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회 - 콜라보레이션
황제국의 산업기능요원 이슈에 관해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자음 카페 비디오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뉴스가 나오자 글과 댓글이 줄을 이었다.
- 당연하지. 뉴퀘스트가 어떤 회산데? 황제국이 창업했고, 황제국 없었으면 애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회사잖아. 직원은 대체복무 되는데 창업자라고 안 되는 게 말이 되나?
- 진짜 말도 안 됨. 누가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면제 시켜달래나? 엄연히 존재하는 대체복무제도는 이용할 수 있게 해줘야지.
- 그래도 그냥은 좀 그러니까 <영건 블러드>가 천만불 찍으면 벤처 기업 대표도 대체복무 할 수 있게 해주자.
- 그래, 군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수출 천만불이 훨씬 애국자다.
- 천만불이면 대체 얼마쯤 해요?
- 대충 120억? 쫌 넘죠.
- 우와, 게임 팔아서 120억! 장난 아니네요 진짜. 처음에 황제국이 투자받은 게 얼마였죠? 12억? 13억?
- 15억이요. 그때 솔직히 무슨 대학생이 만든 게임 회사에 15억 투자하냐고, 손정인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습니다.
- 이미 한국에서 번 돈만 해도 15억은 가뿐히 넘죠. 근데 이번에 미국에서 한 달 만에 700만 달러를 찍어버리니······. 앞으로 대체 얼마나 더 벌런지.
- TV에서 황제국이 CES 인터뷰하는 거 보고 진짜 지금까지 게임하면서 그렇게 뿌듯한 적이 없었음.
- 저도요. 진짜 거의 눈물까지 흘릴 뻔.
- 다들 비슷하시네요. 저도 뉴스 보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바로 피씨방 갔는데 영건이 자리 꽉 참ㅠ.ㅠ 피씨방 세 군데 돌아서 겨우 했어요.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벤처 기업 대표의 대체복무를 지지했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여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고, 여론이 받쳐준다고 해서 지금 당장 법이 바뀔 일도 아니었다.
황제국은 마음을 비우고, 일이 되어가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만약 군대를 안 가게 된다면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면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군대 문제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미국 진출과 CES 이후 게임 업계에 한정되어 있던 황제국과 뉴퀘스트의 인지도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황제국은 지금까지 그저 게임을 재밌게 만들고, 더 많이 파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런데 CES를 다녀온 이후, 영역을 더 확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의 문화를 더 확장해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게임 문화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게임 IP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면, 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접하고, 자연스럽게 게임의 위상도 올라가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지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건 블러드>에 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고, <영건 블러드>를 모르면 대화가 되지 않았다. 반면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영건 블러드>의 실적, 특히 미국 수출 실적과 게임이 돈이 된다는 이슈만으로 게임을 대하고 있었다.
한국 홍보 대행사에서 보내준 각종 매체 모니터링 자료를 살피며 황제국은 이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특히 미국 홍보 대행사의 ‘코리언 언더독’ 이미지 전략이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도 돈과 수출 이외에 일반 대중이 <영건 블러드>에 관해 떠올릴 좋은 이미지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황제국은 <영건 블러드>의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미리 알고 게임을 개발하는 것과 인기 게임을 대중적으로 브랜딩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CES에서 받아온 명함을 정리하던 중 삼정전자 MP3 사업부 이진명 대리 명함이 나왔다. 황제국은 그가 삼정의 새로운 MP3를 열심히 설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황제국은 곧바로 이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진명입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CES에서 만났던 뉴퀘스트 황제국입니다.”
“네?!?”
이진명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명함을 주고받긴 했지만 설마 황제국이 전화할 줄은 몰랐다.
며칠 후, 황제국과 이진명은 수원에 있는 삼정전자 디지털사업부 본사에서 다시 만났다. 황제국은 오종석과 동했했고, 삼정에서는 이진명과 MP3 사업부 마케팅팀장을 맡고 있는 조진흥 부장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녕하세요. CES는 잘 마무리하고 오셨나요?”
“네, 이제 결과 보고서도 마무리한 참이었습니다. 갑자기 대표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황제국과 이진명이 다시 반갑게 인사했다. 황제국과 오종석은 조진흥 부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어떤 일로 저희를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잠시 CES 이야기를 나누다 조진흥 부장이 묻자 황제국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삼정전자 YAPP MP3 플레이어와 함께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저희 삼정과요? 저희는 이제 게임 유통에서는 손을 뗀 상태입니다만. 저희 부서 주관 사업도 아니구요.”
“게임 유통 관련이 아닙니다. 뉴퀘스트와 삼정전자 MP3 플레이어 YAPP의 콜라보레이션을 제안드리려고 왔습니다.”
“콜라보레이션이요?”
브랜드 간의 협업인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은 2000년에는 그다지 활발한 활동이 아니었다. 조진흥 부장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결과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YAPP MP3에 <영건 블러드> 에디션을 출시하는 겁니다.”
“저희 MP3 플레이어에요?”
이진명 대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네, MP3에, 만약 플레이어 디자인에 적용하기 어렵다면 가죽이나 다른 케이스를 덧씌워서 <영건 블러드> 캐릭터를 입히는 겁니다. <영건 블러드>에는 개성 강한 캐릭터가 아주 많습니다. 게다가 퓨처를 이끄는 유희철 형님이 OST 작업을 해서 음악과도 연관성이 큽니다.”
“심지어 유희철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도 있으니까요.”
“주인공급인 장건, 이록, 황산, 왕소현, 이수련만 해도 벌써 다섯 명이고, 유희철 팬들을 위한 유철 캐릭터까지 하면 여섯 명이죠. <영건 블러드> 에디션으로 이들 여섯 명의 캐릭터 디자인을 적용한 MP3 플레이어를 내고, <영건 블러드> OST MP3를 함께 제공하는 겁니다. 희철이 형님을 광고 모델로 쓰면 완벽하죠.”
“좋은 생각인데요? 저희는 아직 MP3 플레이어 시장이 작아서 시장 확대가 절실한데, <영건 블러드> 팬에 유희철 팬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영건 블러드>가 좀 더 일반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넓히고 싶습니다. PC 게임 저변이 넓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매니아만 즐기는 성향이 강해서요. 꼭 게임을 하지 않아도, 게임 문화를 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 정말 생각의 차원이 다르네요. 대표님!”
이진명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황제국을 바라봤다. 그는 머릿속으로 YAPP <영건 블러드> 에디션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장을 넓히고 싶은 삼정 MP3 사업부의 니즈와 게임의 울타리를 넘어 영역을 확대하고 싶은 뉴퀘스트의 니즈를 절묘하게 맞추는 지점이었다.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과연 게임 팬이 아무리 게임과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MP3 플레이어를 사려고 할까요?”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건 블러드> 팬들은 로봇 피규어가 있는 한정판 콜렉터즈 에디션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분들입니다. 게다가 <영건 블러드> 캐릭터 디자인은 완성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극찬을 받았던 게 바로 캐릭터였습니다. 미국 소비자들도 MP3 에디션에 관심을 가질 겁니다.”
제안을 받고 잔뜩 흥분한 이진명과 달리 마케팅 팀장 조진흥은 훨씬 신중하게 접근했다. 아직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반도체나 휴대폰 등에 비하면 MP3 플레이어는 삼정전자 내에서 존재감이 작았다. 첨단 인터넷 활용 기기라는 특성 때문에 유지되고 있었지만 MP3 사업부 전체가 팔릴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사내에 돌고 있었다.
조진흥은 어쩌면 이 제안이 MP3 사업부를 살려낼 마케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삼정전자는 대기업이었고, 대기업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임원들을 설득하려면 다각도로 검증이 필요했다.
황제국은 조진흥 부장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논리와 실적이 뒷받침된 일이지만,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마케팅이 워낙 생소했다.
이진명은 속이 탔다. 사업에서 검증 과정은 꼭 필요하지만, 때로는 리스크를 안고 도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대기업은 오히려 불리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없으신가요?”
“자세한 제안서를 주시면 저희도 내부적으로 좀 더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제안서는 이진명 대리님과 함께 만들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상식적인 부탁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위를 설득하려면 내부 직원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이진명은 간절한 눈빛으로 조진흥을 바라봤다. 조진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미팅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황제국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디 PC 게임 사업부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뉴퀘스트가 <영건 블러드> 유통사를 찾아다닐 때, 삼정전자와도 미팅을 했었다. 하지만 대기업인 삼정전자는 내부적인 계약 기준이 있었고, 뉴퀘스트를 위해 0.1%의 수수료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훨씬 큰 손해를 봤다. 황제국은 그 점을 꼬집은 것이다.
미팅이 끝나고 황제국과 오종석은 이진명과 함께 삼정전자 수원 사업장을 둘러보았다. 생산 공장을 짓기 위해 수원에 자리를 잡은 수원 사업장은 차츰 생산보다는 R&D(연구 개발) 위주로 변해갔다.
“여기 짓고 있는 건물이 정보통신커뮤니케이션 연구소 건물입니다. 내년에 입주할 예정인데 6,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건물입니다. 대부분 휴대폰 연구직들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이진명이 공사 중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삼정전자 수원 사업장은 전체 넓이가 수십만 평에 달해서 다 돌아볼 수도 없었다. 수많은 연구소와 생산 시설, 그리고 축구장 등 체육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사업장 하나가 어찌나 넓은지, 황제국이 미국에 사무실을 열었던 팔로 알토(Palo Alto) 지역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와 삼정전자 수원 사업장은 기후도, 지형도, 만들어진 배경과 이어져 온 역사와 철학까지 너무도 달랐다. 실리콘밸리는 실리콘밸리의 문화가, 한국에는 한국의 문화가 있었다.
비록 황제국이 지향하는 사업 방향성이나 문화와는 다르지만,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서는 삼정전자의 역량과 조직력은 대단했다. 황제국이 삼정전자 MP3 사업부를 움직여 그들의 제품력과 유통망, 그리고 마케팅 능력을 빌릴 수만 있다면 뉴퀘스트가 한발 더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표님. 이번 일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이진명은 열정에 가득 차서 대답했다. 비록 대리였지만 내부에 확실한 아군을 만들고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삼정과의 MP3 콜라보레이션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6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릴 일이었다. 사업부에서 프로젝트가 통과된다 하더라도 새로운 모델 디자인에서부터 시제품 제작, 생산에서 마케팅, 판매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정말 많았다.
“아무래도 마케팅 인력을 뽑아야겠지?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있을 텐데.”
“응, 아직은 내가 쫓아다닐 수 있지만 삼정이랑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 없다.”
황제국은 돌아오는 길에 오종석과 서울 오피스 인력에 관해 이야기했다. 황제국이 미국에 있는 동안 서울 오피스는 파트 타임 정도를 제외하고 별도의 인력 충원이 없었다. 삼정과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전담할 직원도 필요했다.
서울에 도착하자 오종석은 차현주와 데이트가 있다고 헤어지고, 황제국은 동방으로 돌아갔다. 동방에는 민소영 혼자 남아있었다.
“어? 선배님! 다시 오셨어요?”
“응, 왜 아직도 있어? 나머지 공부 중이야?”
“비슷해요. 공중에 떠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한 사람이 밟고 점프하면 돌이 사라져야 하거든요? 근데 없어지질 않아요.”
“그래? 어디 같이 볼까?”
황제국은 가방만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말대로 공중에는 수십 개의 돌이 떠 있었다. 소냐가 돌을 밟고 점프해도 징검다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앞사람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뒷사람은 그만큼 징검다리가 줄어들어서 불리해져야 하는데 계속 그대로 있어요.”
“강체 충돌 검사는?”
황제국은 소스코드를 열어 코드를 확인했다. 그리고 15분 만에 오류를 발견해서 수정했다.
“와, 이렇게 쉬운걸. 전 오후 내내 이거 붙잡고 있었는데······.”
민소영은 감탄과 자조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곧 소냐로 돌아가 사라지는 징검다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황제국은 게임을 만들며 마냥 즐거워하는 민소영이 기특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중요한 PM의 소임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가 돌아왔으니 다시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근데 소영아.”
“네, 선배님?”
“소냐 프로토타입 심사는 언제 할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