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전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애초부터 단숨에 끝날 수밖에 없었던 전투였다.
오토는 성난 늑대 부족의 군대, 정확히는 베큠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난 늑대 부족보다 한 발 더 빠르게 피의 능선을 점령하는, 대단히 과감한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에르제베트 왕국군과의 전투 직후 쉬지도 않고 피의 능선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덕분에 이오타 왕국군과 천둥 발굽 부족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더해, 뿔피리를 불어 성난 늑대 진영 안의 우르크 울프들까지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오토의 계략 덕분에 천둥 발굽 부족은 성난 늑대 부족의 본대를 너무나도 쉽게 제압했다.
그리고…….
털썩.
바그람과 맞서 싸우던 성난 늑대 부족의 족장 베큠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베큠은 일어나지 못했다.
바그람이 휘두른 아스트라의 도끼에 너무나도 큰 부상을 입어서, 그대로 즉사했던 것이다.
“취이이이이이이이이익!!!”
바그람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성난 늑대 부족이여! 취익! 이제 그만 항복하라! 취이이익! 너희들의 족장은 전사했다! 취이익!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취이이이이익!”
바그람이 베큠의 전사를 널리 알리자 성난 늑대 부족의 전사들은 곧바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성난 늑대 부족이 제아무리 사납고 잘 싸우는 오크들이라 한들, 차우차우를 타고 아스트라의 도끼를 휘두르는 바그람을 상대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취이이이이이이이익!!!”
피의 능선에 이오타 왕국군과 성난 늑대 부족 전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고생했어.”
오토가 바그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이제 우르크 평원은 네 거고, 너는 오크 군주가 될 거다.”
“취, 취익.”
바그람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과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우르크 평원의 패권을 손에 넣을 줄은 꿈도 꾸지 못했으므로…….
“정말… 취익. 고맙다. 취익. 친구.”
바그람이 오토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취익.”
“말했잖아. 평생 천천히 갚아 나가라고.”
오토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도 했고.”
“바토리 말이냐? 취익?”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부활했을걸?”
“취익. 부활한다 해도 소용없다. 취익. 다시 쳐부숴 줄 것이다. 취익. 두 번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도록. 취익.”
“그게 어디 쉽나.”
“취익…?”
“바토리는 혼자만 부활한 게 아냐.”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취익.”
“에르제베트 왕국의 왕궁 지하무덤에 잠들어 있던 영웅들도 같이 부활했어.”
“취이이익?!”
바토리로도 게임을 플레이해 본 경험이 있는 만큼, 오토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토리가 부활시킨 영웅들.
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업적을 이룩해 역사서에 이름이 남은 기사들이었고, 죽어서도 에르제베트 왕국을 지키는 호국영령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능력을 겸비한 이름난 영웅들이라, 상대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사악한 흑마법에 의해 부활했지만, 그 또한 영웅들이 살아생전 조국의 미래를 위해 결정한 것.
죽음의 기사들로 부활한 호국영령들의 강력함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통의 언데드 몬스터들처럼 전투력만 강한 게 아니라, 인간 시절의 지성과 지혜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까지 했다.
부패여왕으로 다시 태어난 바토리는, 스스로의 강함뿐 아니라 수백여 기의 고급유닛들까지 갖춘 것이다.
실제로, 바토리의 플레이는 성물인 부패한 심장을 발동한 후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오토가 바그람에게 조언했다.
“바로 왕위에 오르고, 불만 세력들을 쳐부수고, 우르크 평원을 안정시켜. 그래야 바토리와 다시 겨룰 수 있어. 한번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 자만하는 순간 우르크 평원이 한순간에 멸망할 테니까.”
“취익! 알겠다!”
바그람은 오토의 조언을 깊게 새겨들었다.
오토에 대한 바그람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
만약 오토가 대신 죽어 달라고 한다면, 바그람은 기꺼이 그럴 용의가 있었다.
어느새 바그람은 오토를 친구 이상의 존재로서, 믿고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 * *
에르제베트 왕국의 패전 소식은 순식간에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강대국인 에르제베트 왕국이, 우르크 평원 정벌에 실패하고 대패를 당하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우르크 평원에서만 패배한 게 아니라, 주변 세력들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국토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기고 여러 전략적 요충지들을 잃기까지 했다.
이오타 왕국과의 무역 분쟁을 시작으로 국력이 급격히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격은 엄청나게 훼손되었고, 대륙 여러 나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우르크 평원과 남쪽 약소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서, 에르제베트 왕국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본래 대륙 서남부의 물류의 흐름을 통제하면서 부를 축척해 왔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지니 더 이상은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이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주변 세력들은, 신이 나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오토는 그런 주변 세력들을 뜯어말렸다.
“대공 전하.”
오토는 우르크 평원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하자마자 와지르 대공을 만났다.
“지금 즉시 에르제베트 왕국에 대한 주변 세력들의 공격을 멈추라고 해 주세요.”
“엥? 그게 무슨 말이냐?”
와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의 선택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에르제베트 왕국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국왕인 바토리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열심히 저어야 할 상황이지, 공격의 고삐를 늦출 때가 아니었다.
“지금 왜 공격을 멈춰?”
“바토리가 다시 돌아올 거거든요.”
“음?”
“눈 앞에서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오토는 와지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는 한편, 바토리가 더욱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란 암시를 주었다.
“그게 정말이냐?”
“네, 심상치 않습니다.”
“으음.”
“게다가 우연히 입수한 고대 비밀문서에서, 에르제베트 왕국이 위기에 처하면 호국영령들을 부활시켜서 위기를 헤쳐 나간다는 내용의 계획이 있었거든요.”
“호국영령들을 부활시킨다라….”
와지르는 오토의 말을 듣고 한동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제베트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하지. 알겠다. 내 주변 세력들에게 공식적인 문서를 보내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도록 하마.”
와지르는 솔직히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오토가 그렇다니 그러려니 했다.
게다가 에르제베트 왕국은 오랜 세월 강대국으로서 군림해 온 나라인지라, 그만한 저력이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이다.”
“네?”
“조만간 아라드 제국에 한번 다녀오도록 해라.”
“제가요?”
오토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끔뻑였다.
“그럼 네 녀석이지 누구겠느냐?”
“왜죠?”
“로웨나가 네 녀석을 좀 보고 싶다는구나.”
“저를요? 으음.”
오토는 뜬금없는 로웨나의 만남 요청에 살짝 당황했다.
로웨나는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주역(?) 중 하나.
현 아라드 제국 황제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인간이 바로 로웨나이기도 했다.
“왜 갑자기 저를 보자는 겁니까?”
“글쎄다.”
와지르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 서쪽의 신흥강국으로 자리 잡은 이오타 왕국의 국왕과 친해지고 싶은 것 아니겠느냐?”
“그런가요?”
“뭘 묻느냐? 네 녀석 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 그럴 모를 리도 없는데.”
“그건 그렇죠.”
“아무튼, 시간 나면 만나 보도록 해라. 이번에 아라드 제국군이 움직인 것에 대한 대가성 만남이니, 잘 접대하고.”
“저, 접대요?”
“아무리 신흥강국의 왕이라 한들 세계 최강대국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대공을 상대로는 접대를 해야겠지? 이거 말이다.”
와지르가 손바닥을 비비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하… 하하하.”
오토가 난감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물론 오토는 그런 것에 매우 능했다.
자존심?
국익을 위해서라면, 오토는 언제든지 내팽개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실리를 추구하는 오토의 성향상 힘세고, 돈 많고, 권력이 센 사람들 앞에서 괜히 자존심을 내세울 리도 없었고.
“번지르르하게 잘 꾸미고 가서 아양이라도 떨면 로웨나가 살살 녹을 게다.”
“예…?”
“네 녀석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대륙 제일이질 않느냐.”
와지르가 얼굴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살롱에서 일하는 접대남들보다야 네 녀석이 훨씬 낫지. 끌끌끌.”
“…….”
“아무튼, 잘해 보도록 해라.”
졸지에 접대남 취급을 당한 오토는 어이가 없어 벙찐 표정을 지었다.
* * *
오토의 명령에 따라서, 와지르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주변 세력들에게 외교 문서를 보내 공격을 중지하고 재정비할 것을 요청했다.
대부분의 세력들은 외교문서를 보고, 즉시 공격을 중지했다.
현재 이오타 왕국은 반 에르제베트 진영의 수장과도 같은 포지션이었기에, 대부분의 세력들은 그 요청을 군말 없이 따랐다.
하지만 몇몇 세력들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오타 왕국이 보낸 외교문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이 기세를 몰아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를 더더욱 갉아먹으면 되는데, 왜 멈춰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 세력들은 공세종말점을 넘어서, 계속해서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를 공격하며 최대한 많은 이득을 취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경들은 들으라.”
부패여왕으로 거듭난 바토리가 어전에 들어섰다.
“저, 전하!”
“전하! 무사하셨나이까?”
“오오오!”
에르제베트 왕국의 대소신료들은 행방불명되었던 바토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근위기사단과 함께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바토리의 재등장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더욱 대소신료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건 몰골이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위에서 아래로 누덕누덕 기워진 흉터가 너무나도 끔찍했다.
게다가 핏기 없는 피부, 시퍼런 입술, 초록색으로 빛나는 두 눈까지.
다시 나타난 바토리의 모습은 살아생전 아름답고 생기있던 모습이 아니라,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어전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오싹!
대소신료들은 엄습하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바토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죽음의 숨결이 대소신료들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면서, 엄청난 압박감을 선사했던 것이다.
“과인의 부재로…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려 했던… 불충한 자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국왕을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신하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바토리가 근위기사단과 함께 행방불명된 이후 대소신료들 중 몇몇은 왕가의 방계 중 하나를 옹립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건 그들의 권력욕에서 나온 의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비상사태.
국왕인 바토리의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왕위를 오래 비워두었다가는 나라꼴이 얼마나 더 개판이 될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조금 성급한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러나 바토리가 이렇듯 건재한 모습―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으로 돌아온 이상 새로운 왕의 옹립을 주장했던 신하들의 입장에 난처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전하! 소신들은 그저 본국의 안위를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신하들이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국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했으니, 반역죄로 다스려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