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 억만장자의 제안(1)
1998년 9월 첫날. 방학 동안 조용하던 캠퍼스는 다시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학생들은 오랜만에 만나 방학 동안 뭘 했는지 수다를 떨었다.
휴학을 결정한 황제국은 수강 신청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업도 없었다. 뉴퀘스트 다른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손정인을 기다렸다. 어차피 첫 주는 오리엔테이션인데 손정인 같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동방에는 유희철과 퓨처가 방문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맴돌았다. IT 업계의 거물, 투자의 큰손이자 뉴퀘스트의 투자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방문이었다. 설렘보다는 긴장이 훨씬 컸다.
평소 랩실에 있는 전용선도 동방에서 조용히 손정인을 기다렸다. 경영학도인 오종석은 세계 최고의 기업인 중 한 명을 만난다는 생각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진수도 이번에는 긴장이 되는지 볼마우스를 분해해서 볼을 굴리는 롤러에 붙은 먼지를 청소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10시 반. 손정인은 조찬 모임을 마치고 잠깐 S대에 들를 예정이었다. 약속 시간을 몇 분 남기고 황제국의 전화기가 울렸다. 황제국은 공대 주차장으로 나가 손정인을 맞았다. 비공식 방문인 만큼 손정인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선글라스를 썼는데 그 모습이 몹시 어색했다.
황제국은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얼른 손정인과 수행원을 데리고 뉴퀘스트 동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뉴퀘스트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 학생들입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반갑습니다.”
손정인이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영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경직된 차현주에게 전유진이 귓속말로 통역을 해주었다. 그는 뉴퀘스트 멤버들과 모두 악수를 나누고, 동방을 둘러보고는 창조적인 영감으로 가득한 방이라며 칭찬했다.
“자, 그럼 볼 수 있을까요? 기대가 큽니다.”
“네, 그럼 이리로.”
황제국이 손정인을 자기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곧장 <영건 블러드> 튜토리얼로 들어갔다.
첫 장면은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록이 황산에게 일본군의 비밀병기 얘기를 꺼내며 기차를 습격하자고 제안했다. 장건이 거절했지만 전리품을 모두 가지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록이 방을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장건을 슬쩍 쳐다보며 웃었다. 그의 배신을 알려주는 복선이었다.
대사는 텍스트로, 아직 배경음악은 넣지 않았고 간단한 효과음만 있었다. 뉴퀘스트 멤버들은 모두 손정인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바짝 긴장했다.
“듣던 대로 3D 그래픽이 상당한데요? 애니메이션도 자연스럽고. 괜찮네요.”
손정인이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다들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기차를 습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장건이 기차로 진입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됩니다.”
황제국은 손정인에게 WASD 키와 마우스를 이용한 기본적인 조작법을 가르쳐 주었다. 손정인은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고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칸에서는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손정인이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그는 곧 두 번째 칸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자 뒤에 숨어있던 일본군이 단검을 휘두르자 깜짝 놀랐다.
튜토리얼이라 무기를 바꾸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손정인은 급하게 단검으로 바꿔 잡았다. 하지만 그는 타이밍을 잘 잡지 못했고, 공격당할 때마다 시야가 파르르 흔들렸다.
“으으으!”
손정인은 마치 자기가 공격당하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가 조금씩 게임에 몰입하고 있다는 좋은 신호였다. 어렵게 일본군을 물리친 손정인은 문을 열고 다음 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다당! 탕! 타당!
갑자기 총알이 쏟아지자 손정인은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 의자 옆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튜토리얼이 응급처치 키트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튜토리얼에서는 응급처치 키트가 무한대로 제공됩니다. 마음 놓고 하셔도 됩니다.”
“소데스까(그렇습니까)? 굿!”
손정인은 자기도 모르게 일본말을 했다. 순간 황제국과 뉴퀘스트 멤버들의 눈이 마주쳤다. 무의식중에 가장 편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건 명백한 그린라이트였다.
그는 주인공 장건의 핵심 스킬인 ‘개틀링 건(Gatling Gun)’ 스킬을 사용하고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킬을 쓸 때는 총구의 불꽃이 파랗게 변하면서 더 크고 화려한 이펙트가 나왔다. 다 쏘고 나서는 라이플에 달린 리볼버가 고속으로 회전하다 탁 멈췄다. 총구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손정인은 화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솔직히 남자라면 반할 수밖에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오종석이 황제국에게 귓속말을 했다. 프로토타입과 알파 버전을 거치면서 <영건 블러드>의 그래픽 퀄리티는 일취월장했다. 특히 총기 액션인 만큼 캐릭터들의 시그니처 무기와 스킬 이펙트는 공들여서 제작했다.
남자아이라면 대부분 어릴 때 총에 한 번쯤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게 설사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 총이라고 해도, 총을 가지고 놀면서 그 힘을 느낀다. <영건 블러드>는 그런 감성을 자극하고, 숨겨둔 로망을 일깨우는 게임이었다.
튜토리얼을 마칠 때쯤 손정인의 자세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는데, 끝날 때는 머리를 모니터 쪽으로 기울이고 목은 책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모니터로 들어갈 기세였다.
“멀티플레이도 해 보셔야죠?”
“물론이죠!”
황제국은 게임의 핵심인 멀티플레이 모드로 들어갔다. 그는 손정인 반대편에 앉아 먼저 1대1로 손정인과 대결을 펼쳤다. 무대는 폭렬왕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무기고였다.
커다란 상자들이 잔뜩 쌓여있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로 이루어진 무기고에서 두 사람은 숨 막히는 숨바꼭질을 벌였다. 상자로 인한 좁은 시야와 다양한 코너, 의도적으로 자제한 조명이 공간만으로도 서스펜스를 자극했다. 섬멸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맵으로 삼고자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맵이었다.
“워우!”
“왓?!”
“나니?”
“바카야로(바보녀석)!”
손정인은 멀티 플레이를 하면서 다양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가 느끼는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옆에서 수행원은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손정인이 장건 외에 다른 캐릭터를 시도했다. 그가 이록으로 스나이퍼 모드를 시험했지만 조준이 쉽지 않았다. 총알이 계속 빗나가자 손정인은 연신 안타까워했다.
다음 게임을 하려던 손정인을 수행원이 만류했다. 산업자원부 장관과 점심 약속에 지금 떠나도 시간이 아슬아슬하다고 했다. 손정인도 손목시계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황제국은 그 표정이 뭔지 알아봤다. ‘딱 한 판만 더!’라는 전 세계 게이머의 공통적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1분 1초가 곧 돈인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이었다. 결국 그는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진수를 보자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당신이 미스터 황과 함께 퀘스트 엔진을 만들었습니까? 감동입니다. 정말 훌륭해요. 이런 감각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말할 수 없이 훌륭합니다.”
“고맙습니다. 퀘스트 엔진은 제 인생입니다. 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진수는 당황했지만 곧 영어로 대답했다. 모국어인 한국어로 말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쉬운 단어만 사용했지만 뜻을 온전히 전했고, 말도 전혀 더듬지 않았다.
“여러분 모두 훌륭합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황, 다른 약속이 있어 가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곧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손정인은 다시 어색한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를 떠났다. 그가 동방에 머문 시간은 30분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그의 에너지가 남긴 여운은 짙었다.
“와, 대단하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종석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을 처음 직접 보고 나서 얼굴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심지어 손정인의 어색한 선글라스조차 멋있어 보였다.
손정인이 떠나고, 뉴퀘스트 멤버들도 각자 수업을 위해 흩어졌다. 휴학을 결정한 황제국과 이진수만 남아 게임을 만들었다. 황제국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이제는 차분히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투자는 통장에 돈이 들어와야 비로소 끝’이라던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긍정적인 시그널이 있었지만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국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손정인은 몇 시간 후 다시 황제국에게 연락을 취했다. 황제국은 저녁에 다시 역삼 르네상스 호텔로 향했다. 이번에는 방이 아니라 스테이크 하우스 ‘맨해튼 그릴’에서 만났다.
“아, 미스터 황. 어서 오세요. 마지막 날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내일 떠나십니까?”
“예스. 그래서 미스터 황과 얘기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먹으면서 얘기할까요?”
황제국은 손정인, 그리고 다른 수행원들과 앉아 스테이크를 먹었다. 육즙이 배어 나오는 두툼한 스테이크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지만, 솔직히 황제국은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고기를 써는 건지, 접시를 써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얘기를 듣자니 미스터 황이 아주 집요하게 전화를 했다면서요?”
“아,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손 회장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서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하하하하! 아닙니다. 나야 어차피 미스터 황 같은 젊고, 유능한 기업인을 만나려고 온 거니까요. 자칫하면 재밌는 게임도 못 해보고 돌아갈 뻔하지 않았습니까?”
수행원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날 때쯤 접시를 모두 치우고 커피와 차를 마셨다. 황제국은 투자금 얘기가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커피가 나오자 드디어 손정인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미스터 황은 소프트펀드가 뉴퀘스트에 투자하길 원해서 날 찾아왔죠?”
“네, 그렇습니다.”
“현재 뉴퀘스트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됩니까?”
황제국은 뉴퀘스트 멤버와 지분 구조에 관해 설명했다.
“잘했습니다. 모름지기 창업자가 자기 몫의 지분을 확실히 확보해야 사업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예전에 멋모르고 동업할 때 지분 때문에 곤욕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손정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내가 얼마나 투자하길 원합니까?”
“저는 뉴퀘스트가 3년 안에 기업 가치 100억에 달하리라 생각합니다.”
“근거는요?”
“<영건 블러드>를 3만 5천원에 판매한다고 가정하고, 3년간 한국에서 30만 장, 세계에서 30만 장 이상 판매가 목표입니다. 그러면 <영건 블러드> 단일 타이틀로도 최소 200억 매출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영건 블러드>는 추가 확장판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팔릴 거라고 자신하지요?”
“<영건 블러드>는 인터넷 시대의 <둠>이 될 것입니다.”
황제국은 그가 생각하는 성공 요인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둠>, <퀘이크> 이후 대부분 SF에 머물러 있는 FPS 게임에서 단연 눈에 띄는 컨셉, 인터넷을 통해 최대 8대8 멀티플레이를 지원하는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 빠르게 확산되는 한국 PC방 중심 영업으로 확실한 판매처 등을 설명했다.
“게임을 직접 해보신 만큼, 게임 퀄리티에 관한 의문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투자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기업 가치 100억을 기준으로 10억 투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래가치 100억에 내 투자금 10억을 더하면 자본금은 110억이 되겠네요. 그리고 소프트펀드가 투자한 금액만큼 지분을 계산하면 지분율이 약 9%가 되네요.”
“네, 그 정도가 됩니다.”
“투자금을 받으면 어떻게 쓸 계획입니까?”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는 퀘스트넷 서버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기술은 있지만 막대한 트래픽을 감당할 서버를 구축하려면 큰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게임 퀄리티를 높여줄 각종 효과음과 성우들의 목소리 녹음 등 후작업에도 비용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사무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저희는 S대 실험실 벤처입니다. 인력이나 다른 이유로 더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 옮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미스터 황, 잠깐 우리끼리 의견을 종합해도 될까요? 5분이면 됩니다.”
“물론입니다.”
손정인는 그의 수행원들과 일본어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5분이면 된다던 이야기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황제국을 불렀다.
“미스터 황.”
“네, 말씀하십시오.”
황제국은 티 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심판의 순간이었다.
“뉴퀘스트의 미래 가치 산정을 인정합니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기업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황제국은 일단 안심했다. 기업 가치 산정부터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수월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투자금 말입니다. 조금 변경해도 괜찮습니까?”
“네, 어떻게 말입니까? 금액이 높은가요?”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손정인이 살짝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이었다.
“투자금을 더 높이고 싶습니다.”
“얼마나 말씀입니까?”
황제국은 살짝 긴장했다. 투자금을 더 낸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손정인이 더 많은 지분을 가져간다는 뜻이었다. 손정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현금으로 100억 투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