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 베타 테스트
개학하는 날 아침, 황제국은 20년 만에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입었다. 돌아와서도 자기가 고등학생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고 있으니 이제는 진짜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와~, 개판이네.”
교실문을 열자마자 혼잣말이 육성으로 터졌다. 수능이 끝난 고3들의 교실이란 그냥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친한 녀석들끼리 어울려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업 시간이 돼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교실에 그냥 망아지를 떼로 풀어놓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오, 황제 폐하. 오셨냐?”
“응, 종석아. 일찍 왔네?”
“우리 게임 나눠주려고 일찍 왔지. 기석이, 요한이, 준호랑 또 게임 좋아하는 몇 놈들한테는 벌써 넘겼다.”
“오오~ 빠른데?”
“내가 걱정 말라고 했잖아.”
PC 통신에 게임을 올리기 전, 황제국은 학교 친구들을 상대로 베타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종석은 각 반에서 게임 좀 한다 하는 친구들 리스트를 만들었다. 다들 같은 학교고, 모두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에 접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들 뭐래?”
“우리가 게임 만들었다고 하니까 놀라던데? 근데 좀 미심쩍어하는 녀석들도 있는 거 같았어.”
“그건 상관없어. 한번 해보면 눈이 돌아갈 테니까. 윤권이는?”
“아직. 솔직히 난 녀석한테 주는 게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가 안 줘도 어차피 하게 될 텐데 뭘. 아직도 그때 일로 삐쳐 있냐?”
“삐치긴 뭘, 옛날 일을 가지고. 그냥 좀 재수 없어서.”
“나름 칭찬이었다잖아. 인제 그만 용서해 줘.”
“어떻게 ‘허접하지만 못 봐 줄 정도는 아니네’가 칭찬이냐???”
오종석은 3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화를 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황제국, 오종석, 조윤권 세 명은 같은 반이었다.
셋은 모두 게임을 좋아해서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조윤권은 게임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엄격했다. 문제는 황제국이 오종석과 중학생 시절 만들었던 게임을 조윤권에게 보여주면서 생겼다. 게임을 해 본 조윤권의 정확한 첫 마디는 이랬다.
“허접하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네.”
황제국은 기분이 좀 상했지만 솔직한 피드백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종석은 분노했고 거의 주먹질이 오갈 뻔했다. 나중에 조윤권이 ‘못 할 정도가 아니다’라는 건 자기 기준에서 칭찬이었다고 사과하는 바람에 또 싸울 뻔했다. 이후 조윤권과는 서먹해 졌다.
하지만 조윤권은 학교에서 유명한 게임광이었다. PC 게임 뿐아니라 콘솔 게임,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도 가리지 않았고, 일본 게임을 하려고 일본어를 마스터 할 만큼 열성적인 게이머였다. 베타 테스트 용으로 친구들에게 나눠주는데 조윤권을 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알았어. 그럼 윤권이한테는 내가 전해 줄게. 넌 계속 게임 나눠줘. 버그 발견하면 꼭 나한테 알려달라고 하는 거 잊지 말고.”
“제국이 니가 그렇다면 뭐. 알았어.”
황제국은 디스켓을 들고 조윤권이 있는 반으로 향했다. 조윤권은 역시나 게임 잡지를 보고 있었다.
“야, 윤권아. 오랜만이네. 방학 잘 보냈냐?”
“어? 어어, 제국이구나. 그냥 뭐. 너는?”
“나 방학 동안 게임 만들었어. 종석이랑 같이.”
“게임을?”
“응. 그래서 너 해보라고 들고 왔지.”
황제국이 디스켓을 책상에 내려놓자 조윤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양할게. 난 게임을 평가할 때는 엄격해서 또 그때처럼 될지 몰라.”
“흐음, 그래? 난 별로 상관없는데. 니가 정 그렇다면 알았어.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얘기해.”
황제국은 더 권하지 않고 돌아갔다. 오종석은 한시간 만에 그가 정한 각 반의 ‘허브’들에게 게임 배포를 마쳤다.
그들은 게임 배포에 다단계 유통 방식을 차용했다. 각 반에서 게임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게임을 전달하고, 그가 자연스럽게 반 친구들에게 게임을 전파시키는 허브가 되어주길 기대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게임을 받은 친구들은 대부분 12시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자마자 <삼국지:공성전>부터 설치했다. 그렇지만 다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같은 학교 친구가 게임을 만들었다니까 궁금했을 뿐이다.
한국은 콘솔 강국 일본이나, 게임의 원조 미국에 비하면 게임 문화가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다. 상업용 게임도 그런데, 아마추어 개발 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PC 통신에 게임 동호회가 있긴 하지만 주로 게임 공략을 다루지, 게임을 만드는 문화가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게임이 실행하고 북소리와 함께 게임 타이틀 이미지가 뜨는 순간,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헐···!!!! 이게 뭐야?”
상업 게임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타이틀 이미지에 학생들은 압도당했다. 그들은 컴퓨터 앞에서 자세를 다시 잡았다.
[ created by 황제국 ]
“오오오, 씨발, 개쩌네!”
크레딧 텍스트를 본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군주 선택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입맛에 따라 유비/조조/손권을 골라서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리고 누구를 고르든 곧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다음날, 황제국이 등교하자 그의 자리에 못 보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삼국지:공성전> 얘기를 하고 싶어서 황제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황제국 왔다!”
“야, 공성전 그거 네가 만든 거 맞아? 종석이랑, 차현주 걔는 누구야? 현주면 여자지? 우리 학교야? 이뻐?”
“난 공성전 너무 어렵던데. 그거 성문 뿌시는 거? 모라 부르지? 암튼 그거는 어케 막냐?”
“난 오소 추격전을 아무리 해도 못 깨겠어. 원소 기마부대 조~~올라 빨라. 자꾸 협공당해. 거긴 어떻게 깨?”
“궁수가 다른 부대보다 좀 허접하지 않아? 아무리 쏴도 안 죽어.”
기대했던 반응이 바로 나타나자 황제국은 뿌듯했다. 그에게 게임을 만드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가 만든 게임을 사람들이 즐겁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뿌듯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황제국은 자리에 앉아 <삼국지:공성전> 이야기를 신 나게 떠들었다. 옆에서 오종석이 붙어서 조조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끼어들었다. 하루가 지난 아직은 별다른 버그가 발견되지 않았다.
“니들이 재밌었다니 진짜 보람차네. 다른 친구들한테도 많이 카피해 줘. 공짜로 하라고 만든 게임이니까 상관없어. 대신 버그 발견하면 나한테 꼭 알려주고. 알았지?”
“알았어!”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황제국을 치켜세우곤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학교에 <삼국지:공성전>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황제국은 입시가 끝나 시간이 남아도는 3학년들에게 즐기라고 게임을 배포했다. 그러나 게임은 순식간에 고1, 고2 학생들에게도 퍼졌다. 황제국은 순식간에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반 친구가 황제국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야, 나 아까 교무실 갔다가 재밌는 거 봤다.”
“뭔데?”
“수학 선생님이 게임하고 있더라. 너가 만든 게임 있잖아, <삼국지:공성전>.”
알고보니 게임은 교무실까지 퍼졌다. 선생님들이 학생의 디스켓을 압수했고, 그러면서 교무실 컴퓨터에도 하나둘 <삼국지:공성전>이 깔리기 시작했다.
황제국이 S대에 합격한 고3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교무실에 끌려가 공부는 안 하고 게임이나 만들면서 면학 분위기를 망친다고 줄빠따를 맞았을 게 뻔했다. 게임의 완성도나 황제국의 장래성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것이다.
게임이 예상보다 빠르게 퍼지면서 황제국이 기대하던 효과도 나타났다. 학생들은 ‘황제국이 버그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게임 속 게임을 하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버그를 찾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황제국 책상 앞으로 새로운 버그가 전달되었다. 황제국이 한 달 동안 집중해서 제작한 만큼, 심각한 버그는 없었다. 맵에 유닛이 너무 많아지면 몇몇 유닛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거나, 궁수가 많아지면 화살이 겹칠 때 애니메이션이 깨지는 등의 자잘한 버그였다.
황제국은 매일매일 버그 목록을 업데이트해서 수정했다. 슬슬 v1.0으로 버전업하고 완성본을 PC 통신에 업로드할 때가 다가왔다.
그즈음, 조윤권은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반에서 황제국이 만든 게임이 재밌다는 이야기가 돌 때는 그러려니 했다. 친구가 만든 게임이라 평가가 후한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전교에서 <삼국지:공성전>을 아직 해보지 않은 사람은 조윤권이 유일한 것 같았다. 조윤권 친구들은 공성전 얘기를 하러 왔다가 조윤권이 안 해봤다고 하자 “니가?” 이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수록 조윤권은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게임을 했다가 별로면, 그는 솔직하게 느낀 대로 얘기할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삼국지:공성전>을 칭송하는 마당에 혼자 별로라고 하면 금방 역적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골수 게이머였다. 모두가 재밌다는 게임을 끝까지 하지 않고 버텨낼 방법은 없었다. 특히나 바로 주변에서 만든 게임이라면 더더욱. 그는 결국 친구에게 디스켓을 받아 컴퓨터에 설치했다. 하드에 게임을 깔고 나서도 그는 게임을 할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아이콘을 더블 클릭했다.
둥-! 둥-!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북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타이틀화면이 뜨는 순간, 조윤권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홀린 듯 유비를 선택해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비, 조조, 손권까지 그날 하루 동안 컴퓨터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리 13시간을 플레이했다. 마지막엔 오소 추격전만 몇 번을 하고, 하고, 또 했다.
“와···! 말도 안 돼!”
조윤권은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다음날, 그는 바로 황제국을 찾아갔다. 황제국 주위에는 친구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회색 후드를 눌러쓰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조윤권은 황제국에게 직진했다.
“어? 윤권이네. 무슨 일이야? 드디어 내 게임을 해 볼 마음이 생겼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해봤어. 어제.”
“그래? 어땠어?”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조윤권은 학교에서 최고의 게임 덕후였지만 신랄한 비평가이기도 했다. 특히 오종석은 이미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오직 황제국만 흥미롭다는 눈으로 조윤권을 보고 있었다.
“싸, 싸인 좀 부탁해!”
“뭐?”
조윤권은 대뜸 황제국에게 노트와 마커 펜을 내밀었다. 황제국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
“싸인을? 왜?”
“처음에는 KOEI에서 나온 <삼국지>나 아니면 <삼국지 영걸전>을 적당히 따라 한 게임인 줄 알았어. 솔직히 큰 버그 없이 비슷하게 따라만 만들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금방 알았어. 이건 그냥 남들 흉내나 내는 솜씨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너는 분명 한국 최고의 게임 개발자가 될 거라는 느낌이 왔어. 그래서 내가 황제국 너의 1호 팬이 되기로 했다.”
조윤권이 또박또박 게임에 대한 감상을 말하며 노트와 마커 펜을 다시 한 번 내밀었다. 황제국이 웃으며 노트를 받아 마커 펜 뚜껑을 열자 주변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황제국! 이제 팬도 생기고!”
“아씨, 안 되는데! 야, 진짜 1호 팬은 나야. 나라구!”
“오종종, 이럴 때는 좀 가만있어!”
“아아악!”
오종석이 사인을 못하게 막으려다가 차현주가 팔을 꼬집자 비명을 질렀다. 주변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환호성과 웃음, 호들갑이 뒤섞인 가운데, 황제국이 게임 개발자로서 생애 첫 사인회를 가졌다. 비록 멋진 무대는 아니었지만 황제국에게는 뜻깊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