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 같으니.’
아르곤 대제는 막상 오토의 얼굴을 보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연회에 참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실제로 보니 그게 잘되지 않았다.
오토의 외모가 워낙에 압도적이라서, 도저히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다.’
아르곤 대제가 고개를 저었다.
‘무릇 남녀 사이가 어찌 외모만으로 이루어지겠는가. 외모는 매력의 여러 요소 중 일부일 뿐이다.’
아르곤 대제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외모는 비벼 볼 수 없을 정도로 딸렸지만, 나머지 매력들이 오토를 압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한편, 오토는…….
‘어?’
오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가, 아르곤 대제를 발견했다.
‘저 새끼가 여기 있네?’
오토는 아르곤 대제가 연회장에 와 있는 걸 보고 피식 실소를 지었다.
오버하우저 상단이 망하기 직전이라 이런 자리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것 같더니, 어떻게 꾸역꾸역 온 모양.
‘하긴. 저런 기생충이 이런 좋은 자리를 놓칠 리 없지.’
오토는 아르곤 대제가 어째서 연회에 참석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르곤 대제는 타인을 이용해 먹는 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접근해서 사람 마음을 얻지. 그 다음에는 상대방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척하면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그러다 잡아먹어도 되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180도 돌변해서 뒤통수를 때리지. 그게 니 수법이잖아.’
오토뿐 아니라 게임 <영지 전쟁>을 어느 정도 플레이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르곤 대제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게이머라면 처음에는 아르곤 대제가 제공하는 이런저런 편의 때문에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고 분노하기 마련.
‘인맥을 넓히려고 기어 온 거겠지. 호구 하나 물어서 상단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애쓴다, 애써.’
오토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르곤 대제를 향해 슬쩍 목례를 건넸다.
매우 정중한 표정으로.
그러자 아르곤 대제 역시 오토를 향해 목례를 보냈다.
희게 웃으며.
하지만 두 사람의 겉과 속은 180도 달랐다.
‘이 기생충 새끼.’
‘네놈의 약혼녀를 빼앗아 주마.’
오토와 아르곤 대제는 겉으로는 목례를 주고받으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도 잠시.
오토와 아르곤 대제는 이내 곧 시선을 돌리고, 각자의 할 일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연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가 열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일 순 없었으니까.
* * *
“…부디 즐겁게 즐겨주길 바라노라! 하하하!”
연회에 앞서 현 아라드 제국의 황제인 킬리언 2세의 짤막한 연설이 있었다.
그런 킬리언 2세를 바라보는 오토의 속은 매우 복잡했다.
‘저 인간이 세계대전의 가장 큰 원흉이라니.’
물론 다가올 세계대전의 원인은 킬리언 2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킬리언 2세의 역할이 가장 크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젊은 황제인 킬리언 2세는, 철부지 중의 철부지였다.
황위에 오른 이유도 선황의 장자였기 때문이지, 황태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결코 아니었다.
킬리언 2세는 허세부리기를 좋아하고, 고집이 셌으며, 허영심이 큰데다가, 또한 매우 우유부단하고 유약했다.
대제국의 황제와는 빈말로라도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물론 황위 계승권 문제가 깔끔했더라면 킬리언 2세의 성격쯤이야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저 암군(暗君), 즉 무능하고 어리석은 황제로 어영부영 한 시대를 흘려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때 형제자매들을 숙청하지 못한 것 때문에, 킬리언 2세의 황권은 매우 불안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킬리언 2세에게는 한 명의 여동생과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이황녀 로웨나.
삼황자 테르테미안.
사황자 파라곤.
뛰어난 능력은 기본.
그들은 마치 용과 호랑이 같은 인물들로서, 세 명 모두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지지세력 또한 탄탄했다.
게다가 세 명 모두 어마어마한 야심을 갖추고 있어서,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세 명 모두 주인공 캐릭터인 100인의 군주이기도 했고.
‘선황도 멍청했지. 황태자인 킬리언 2세를 황위에 올리겠다고 작정했으면 자기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숙청해 버렸어야지. 차마 못 죽이겠으면 지지 세력이라도 박살내서 팔다리로 잘라 놓던가. 쯧쯧.’
오토는 죽은 선황을 향해 혀를 찼다.
하지만 이건 선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킬리언 2세 또한 황위에 올랐으면 자신의 동생들을 숙청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천성이 아둔한지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혈육이란 이유만으로 동생들을 내버려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은 각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함께 무섭게 성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숙청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곧 내전이 벌어지겠지. 형제들끼리 황위를 놓고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질 거야.’
세계대전의 시작은 아라드 제국의 내전에서부터 비롯된다.
형제들끼리 황위를 놓고 골육상잔의 끔찍한 전쟁을 벌이고, 그걸 계기로 전쟁의 불씨가 전 대륙으로 번져 나가게 될 터.
결국, 세계대전의 불씨는 아라드 제국 황가의 집안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연회나 열고 자빠졌고. 어휴.’
오토는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며 황제 노릇에 심취해 있는 킬리언 2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아둔함이 이 대륙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도 모른 채 연회나 즐기고 있다니.
‘그래서 대제국의 황제란 자리가 무거운 거지. 황제의 유능하면 대륙이 평안하지만, 무능하면 피바람이 불 테니까.’
오토가 샴페인을 마시는 킬리언 2세를 바라보며 씁쓸해할 때.
“무슨 생각하나.”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의 용안을 보고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져서요.”
“어떤 생각이 많아졌나.”
“글쎄요.”
오토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생각을 입 밖에 냈다간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이 뎅겅 날아갈 걸요?”
“누가 네 목을 친다는 건가.”
엘리제가 표정을 굳혔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너를 괴롭히거나 해칠 수 없다.”
“알죠, 알아요.”
오토는 순간 엘리제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진 걸 보고 그만 식겁할 뻔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칼바람이 휘몰아칠 것만 같았다.
“아무튼, 대단히 불경스러운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설마… 황제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건가?”
“에이.”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황제 같은 거, 시켜 줘도 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런가? 하지만 이번에 정복전쟁을 벌여서 영토를 넓히지 않았나.”
“그거야 살기 위해서죠. 미래를 대비한 예방전쟁입니다, 그거.”
“그게 정말인가? 나는… 네가 야심이 있는 줄 알았다.”
“저 야심 같은 거 없는데요.”
“그랬나?”
“남자가 돼 가지고 야심 없으면 좀 그렇죠?”
“아니다.”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왕의 야심이란 전쟁을 부르기 마련 아닌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전쟁을 일삼는 건… 솔직히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시골 마을에서 텃밭을 일구는 남자가 더 좋아 보인다, 나는.”
엘리제는 전쟁의 여신.
장벽 너머에서 매일 같이 전투를 치르는 그녀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전쟁광이 아니다.
그저 장벽 너머의 야만 북부제국으로부터 이 대륙을 지켜내는 수호신일 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피를 흘려서 뭐 하겠어요. 업보만 쌓일 뿐인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킬리언 2세가 황후를 데리고 연회장 정중앙에 자리한 무도회장으로 나섰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 황제와 황후의 춤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이윽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무도회장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실까요?”
오토가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다.”
엘리제가 오토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윽고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녀의 춤이 무도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 *
춤을 추기 시작한 오토와 엘리제는 무도회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뒤집어 놓긴… 개뿔.
“…엘리제 님. 표정 좀 푸세요.”
“음?”
“여기 전쟁터 아니잖아요. 부드럽게. 그냥 편안하게.”
엘리제의 춤 실력은 엄청나게 발전해서, 이제는 거의 프로 무용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표정만큼은 여전히 살벌하기 짝이 없어서, 마치 죽음의 무도(舞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토는 엘리제의 표정을 풀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누구 죽이러 왔나?”
“당장에라도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 같군.”
“세상에. 저런 무서운 표정은 처음 봤어.”
둘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엘리제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겁을 집어먹었을 정도였다.
“미, 미안하다. 춤을 추면 왠지 긴장이 된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버린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즐겁게 추세요.”
“노력해 보겠다.”
그렇게 한 번의 춤사위가 끝나고.
“내 딸은 내가 데려가겠네.”
란돌 공작이 엘리제를 데려갔다.
“고맙네.”
“예?”
“내 평생 내 딸아이가 춤을 추는 것을 보지 못할 줄 알았네. 하지만 자네 덕분에 이렇게 딸과 춤도 춰보는 호강을 누리는구먼.”
란돌 공작이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 맞다. 나랑 처음으로 춤을 춰 봤다고 하셨지.’
오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제를 란돌 공작에게 보내 주었고, 혼자가 되었다.
그러자 제국 귀족가의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 오토에게 춤을 신청했다.
“호, 혹시. 같이 추실 수 있을까요?”
“저와 추시는 건 어떠세요?”
“같이 추실래요?”
덕분에 오토는 난처해지고 말았다.
찌릿찌릿!
엘리제의 오빠들이 일제히 고개를 홱! 돌려서 오토를 노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감히 내 동생을 두고 다른 여자와 춤을 추겠다?’
‘얼굴값 하겠다는 거냐?’
‘어디 춰 보시지.’
오토는 그런 엘리제 오빠들의 따가운 시선에 도저히 다른 여성들과 춤을 출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그래!!! 나도 추기 싫다고!!!’
오토는 억울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춤을 신청했던 영애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좀 피곤해서.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그땐 꼭 같이 추겠습니다.”
바로 그때.
“어머, 너 좀 귀엽고 잘생겼다?”
웬 엘프 여인이 오토에게 다가와 추파를 던졌다.
그녀는 인간으로 치면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성숙한 아름다움을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엘프 나이로 치면 못해도 650살은 먹은 누님이겠는데?’
오토가 그렇게 생각할 때.
“넌 이름이 뭐니?”
엘프 여인이 엘프답지 않게 매우 껄렁껄렁하고 불량한 말투로 오토에게 물었다.
“아, 예.”
오토는 자기도 모르게 엘프 누님의 기백과 박력에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난 아리엘이라고 한단다, 귀엽고 잘생긴 아가야. 붉은 숲에 자리한 엘프들의 영지 메이드리엘의 왕녀지.”
“아, 그러셨군요.”
오토도 붉은 숲이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한 곳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 왕녀님이셨군요.”
“그냥 누님이라 부르렴.”
“누, 누님이요?”
“내 나이가 올해로 666살이란다. 호호호.”
“하하. 하하하. 아직 한창이시네요.”
바로 그때.
‘잠깐.’
오토는 뭔가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아리엘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