 준비하고 있었다. <발더스 게이트>는 개발 일정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디아블로 2> 떡밥과 맞물려 액션 RPG 팬들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한국 RPG 게임의 신화를 쓴 <제네시스 워>가 외전2 ‘태풍의 눈’을, 어드벤처 게임의 명가 루카스아츠에서 3D 어드벤처 <그림 판당고(Grim Fandango)>를, 라라 크로프트가 등장하는 <툼 레이더 3>, 스포츠팬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피파 99>, 여기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가 합본팩 출시를 예고했다. 콘솔은 최고의 기대작 <파이널 판타지 8>이 99년 초 발매 대기 중이었다.
하나 같이 게임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굵직한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쟁쟁한 게임들 틈에 <영건 블러드>가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오종석은 서점을 순회하며 시중에 나온 게임 잡지란 잡지는 종류별로 전부 사서 <영건 블러드> 광고가 제대로 집행되었나 확인했다.
“PC 게이머는 당연히 잘 나왔고, 게임 사랑 있고, PC 온라인 나왔고, 게임 파워···도 여기 있고. G챔프, G챔프···도 OK!”
오직 콘솔 게임만 다루는 게임 잡지는 제외하고, PC 게임 잡지와 PC 잡지 십여 종에 <영건 블러드> 발매 광고가 나갔다. 사실 90년대 게임 광고는 다소 유치한 경우가 많았다. 패키지 일러스트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게임 그래픽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해상도가 낮은 게임 그래픽을 인쇄 매체에 쓰다 보니 썩 느낌이 좋아 보이지 않았고, 게임을 설명하는 카피의 서체나 배치 등이 전체적으로 엉성했다. <영건 블러드> 광고를 준비할 때 다른 게임 광고를 참고하려던 차현주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리 게임은 절대 이런 비주얼로 나갈 수 없어! 눈이 썩을 거 같다고!”
차현주는 직접 광고 시안 초안을 잡고, 오공실업이 잡지사에 광고를 집행하기 전에 최종 시안도 미리 받아 확인했다. 몇 달에 걸쳐 <영건 블러드> 캐릭터를 디자인한 차현주는 기존 일러스트를 살짝 변경하고, 배치를 달리해서 훨씬 세련된 광고 이미지를 만들었다. 광활한 만주의 평야에 캐릭터들이 포즈를 잡고, 깔끔한 서체에 광고 카피가 올라갔다.
“멋지긴 한데, 뭔가 쫌 심심하지 않아?”
“이것저것 눈 어지럽게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아.”
“그래, 어차피 뒤에 후속 기사 붙을 테니까 광고에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필요 없어.”
황제국도 담백한 광고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광고는 다른 광고의 틈바구니 속에서 단연 돋보였다.
“와~, 다른 게임 광고보다가 우리 게임 광고 보니까 눈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괜찮죠, 언니?”
광고를 확인한 황제국은 다음으로 잡지들이 <영건 블러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폈다. 광고가 멋진 일러스트 이미지와 정돈된 배치로 차별화해도, 게임에 관한 평가가 좋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광고야 돈만 내면 실을 수 있지만 기사는 그럴 수 없었다.
황제국은 게임 최종 데이터를 오공실업에 보내면서 잡지사에도 함께 보냈다. 게임 잡지 기자들은 출시 전 충분히 싱글 플레이를 해보고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1월 말에 12월 호를 내야 하는 월간지 일정상, 미리 보내주지 않으면 12월 호에 <영건 블러드>를 평가하는 기사를 쓰기 어려웠다.
뉴퀘스트 멤버들은 모여서 함께 <영건 블러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먼저 오종석이 PC 게이머의 <영건 블러드> 특집 기사를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황제국이 설립한 뉴퀘스트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기대받는 게임 개발사다. 그는 아직 대학 1학년에 불과하지만 <삼국지:공성전>으로 가능성을 보여준 후, 1년도 되지 않아 손정인의 소프트펀드로부터 15억을 투자받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뉴퀘스트는 연내 FPS 게임을 출시할 거라 PC통신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그 약속을 200% 지켰다.”
“오오오오~!!!!”
오종석의 낭독에 황제국은 살짝 얼굴이 간지러웠다. 모두 맞는 말만 있었지만 듣고 있자니 민망했다. 멤버들도 황제국이 민망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를 놀렸다.
“뉴퀘스트가 11월 21일 발매한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 FPS <영건 블러드>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게임을 하면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턱이 아플 지경이다. 이 게임에서 최고의 특징을 뽑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면에서 지금껏 보아온 한국 게임과는 전혀 다른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기사의 극찬에 뉴퀘스트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국은 학교 선배 이진수와 둘이서 게임 엔진을 만드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존 카맥이 <둠>을 만들 때 그랬듯, 그들의 게임 엔진은 최고급 스포츠카처럼 시대를 단숨에 앞서갔다. 이들은 게임 엔진에 ‘퀘스트 엔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퀘스트 엔진은 한국 게임의 기술력을 5년은 앞당길 놀라운 그래픽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움직임과 눈부신 특수효과, 여기에 국내 최고 성우를 고용해 게임에 생동감을 더했다. 심지어 총소리까지 미국에서 녹음해 오직 이 게임을 위해 따로 믹싱했다고 하니,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종석은 기사 마지막에 이르러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이 게임은 98년 한국 게임계에 내려온 축복이자 선물이요, 계시이자 새로운 발판이다. 어렵고 힘들었던 한국의 게임 개발 역사는 이제 과거로 묻어두자. 우리는 90년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영건 블러드>는 새로운 시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온 게임이 분명하다. 이제 모두 새로운 전설을 맞이하라. 21세기는 벌써 시작되었다!”
멤버들은 호평을 넘어 찬사를 쏟아낸 기사에 박수를 보냈다. 황제국은 다른 잡지들도 둘러보았다. PC 게이머는 뉴퀘스트와 친밀한 매체였다. 다른 매체에서는 뭐라고 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화려한 런칭쇼와 함께 시작한 <영건 블러드>. 한국 게임 개발사의 새로운 피가 흐른다.
- 대학 축제로 기대 모은 <영건 블러드>. 뚜껑 열어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천지!
- 까고 싶어도 깔 게 없다. 그래픽, 게임성, 스토리, 캐릭터, 사운드, OST까지 올해 최고의 게임.
- <영건 블러드>는 과연 <스타크래프트> 독주를 막아설 유일한 게임 될까?
- 화려한 스킬과 속도감에 박진감 넘치는 멀티 플레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FPS!
- PC방에서 밤새다 마감 놓칠 뻔한 기자의 항변. “두 시간 한 줄 알았는데 23시간을 했더라.”
- 인터넷에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FPS의 새 지평 여는 <영건 블러드>
- 스팀펑크? 만주 웨스턴?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도 재미있어 미치는 게임!
- 98년은 그냥 이걸로 끝났다. <영건 블러드> ★★★★★
황제국은 잡지를 넘길 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뉴퀘스트가 힘을 합쳐 정말 열심히 만들었고, 여러 인연을 만나 고마운 도움도 많이 받았다. 여기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뉴퀘스트가 발전하고, <영건 블러드>가 성공하는 길이었다.
가장 많이 게임을 접하는 게임 기자들이 쏟아내는 호평은 그를 흐뭇하게 했다. 98년을 쏟아부은 노력의 결실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오동을 비롯한 PC 통신 게임 동아리에도 진짜 리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런칭행사를 보고 간 회원들의 후기와 멀티 플레이 어떻게 하냐는 질문, 3D 가속 그래픽 카드 없으면 꼭 PC방에 가야 하냐는 질문 등이 많았다. 리뷰로 올라오는 글도 짧은 소감 위주였다.
이제는 진짜 게임에 대한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이머들의 반응이란 기자들보다 훨씬 날 것이었다.
- 싱글 다 깨고, 다시 또 깨고, 지금 세 번째 깼는데도 재밌습니다. 모뎀 문제인지 인터넷 자꾸 끊겨서 멀티는 못 하는 중ㅠ.ㅠ
- 이록 살아서 튀었을 때 혈압 올라서 키보드 부술 뻔했네요. 다음 편 나오는 거 맞죠?
- 장건 총 진짜, 어후, 번쩍번쩍!
- 내 마음은 지금 만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만주에서 <영건 블러드> 정모 하실 분?
- 5대5 팀원 모집합니다^^ 이미 세 명 있고 섬멸전 중심으로 빡세게 하실 분?
-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컴퓨터 사러 갑니다. 꼬물 컴은 서럽습니다······.
- 밤에 게임 하다가 엄마가 강도 든 줄 알았다고 등짝 씨게 맞았습니다. 총소리 살벌해요.
- 섬멸전 말고 되살아나는 모드가 좋네요. 섬멸전은 맨날 시작하자마자 죽어...OTL 뭘 할 수가 없어요ㅠ.ㅠ
- 다들 멀티 재밌다고 난리인데, 하기 전에 싱글 꼭 먼저 하세요. 그래야 캐릭을 이해함.
- 이록 스나이퍼 모드 이거 사람이 맞출 수 있는 거 맞나요? 한 번을 못 맞추겠네.
- 장건이 스킬 쓰고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이러는 거 나만 오글거려요?
- 황산이 “먼저 뽑아. 이런 벌써 죽었네?” 이러면서 쪼갤 때 똑같이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 영등포 근처 <영건 블러드> 할 수 있는 PC방 아시는 분?
- 솔직히 다들 황제국, 황제국 이럴 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난리들이냐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의 저를 반성합니다.
- 내가 한국 게임해보고 우리나라에 자부심 느끼기는 진짜 첨이다··· 고맙다, 뉴퀘스트!
- 한국 게임은 황제국 전과 황제국 후로 나눈다. 고로 98년은 제국력 1년이다.
다행히 엔딩에 관해서는 우려했던 것에 비해 사람들의 반발이 크지 않았다. 이록이 사라져서 빡쳤다는 반응은 종종 있었지만 그뿐이고, 비난이나 악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황제국도 전유진에게 마음 놓고 게임 평을 보여줄 수 있었다.
게임 출시 직전, 피크로 치달았던 온라인 데모 접속자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출시 직후 데모 접속률이 수직 강하한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품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당연하지. 솔직히 둘은 다른 게임이잖아? 정품 한번이라도 해보면 데모 못 하지.”
전용선은 데이터를 비교하며 황제국에게 말했다. 그는 온라인 데모도 워낙 훌륭하고, 특히 그래픽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식판이 나와도 여전히 온라인 데모만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특수 효과와 텍스쳐 등 그래픽이 보강되고, 캐릭터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등 각종 효과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총마다 어울리는 총소리를 새로 입힌 정식판을 해보고는 그가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게임의 완성도를 올린다면서 사운드 등 후반 작업에 돈을 퍼붓고 수선을 떠는 황제국을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진수와 황제국이 만든 퀘스트 엔진의 그래픽 성능이 워낙 뛰어나기도 했고, 기존에 있던 기본적인 효과음만으로도 현장감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후반 작업에 돈을 쓴다고 서버 비용을 줄이지는 않으니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심장을 조이는 듯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유희철의 OST와 귀가 아니라 심장에 박히는 듯한 총소리, 그리고 바닥의 특성까지 반영해 변하는 발자국 소리 등이 들어가자 온라인 데모는 마치 무성 영화처럼 느껴졌다. 스피커가 아무리 구려도 막상 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전용선은 서버 엔지니어고, 게임 콘텐츠에 관여할 포지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뉴퀘스트라는 회사의 특성상 그가 목소리를 내면 결코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한 달간의 개발 과정을 보면서 전용선은 그와 황제국의 ‘게임’에 관한 창의력과 감각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전용선은 그가 뉴퀘스트에 입사하기로 결정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가장 먼저 퀘스트넷 데이터를 확인하는 그는 이 게임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먼저 피부로 느꼈다. 요즘은 어쩌면 그가 살면서 했던 결정 중에서 최고의 결정인지도 몰랐다.
‘그때 지분 1%만 더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전용선은 뒤늦게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미 떠난 버스였다. 그저 뉴퀘스트에 합류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기로 했다. 대기업에 대한 미련 따윈 이제 깨끗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