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이 개 같은……!”
학살의 현장을 본 오토의 분노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학살의 대상이 된 민간인들의 비탄과 절망, 공포가 가득했다.
또한, 곳곳에 사람을 묻고 그대로 묻어 버린 흔적이 수백여 개가 넘었다.
게다가 단순히 생매장만 한 게 아니었다.
저항하다 죽은 사람들.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이 수천 구가 넘었고, 땅은 온통 피비린내 나는 피바다로 돌변해 있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다.’
오토는 이번 학살에 참여한 로웨나군을 말살해 버리고 싶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오토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저들 대부분은 이 학살을 원하지 않는다. 명령에 의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자들도 많을 거다.’
오토는 애꿎은 사람까지 죽이기 싫었다.
로웨나군을 똑같이 학살해 버린다면, 대체 로웨나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참아야 했다.
“후우.”
오토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는, 연합군 장병들에게 명령했다.
“총사령관이 명령한다. 전군, 적들을 제압하고 민간인들을 구출하라. 저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응징하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 자들은 건드리지 마라. 학살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징벌은 전쟁이 끝난 후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실시할 것이다.”
결국, 오토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분노했다 할지언정 감정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금물.
그것이 민심이었다.
이곳 아케인의 백성들이든 로웨나의 병사들이든 결국 아라드 제국의 신민들.
학살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징벌하는 게 옳았다.
만일 로웨나처럼 저들을 학살했다간 오토 역시도 민심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테니까.
“잘 참으셨습니다.”
카미유가 존경을 담아 오토를 위로했다.
“존경스럽습니다, 전하.”
“됐어, 존경은 무슨.”
오토가 손사래를 쳤다.
“이런 걸로 존경받을 만한 일이 없어야지.”
“전하…….”
“넌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어.”
오토가 저 멀리 로웨나가 머무르고 있을 아케인 중심부를 노려보았다.
그런 오토의 눈은 살기에 가까운 분노를 담아내고 있었고, 시퍼런 마력이 번뜩였다.
그간 로웨나가 학살을 자행한 게 도대체 몇 번이란 말인가?
그녀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10만을 넘어 거의 20만에 가까울 지경.
‘더 빨리 죽였어야 했나.’
오토는 그간 부득이하게 로웨나를 살려둘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섣불리 로웨나를 건드렸다가 대륙의 정세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 두려워 적기를 기다렸던 것뿐인데, 그간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죄책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로웨나를 조기에 제거했다가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면,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을 터.
오토에게 있어 로웨나는 필요악에 가까운 그러한 존재였던 것이다.
* * *
연합군은 학살의 현장을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
학살을 진행하던 로웨나군은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아예 전의를 상실해 버렸고, 그대로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해버렸다.
오토의 예상대로, 사실 이번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른바 아케인 말살작전에 참여한 이들 중 적극적인 것은 일부 고위급 장교들과 기사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포악해져 버린 병사들이 대부분.
나머지 장병들의 경우 어쩔 수 없이, 그들도 눈물을 흘려가며 살기 위해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학살에 가담한 이상 죄가 없다고는 볼 수 없으나, 오토는 더 큰 대의를 위해 그들 대부분에게 그나마 관대한 처분을 내릴 예정이었다.
다만,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자비도 없었다.
“고위급 장교들과 기사들은 모두 체포하고, 재판이 열릴 때까지 구속하라. 또한, 로웨나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병들을 상대로 철저한 조사를 통해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전범들을 색출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오토는 전범들에게는 가장 가혹한 처형 방식을 동원해 공개적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이번 학살에 대해 원한을 품은 유가족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아…….”
오토가 조금 전까지 학살이 벌어지던 현장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던 무렵.
“구원자시여!”
“오토 드 스쿠데리아 전하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합군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끌어올려진 아케인의 백성들 수십만 명이 오토에게 모여들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넙죽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오토와 연합군은 영웅이요, 또한 구원자들이었다.
로웨나군에 의해 학살당할 뻔했던 수십만 명을 구했는데, 이러한 칭송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 아라드 제국 남부 일대의 민심이 오토의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라드 제국의 수도 코린트를 함락시키고 황제를 체포한 연합군에게도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무능한 황제를 타도한다.
폭정을 일삼으며 횡포를 부리던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을 토벌한다.
또한, 권력욕을 충족시키고자 전 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황족들 모두를 응징한다.
그게 연합군이 내세울 명분이었고, 대부분의 대륙인들은 그에 동의할 게 분명했다.
하물며, 아라드 제국에 반기를 든 연합군의 수장이 저 북부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오토라면 더더욱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여길 안정화시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즉시 재정비해. 바로 출발할 테니까.”
“명령,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미 공격이 이루어진 이상, 공세의 고삐를 늦출 순 없었다.
곧 로웨나도 오토의 배신을 알아차릴 터.
그 전에 확 몰아쳐서 단숨에 전투를 끝내야 했다.
그래야 아군 희생은 물론 적군의 희생도 줄어들 테고, 남은 파라곤과의 일전 역시 더욱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테니까.
* * *
연합군의 기습은 곧장 로웨나에게 알려졌다.
애초에 실시간으로 보고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연합군은 로웨나군의 본대가 주둔 중인 아케인 근방에 떡하니 나타났고, 학살의 현장을 정리했다.
아케인 중심부와 사건 현장 간의 거리가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기에, 매우 빠른 보고가 이루어진 건 당연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동생이…… 동생이 나를 배신하다니…… 아니, 아닐 거야. 동생이 나를 배신했을 리 없어…….”
로웨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오토의 배신은 가히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로웨나에게 있어 오토의 존재란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오토가 곧 그녀의 삶이었고, 세계였고, 또한 미래였다.
그런 사람에게 배신당하다니?
로웨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오토의 배신.
오토에게 버림받는 게 죽는 것보다 더욱 두려웠는데…….
“아, 아니야. 아닐 거야. 그가 그럴 리 없어. 그가 착해서 그래. 내가 버러지들을 청소하는 게 마음 아파서 제지한 걸 거야.”
로웨나는 머리칼을 움켜쥔 채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횡설수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릴 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대공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명령을 내려주소서!”
“대공 전하! 정신 차리셔야 하옵니다!”
기사들과 부하들이 로웨나를 붙들고 애원했지만,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그녀는 마치 고장 난 사람처럼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
결국,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로웨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선 피하셔야…….”
바로 그 순간.
촤라락!
로웨나가 휘두른 혈검(血劍)이 기사단장의 목을 그었다.
“컥, 커헉!”
기사단장의 잘린 목 단면 사이로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가긴 어딜 가?”
로웨나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기사단장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정말이지 섬뜩하고도 소름 끼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왜?”
“커헉…….”
“그가 날 보러 왔는데 거길 어딜 가라는 거야? 꺄하하하하하!”
미친 듯 웃어 대는 로웨나.
“미, 미쳤군.”
“완전히 미쳐 버렸어.”
“쯧쯧쯧.”
그녀를 섬기던 기사들과 부하들은, 완전히 미쳐 버린 주군의 모습에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몸서리쳤다.
물론 그녀의 광기가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다만 미래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녀에게 충성하고, 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그녀에게 충성을 바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광기에 잠식되다 못해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를 어떻게 섬기겠는가?
다른 무엇도 아니고, 고작 남자 하나에 미쳐서 대업을 그르치는 광인에게?
“우, 우리끼리라도 피하세.”
“빌어먹을!”
“파라곤 대공에게라도 몸을 의탁해야겠군!”
“누구에게 의탁하든 지금 그게 중요하오? 일단 피합시다!”
로웨나를 섬기던 이들이 우르르 어전을 빠져나갔다.
“……가자.”
“예.”
몇몇 기사들은 로웨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볼까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로웨나가 아무리 미쳤을지언정, 그녀의 무력은 알려진 것 이상이었다.
그녀는 아라드 제국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혈인(血印) 능력의 소유자.
황가의 가장 진한 피를 지닌 그녀의 무력은 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의 광기 역시 그러한 혈인능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벌어진 증상일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타고난 천성 탓이 더 크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로웨나를 상대한다는 건 기사들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괜히 덤볐다가 역으로 죽임을 당하느니,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가고, 로웨나는 홀로 남았다.
마치 그녀의 손에 죽은 테르테미안처럼, 그가 생을 마감한 어전에서 똑같은 입장이 되어 다가올 사신(死神)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 * *
연합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로웨나군을 굴복시켰다.
트리톤 5,000대를 앞세운 연합군의 군사력은, 큰 전투 없이도 로웨나군을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애초에 수십 톤에서 수백 톤짜리 강철 거인들이 밀고 들어오는데, 싸울 의지가 생긴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연합군이 오토의 공간 도약으로 워프해 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방어태세를 갖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 또한 사기 저하의 원인이었다.
대륙의 군대가 트리톤을 보유한 군대와 싸우려면 반드시 미리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술적인 우위에 선 상태여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전투가 성립할 수조차 없이 일방적인 학살극이 펼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오토는 로웨나군을 제압하자마자 로웨나를 처단하기 위해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을 이끌고 즉시 내성으로 향했다.
“…….”
“…….”
“…….”
누구도 오토 일행을 막아서지 않았다.
광기와 피에 대한 갈망을 주체하지 못한 로웨나는 민심뿐 아니라 충성심마저 잃어버릴 대로 잃어버린 뒤였기에, 그녀를 위해 목숨 바쳐 오토 일행을 막아설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이래야 로웨나의 최후답지.’
오토는 본래 시나리오 상에서 로웨나의 최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영지전쟁에서 플레이어가 로웨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그녀의 최후는 늘 똑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군사(軍師)이자 연인인 아도니스의 반란에 의해 죽을 운명이었다.
로웨나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던 아도니스조차 그녀의 지독한 광기와 밥 먹듯 벌이는 학살극을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키는 게 본래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오토가 만들어 낸 변수에 의해 로웨나를 만나지 못한 채 전쟁터로 끌려가 이름 없는 병사로 죽었다.
오토를 능가하는 천재적인 지략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의 단 1퍼센트도 꽃피우지 못한 채 스러진 것이다.
덕분에 로웨나의 집착의 대상은 아도니스가 아닌 오토가 되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졸지에 로웨나를 배신하고 그 목숨을 취하는 역할이 오토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문을 열어라.”
“예, 카미유 경.”
카미유의 명령에 마검사들이 어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왔어……?”
우두커니 서 있던 로웨나가 오토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토가 로웨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카미유가 혹시나 모를 위협을 경계해 오토를 만류했다.
“괜찮으니까 물러서 있어.”
“하지만…….”
“걱정 마.”
오토는 카미유를 안심시키고는 거침없이 로웨나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뽑지 않았다.
“누님.”
오토가 어느덧 로웨나의 바로 앞, 그녀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가 입을 열었다.
“동생…… 아니지? 그렇지? 날 배신하지 않았지? 응……?”
“당연히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오토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카미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토의 말은 궤변을 넘어 개소리에 가까웠다.
모든 정황이 오토가 로웨나를 배신하고 있다고 말하는 상황.
속된 말로 병신이 아니고서야 배신이 아니란 오토의 말을 믿을 머저리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최소 금치산자 수준으로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그 말을 믿을 리가.
하지만 정작 로웨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여, 역시 그렇지? 배신한 거 아니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동생이 날 배신할 리 없어.”
“제가 왜 누님을 배신하겠습니까?”
오토가 로웨나에게 슬며시 다가가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모두의 모험이고, 이간질이고, 또한 오해입니다. 저는 결코 누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아……!”
“많이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지! 가슴이 철렁했지 뭐야? 동생이 날 배신할 리가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순간.
푸욱!
무형(無形)의 비수가 로웨나의 가슴 정중앙, 심장에 틀어박혔다.
“……!”
로웨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오토가 차가운 표정으로 로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아닐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