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회 - 던전 속으로
<젤리 러쉬>를 런칭하기 전까지 뉴퀘스트의 수익원은 <영건 블러드>가 거의 유일했다. 그 외에는 퀘스트 엔진 라이선스 비즈니스가 막 활성화되는 정도였다.
그러다 <젤리 러쉬>가 출시하면서 뉴퀘스트가 벌어들이는 돈도 다양해졌다. 기본적인 패션 아이템 매출 외에 젤리, 해피해피밀 등 캐릭터 라이선스 로열티가 추가되었고, 브랜드 테마가 첫 계약에 성공하면서 매출을 쉐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라이선스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PC방 매출이 안정적인 지지대 역할을 했다. 2001년 크리스마스 주간의 폭발적인 매출 이후, 2002년 1월에는 전월 대비 매출이 하락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테마의 대성공 때문에 매출이 깎인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견고한 흐름이었다.
매출이 불안정한 건 부분 유료화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었다. 한국에서는 PC방 매출이 이러한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었다. 처음에는 꺼렸던 PC방 업주들도 <젤리 러쉬>의 인기 때문에 이제는 설치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친구들과 PC방에서 <젤리 러쉬> 젤리를 먹으며 <젤리 러쉬>를 하는 것이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행을 넘어 방과 후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젤리에 이어 인형이 출시되고, 아이들을 타겟으로 한 <젤리 러쉬> 문구류도 나오기 시작했다. <젤리 러쉬>는 모니터 밖으로 나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의외로 생각보다 큰 매출이 나오는 곳은 컬러링(통화연결음)이었다. 뉴퀘스트는 컬러링과 벨소리로 <젤리 러쉬> 메인 테마와 BGM 몇 가지를 제공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쏠쏠한 매출이 나왔다.
게다가 <젤리 러쉬> 크리스마스 특별 음반도 한국과 미국 판매량을 합치면 50만 장이 넘었다. 이제 <젤리 러쉬>는 무엇이든 손대기만 하면 성공하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유럽으로 떠난 전용선은 3월 중 OBT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하워드는 아시아 시장에 <젤리 러쉬> 출시 준비를 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젤리 러쉬>가 한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수익원을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열심히 움직이는 동안, 팔로 알토 오피스 한쪽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뉴퀘스트의 미래가 차곡차곡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래의 한 축은 퀘스트 엔진 v2.0이었다. 이진수는 황제국이 끌어모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퀘스트 엔진의 각종 기능 모듈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있었다.
퀘스트 엔진의 기본 프레임을 만들었던 황제국은 v2.0 업그레이드에는 코딩을 한 줄도 하지 않았다. 이미 뉴퀘스트에는 코딩 능력에서 황제국을 뛰어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황제국은 전체적인 엔진 시스템만 개괄하고 기능별로 어떻게 연결하고, 데이터의 흐름은 어떻게 할 지 등 구조 문제만 상의했다.
퀘스트 엔진 v2.0은 4년 전 퀘스트 엔진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발전했다. 640x480, 800x600 두 가지 해상도만 지원하는 퀘스트 엔진에 비해 v2.0은 4:3 화면비에서 1024x768, 1280x960의 고해상도는 물론, 1280x720 HD 해상도까지 개발 가능했다.
GPU 파이프라인이 프로그래밍 가능해지면서 3D 그래픽에는 더 큰 가능성이 열렸다. 그렇지만 이진수는 정작 2001년에 나온 GeForce 3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GeForce 3를 오버클럭(Overclocking, 설계보다 프로세서 동작 속도를 높이는 것)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엔진 본부 개발자들과 함께 드라이버를 개조하고, 두 대의 GeForce 3를 연결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GPU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연구를 거듭했다.
엔진 본부는 커다란 책상 하나를 비운 다음 컴퓨터를 케이스도 없이 해체해 놓고 수시로 그래픽 카드를 연구했다. 책상 한쪽에는 시중에 나온 온갖 3D 그래픽 카드가 종류별로 쌓여있었다. 그러다 망가져서 버리는 카드도 부지기수였다.
그래픽 향상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진수는 이제 엔진의 성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퀘스트 엔진으로 짧은 애니메이션 시퀀스를 만들어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시간 플레이가 필수인 게임 엔진인 만큼 테스트 역시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잘됐네요. 마침 테스트용으로 딱 맞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때마침 황제국이 사내에서 RPG 전투 시스템을 테스트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뉴퀘스트의 미래를 준비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황제국은 두 개의 축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차세대 퀘스트 엔진과 차기작 RPG가 만나 공명하면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는 뉴퀘스트가 또 한 번 퀀텀 점프(Quantum Jump, 물리학에서 양자가 불연속적으로 도약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 기업이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할 때도 쓰인다)를 해낼 수 있었다.
네이트와 올슨은 곧 이진수를 찾아가 차세대 퀘스트 엔진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이상하게 영어는 전혀 더듬지 않은 이진수가 두 사람에게 빠르게 핵심적인 사항을 전달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기능 개선에 신경 쓰느라 아직 UI를 전혀 다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훨씬 다루기 복잡할 수 있는데 양해해 주세요.”
“아직 정식 버전도 아닌데 당연하죠. 열심히 연구해 보고, 정 모르겠으면 물어보러 오겠습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곧 이리로 자리도 옮기실 테니까.”
“네? 자리를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 제국이가 아직 얘기 안 했어요? 두 분 이제 게임 엔진 본부로 발령 날 거예요. 여기서 차세대 엔진으로 게임 만들어 보면서 엔진 개선점도 함께 논의해 주세요. 마침 두 분이 엔진 기술 지원팀이니까 고객사들 요청 사항도 잘 알고 계실 테니 일석이조잖아요?”
“왓? 진짭니까?”
네이트와 올슨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곧장 황제국에게 달려갔다.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깜빡했나 봐요. 맞아요. 두 분 소속을 엔진 본부로 옮기려고 합니다. 일단은 QA 파트인데 새 엔진으로 RPG 만들면서 개선점 전달하시면 되는데. 왜,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요!”
콤비는 동시에 두 손을 흔들었다. 누구보다 두 사람이 바라던 바였다. 이제 두 사람에게 RPG 전투 시스템 개발은 더 이상 사이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본업’이 되었다.
게임 엔진 라이선스 매니저는 둘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샌디가 약속대로 개발자 인력을 충원해 주었고 황제국이 직접 지시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좋은 게임 만들어 봐. 그래야 차세대 엔진 사업도 잘되지.”
네이터와 올슨 콤비는 매니저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들에게 게임 엔진 기술 지원 업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 개발자라고 해서 모두 대단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친절하게 매뉴얼에 모두 설명되어 있는 걸 계속 묻는 건 귀찮아도 할만했다. 게임 엔진 버그라고 길길이 날뛰며 전화하길래 코드를 열어봤더니, 스펠링 오류 때문에 함수가 호출되지 않는 기초적인 실수인 걸 발견했을 때는 정말 클라이언트 회사까지 찾아가고 싶었다.
게임 회사도 여러 종류가 있듯 게임 개발자라고 해도 실력과 성격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렇다고 클라이언트를 고를 수는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필수인 기술 지원 업무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시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끓고 있었다. 비록 <영건 블러드>의 캐릭터를 도용(?)하고 별다른 배경 스토리나 세계관도 없이 시간을 쪼개가며 만들고 있었지만 정말 즐거웠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즐거움과 새로운 것을 만드는 즐거움은 단어는 같아도 사실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네.”
두 사람은 의자로 자기 컴퓨터를 옮겨 새로운 자리로 이동했다. 개인 짐까지 이사를 마친 둘은 컴퓨터를 설치하자마자 곧장 차세대 퀘스트 엔진 성능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야, 이거 셰이더 효과 좀 봐봐! 미쳤네. 그냥 미쳤어.”
“옛날 버전이랑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까?”
두 사람은 똑같은 오브젝트를 하나는 기존 퀘스트 엔진으로, 또 하나는 차세대 퀘스트 엔진으로 불러왔다. 동일한 광원을 주고 카메라를 돌려보며 두 대의 모니터에서 효과를 확인했다.
“오오오오오~!”
똑같은 해상도와 텍스처를 입힌 오브젝트였지만 한 눈에도 차이가 확연했다. 차세대 퀘스트 엔진의 자연스러운 빛 반사와 그림자 효과는 사물의 질감과 깊이감을 훨씬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두 사람은 매의 눈으로 그래픽 차이를 확인하며 감탄했다. 광원이 움직일 때마다 밝아지는 부분과 어두워지는 부분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변했다.
“이번에는 고해상도로 올려보자!”
네이트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최고 해상도의 오브젝트를 로딩했다. 16세기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를 3D로 모델링한 오브젝트였다.
고해상도라 파일 용량도 크고 로딩에도 시간이 걸렸다.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로딩바가 끝까지 움직이자 올슨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씨발!”
화면에 갑옷이 뜨자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똑같은 욕을 내뱉었다. 늘 보던 640x480 해상도의 네 배나 되는 고해상도로 모델링 된 풀 플레이트 아머는 너무나 선명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갑옷 곳곳에 새겨진 무늬가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우와아아아!”
갑옷에 광원을 더하자 네이트와 올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빛이 지나갈 때마다 갑옷의 도드라진 부분이 빛을 반사해 번쩍거렸다. 투구에서부터 탄탄한 가슴을 지나 복잡한 관절로 이루어진 건틀릿과 뾰족한 발끝까지, 빛이 흐르는 지점을 따라 퀘스트 엔진 v2.0은 반사광이 빛나야 할 자리를 빠르게 계산했다. 어색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봐, 네이트. 상상해 봐. 사악한 악마를 잡으려고 이렇게 번쩍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한 손에는 롱소드,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어두운 던전으로 들어가는 거야. 주변은 온통 깜깜한 어둠인데 횃불을 반사하는 기사의 검과 갑옷만 던전 속에서 번쩍이지. 어디선가 으르릉거리는 몬스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둠 속에서 조금씩 모습이 드러나는데······! 크, 분위기 진짜 미칠 거 같지 않냐?”
“내가 남자가 하는 말 듣고 이렇게 가슴이 떨리긴 처음이야. 우리 만들던 거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던전, 무조건 던전으로 들어가야 해!”
“그래, 역시 RPG의 근본은 던전이지. 던전으로 다시 만들자!”
퀘스트 엔진 v2.0의 성능을 확인한 네이트와 올슨은 지금까지 만들었던 프로토타입을 버리고 차세대 엔진의 성능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제작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획부터 다시 잡았다.
“올슨, 우리가 명색이 RPG 개발잔데 아무리 전투 시스템을 만든다고 해도 기초적인 세계관은 잡고 가자. 너무 아무것도 없으니까 상상하기가 힘들어.”
“그래. 그게 낫겠다. 진짜 게임에서 쓰이지는 않겠지만 일단 우리가 개발할 때는 컨셉을 잡고 가자. 그래야 진짜 게임 같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RPG 전투 시스템을 만들던 두 사람은 차세대 엔진의 표현력을 보는 순간 어둠 손에서 횃불이 타오르듯 영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전투 시스템에 설정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 시대 설정은?”
“당연히 중세. 무기는 칼, 도끼, 창, 활, 그리고 마법.”
“좋아. 그럼 전투 타입도 맞춰서 만들자. 초근접 도끼, 근접 칼, 원거리 창과 활, 그리고 신비로운 힘 마법으로.”
“스팀펑크나 근대적인 느낌은?”
“없어. 던전에는 그런 거 안 어울려.”
“그건 그래. 그럼 기본 스토리는 아까 말한 대로 악마를 잡으러 던전으로 들어가는 전사로 할까, 네이트?”
“음······. 주인공이 사는 마을에는 고대로부터 악마가 산다는 전설의 동굴이 있어. 사람들은 무섭다고 피하는데 마을 어린이들은 담력을 자랑한다고 동굴에 가보고는 하지. 그러다 마을에서 행패 부리고 다니는 시장의 아들이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모험을 한답시고 그 동굴에 들어간 거야. 그런데 그중에서 딱 한 놈만 살아 돌아오지.”
“오, 살아 돌아온 녀석이 주인공이겠네. 역시 동굴에 악마가 살고 있었나?”
“그래, 잘 아네. 하지만 사실 악마는 깊이 잠들어 있었어. 깨어 있는 건 악마의 졸개들이었지. 졸개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사냥감을 순식간에 해치웠고, 던전 깊은 곳에서 자고 있던 악마가 그 피 냄새를 맡고 눈을 뜬 거야.”
“악마 자식 완전 개코네.”
“악마가 눈을 뜨자 함께 잠자고 있는 악마의 부하들도 눈을 뜨고, 몬스터들이 다시 천년 만에 동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 마을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주인공은 겨우 도망치지. 그리고 10년 후 악마로 인해 나라는 완전히 황폐해져. 주인공은 자기가 악마를 깨웠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0년을 떠돌다가 이대로 죽느니 차라리 악마와 마주하겠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10년을 악마 무리가 설치는 나라에서 살아남았으면 그사이 산전수전 다 겪었겠네. 싸움은 기본일 테고.”
“맞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시장의 집으로 향해. 집은 거의 다 무너졌지만 그는 시장 아들이 말했던 비밀의 방을 알고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시장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의 갑옷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지. 갑옷을 챙겨 입은 주인공은 칼을 차고, 횃불을 들고 악마의 소굴로, 어린 시절의 악몽으로, 트라우마의 근원지로 들어가는 거야. 자기 손으로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해!”
“그레이트! 우리 게임은 던전에 들어가면서 시작할 테니까 클래스마다 비밀의 방에 있는 전설의 갑옷은 서로 다른 걸로 하면 되겠다. 가령 마법사는 전설의 로브로 하면 되겠네.”
“그렇지. 어차피 우리끼리 이 전투 시스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설정이니까.”
“그냥 설정치고는 꽤 근사하다. 네이트 너한테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는데? 차라리 RPG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해보지 그랬어?”
“뭘, 이건 우리끼리 간단하게 하는 거니까 그냥 흔한 소재로 끼워맞춘 거지. 난 시나리오보다는 코드로 프로그램의 스토리를 쓰는 게 더 좋다고.”
“크으~, 네이트 너 이제 봤더니 완전 시인이었네? 근본 타령만 하는 줄 알았더니. 좋아! 대략이라도 컨셉이 잡히니까 뭘 해야 할지도 금방 감이 잡히네. 빨리 만들어 보자. 진짜 재밌겠다!”
두 사람은 빠르게 컨셉을 정리하고 차세대 퀘스트 엔진을 이용한 전투 시스템 프로토타입 개발에 들어갔다. 빛을 최고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준 황제국에게 감사하며 전투의 박진감에 게임의 깊이감을 더해줄 던전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