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 졸업
황제국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겠어? 앞으로 게임 만들다 보면 재밌는 순간보다, 힘들고 괴로울 때가 더 많을 텐데도?”
“진짜?”
황제국이 경고하듯 말하자 오종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차현주는 눈 위에 무의미한 발자국을 냈다.
“이번에는 기간도 짧고, 내가 무슨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 확실했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어. 의견이 달라서 얼굴 붉히며 싸우는 일도 많아질 거야. 그래도 하고 싶어?”
이번에는 황제국이 물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이 게임을 만드는 과정은 언제나 좌충우돌하기 마련이다. 게임을 만들다 언쟁을 벌이고, 때론 의가 상해서 평생 보지 않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저 재밌다고 가볍게 시작할 수도 있지만, 일이 커지면 결코 즐겁게만 일할 수 없게 된다. 수많은 과정을 겪은 황제국은 게임을 만드는 일이 즐거움만큼이나 고통도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종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론.”
“왜? 게임이 좋아서?”
“아니, 널 믿으니까.”
황제국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오종석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 제국이 널 보고 많은 걸 느꼈어. 내가 아무리 어설프게 해가도 네가 보고 이리저리해보자고 하면 마법처럼 결과가 달라졌잖아?”
“맞아, 나도 그래서 일하기 정말 좋았어.”
차현주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오종석이 말을 이었다.
“그때 알았지. 아, 얘는 나랑은 전혀 다르구나. 그냥 재밌어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만드는 사람이구나. 어떻게 해야 재밌어지는지 아는구나. 그래서 너라면 믿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현주, 너는?”
“나도. 그림과 게임은 다르지만 똑같아. 무언가 새로운 걸 내 손으로 만드는 일이잖아? 그게 쉽고 재밌기만 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 정도 각오도 없으면 어떻게 화가가 되겠다고 미대를 가겠어?”
오종석도, 차현주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세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에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황제국이 차현주 머리 위의 눈을 털어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게임 개발 동아리를 만들 거거든? 동아리에 너희도 함께하자.”
“뭐야~, 역시 처음부터 계획이 다 있었던 거네?”
“그럼 내가 대학 가서 가만히 수업이나 듣고 있을 줄 알았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는 없어.”
“그나저나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 나중에 가서 나한테 힘들다고 투덜거려 봐야 소용없다?”
“또~ 재수 없게 군다. 걱정 마. 힘들면 오종종 괴롭히면서 스트레스 풀지 뭐.”
“뭐? 야, 내가 대학까지 가서 너한테 당할 거 같냐? 여자친구 만들어서 데이트하느라 바쁠 거거든?”
오종석이 발끈하자 차현주가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오종석이 재빨리 눈을 뭉쳐 던졌다. 눈덩이가 차현주의 배에 정통으로 맞았다.
“크하하하하!!! 봤냐? 어, 야! 야야, 말로 해!!!!”
신나게 웃던 오종석은 차현주가 엄청난 속도로 눈을 뭉쳐 총알처럼 날리자 당황했다. 옆에 있던 황제국도 피하지 못하고 눈에 맞았다. 그 모습을 보자 오종석과 차현주가 폭소를 터뜨렸다.
“이것들이! 좋아, 다 덤벼!”
“얼마든지. 게임은 제국이 너보다 못해도 눈싸움은 어림없지!”
세 사람은 신나게 눈덩이를 던지며 놀았다. 그리고 셋은 나란히 감기에 걸려 며칠을 골골거렸다.
감기가 겨우 떨어진 무렵, 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오늘로 여러분은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는 여러분의 영원한 모교가 됩니다. 진부하다면 진부한 표현일 수 있으나, 졸업은 결코 끝이 아니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졸업식 날. 교실에서 TV로 중계 중인 교장 선생님의 졸업사는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며칠째 계속 눈이 오고 있었다.
교실 뒤에는 학부모들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고, 담임 선생님이 모처럼 정장을 입고 교단에 서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국은 그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고등학교 졸업식 날 눈이 왔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삶의 여러 순간 중 게임과 연관되지 않은 이벤트는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역시 제대로 살았었네, 내가.’
황제국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게임에 진심이었던 예전 생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제대로 된 게임을 내 본 적이 없던 것이 안타까울 뿐.
그리고 알 수 없는 뽑기 후, 다시 얻은 기회에서 그는 이미 첫 번째 게임을 성공적으로 런칭했다. 게임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이텔 게오동에서 단숨에 추천 게임 1위에 오른 것은 물론, 가온누리, 만리안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마이텔에 접속하면 여기저기서 채팅방 초청이 쏟아졌다.
남동진 기자는 밤을 새워서 인터뷰 초고를 완성하고 김성진 편집장에게 보여주었다. 편집장은 무조건 3월호에 넣기로 했다. 다소 무리였지만 편집장이 밀어붙였다.
3월호는 2월 말에는 인쇄와 배포가 완료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2월 중순에는 편집이 끝나야 한다. 내용을 추가하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인쇄물인 잡지 특성상 1~2페이지를 임의로 늘릴 수 없었다. 인쇄지를 1장 늘리면 4페이지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2월호는 이미 편집을 마무리하는 단계라 수정이 쉽지 않았다.
“됐고! 그냥 4페이지 전체를 넣어. 마침 사진도 많이 찍었잖아. 좋은 사진 많더만. 같은 대학을 가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세 친구의 학창 시절 마지막 추억! 스토리도 졸라 낭만적이잖아.”
편집장의 결정으로 결국 황제국과 <삼국지:공성전> 팀의 개발 이야기는 PC 게이머 3월호에 무려 4페이지 분량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얘기를 전해 들은 오종석은 만세를 불렀다.
“헐, 그렇게 비중 있게 나온다고? 3월호 나오면 10권 사서 친척들한테 싹 돌려야겠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해외 반응이었다. 해외는 생각보다 전파가 느렸다. 미국과 유럽 쪽은 하루에 몇십 건 수준이었고, 일본은 그보다 조금 나았다. 황제국이 매일 새로운 유즈넷 그룹을 찾아가며 홍보글을 올렸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FTP를 통해 전 세계에 게임을 전송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인터넷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규모 있는 인터넷 게임 매체나 게임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전이었고, 강력한 바이럴이 일어나는 SNS도 한참 후에야 나타난다.
조금 아쉬웠지만 황제국은 개의치 않았다. PC 게이머와 인터뷰를 마친 후, <삼국지:공성전>은 이미 그에게 과거의 게임이 되었다. 친구들과 힘을 합쳐 만든 첫 게임이고, 생각보다 완성도 있게 나왔고, PC 통신에서 꽤 화제가 되었으며, 매체와 인터뷰까지 했다. 완성만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미 마일스톤을 초과로 달성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삼국지:공성전>은 어디까지나 몸풀기였다. 황제국의 시선은 다음 게임으로 향했다. 곧 3월이면 대학에 들어갈 것이고, 4월이면 블리자드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발매한다.
한국 게임 업계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산업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황제국은 인터넷이 주도하는 게임 시대에 본선에 오르기 위해, 메인 스트림이 되기 위한 다음 게임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입시 공부 싫다고 하더니, 막상 졸업하려고 보니까 섭섭하지?”
“그러게요.”
졸업식을 마치고 황제국 어머니가 꽃다발을 건네주며 아들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 정작 시원섭섭한 것은 어머니일 것이다. 황제국은 별로 섭섭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황제국은 어머니와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도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학교에서 황제국의 게임이 워낙 인기여서 그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친구가 엄청나게 많았다. 다른 반에서도 몰려오자 오종석이 나서서 복도에 줄을 세울 정도였다.
“자자, 번호표 뽑고 기다려. 어허! 거기 새치기하지 말고!”
“우리 아들이 학교에서 엄청 친구가 많았네. 엄마가 왜 몰랐지?”
황제국 어머니는 황제국의 인기 비결은 모른 채 사진 찍으려고 모여든 친구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저 대견하고 흐뭇한 얼굴로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며칠 후, 황제국은 S대 OT(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처음에는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기억에 흐릿한 대학 동기들도 많았기에 그냥 참석하기로 했다.
2박 3일을 술 마시며 노는 자리에서 허비한다는 생각이 좀 아깝기도 했지만, 막상 가보니 잊고 지냈던 동기와 선배들을 만나 꽤 반가웠다. 지난 한 달, 게임 개발에만 매진하며 보냈으니 잠깐의 휴식도 나쁘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오자 PC 게이머 3월호가 발매되어 있었다. 남동진 기자가 잡지를 보내주었지만, 황제국은 오종석과 함께 광화문으로 향했다.
“보자, 어딨냐. 오, 저깄다! 저기!”
오종석은 잡지 코너에 PC 게이머가 보이자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페이지를 펼쳤다. 총 네 페이지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과 함께 8장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오, 사진 잘 나왔네?”
“그치? 나 아무래도 사진빨이 괜찮은 거 같아. OT 하기 전에 나왔으면 좋았을걸. 그럼 들고 갔을 텐데.”
두 사람은 잠시 잡지 코너를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이 얼마나 PC 게이머를 사는지 지켜봤다. 오종석은 혹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PC 게이머를 사 가는 사람 근처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동진 기자는 전국 서점에 잡지가 깔리자 오랜만에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게임 공략한다고 밤새워 게임을 하거나, 해외 잡지들이 어떤 내용을 다루나 참고하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게임 잡지 판매량이 번들 게임 CD 타이틀에 따라 좌우되면서 일에 조금씩 흥미를 잃고 있었다. 아무리 공들여 기사를 써도, 타 잡지에서 유명 게임을 번들로 제공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자 입장에서는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황제국 팀을 인터뷰하고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바빴지만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좋은 게임과 개발자를 발굴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남동진은 처음으로 느꼈다.
부디 독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남동진 기자는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PC 게이머죠?”
“네, 맞습니다.”
“이번에 그 고등학생들이 만들었다는 게임, 그거 그렇게 재밌나요? 좀 뻥이 심한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저희 사무실에서 모든 기자들이 해보고 모두 감탄한 게임입니다. 결코 과장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 볼 수 없나요?”
“네, 저희가 기사에 각 PC 통신 자료실에 모두 무료로 올라와 있다고 자세히 안내해 드렸습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요. 제가 PC 통신을 안 해요. 주변에 하는 사람도 없고. PC 통신 안 하면 못하는 게임인가요?”
“아, 그게······.”
남동진 기자는 대답이 궁했다. 그런데 그 전화 한 통이 끝이 아니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3월호를 발매하고 사무실에 독자들의 전화가 부쩍 늘어났다. 내용은 대부분 PC 통신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삼국지:공성전>을 해볼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전화를 받다 지친 남동진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장 편집장에게 달려갔다.
“편집장님.”
“왜?”
“이번 황제국 팀 기사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잘 알지. 거봐, 내가 뭐랬어? 내가 졸업하기 전에 인터뷰 따라고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놓칠 뻔했지?”
“네, 그런데 말이죠. 저, 혹시.”
“혹시?”
남동진이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편집장에게 물었다.
“<삼국지:공성전>을 4월호 번들 게임으로 제공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