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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엘리제는 그 존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는 적인 데다, 이 세계 사람들을 열등한 종족이라 비하하며 마치 장난감 다루듯 이야기하는 저 태도가 불쾌하기만 했다.

스윽.

엘리제가 검을 들었다.

문답무용.

상대는 강함을 떠나 말을 섞을 가치가 없었다.

그저 검으로 자신을, 가슴 속에 품은 의지를 표현하면 그만이었다.

엘리제는 그게 편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였다.

그녀가 진심을 드러내며 소통하는 사람은 오직 오토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고.

‘저자가 내 존재의 이유다.’

엘리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존재가 자신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난 이유라는 것 또한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자를 죽이는 것.

그게 이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엘리제의 검 아드리안으로부터 시퍼런 오러가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건방진.”

라미레스는 그런 엘리제의 반응이 불쾌하기만 했다.

그는 고등한 종족인 시타델의 여러 군주들 중 하나.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시타델이 정복해 온 행성들, 그리고 그곳에 살던 종족들만 해도 수천이 넘었다.

개중에는 우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하고 뛰어난 생명체들도 많았다.

그런데 한낱 하등하고 열등한 인간 주제에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라미레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하고, 괘씸한 일이었다.

“감히.”

라미레스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우웅!

그의 분노에 대기가 진동하고, 주변 시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에너지가 휘몰아치며, 일대를 짓눌렀다.

“커헉!”

“크어어어억!”

그의 주변에 자리했던 이들은 라미레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에너지에 의해 몸이 으스러지고, 찌그러져 죽음을 맞았다.

라미레스를 중심으로 반경 50미터가 죽음의 영역으로 돌변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엘리제만이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영역에서 홀로 고고히 검을 들고 있었을 뿐.

“강해.”

라미레스는 엘리제가 자신의 영역 안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걸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른 생명체들 같았으면 죽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신이 붕괴해 버렸을 테니까.

그건 엘리제가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기도 했다.

“직접 죽일 가치는 충분하겠어.”

라미레스가 손을 뻗었다.

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플라즈마 에너지로 이루어진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나를 상대하게 된 것이 더없는 영광이자 불행이라는 것을.”

그와 동시에 라미레스가 엘리제를 향해 쇄도했다.

엘리제 역시 라미레스에 맞서 몸을 날렸다.

뒤이어 엘리제와 라미레스의 검이 맞부딪쳤다.

충돌 순간.

쩌어어어어어엉―!!!

전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귀청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엘리제와 라미레스의 에너지가 충돌하며 대폭발이 일어나 반경 100미터가량을 휩쓸었다.

세기의 대결.

이 세계의 최강자인 엘리제.

그리고 이계에서 온 마신 라미레스.

둘의 충돌은 일반적인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 일격에도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를 파괴력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 * *

오토는 전투를 지휘하며 정신없이 적들을 쳐부수고 있었다.

카미유 역시 그런 오토를 보조하며 맹활약했다.

오토가 폐관수련에 든 동안 광속검의 경지를 한층 끌어 올린 카미유의 검술은, 잘츠부르크 가문의 혈족들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 북부제국군 진영 한복판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며,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

오토는 깨달았다.

마신과 엘리제가 격돌했음을.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 없다.’

오토는 그렇게 판단했다.

둘의 대결은 일대를 초토화시킬 게 분명했고, 싸움이 계속될수록 반경 몇 킬로미터는 쑥대밭으로 만들 터.

그럼 아군이나 적군이나 엄청난 피해를 입으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애꿎은 제3자들이 엘리제와 마신의 전투에 휘말려 무의미하게 죽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병력을 물린다.’

이미 북부제국군은 절반 이상을 잃었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며, 보급도 완전히 바닥이 난 상황.

게다가 사기까지 바닥을 쳤기에 더 이상의 전투 수행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더 몰아붙이지 않아도 북부제국군이 자멸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

게다가 본토가 초토화되고 흑해의 제해권마저 장악당한 마당에 후속 병력을 보내올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북부제국군은 이 전투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후속 병력을 보내 세계대전에 개입해야 했을 테지만, 그건 이제 불가능했다.

정해진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었기에…….

“전 병력! 후퇴하라! 위험지역에서 즉시 벗어나라!”

오토의 음성이 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연합군은 오토의 명령에 따라 즉시 전투를 중지하고, 차근차근 물러났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북부제국군은 워낙에 궁지에 몰려 있었기에, 연합군이 물러나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감히 후퇴하는 연합군의 뒤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과 북부제국군 간에 벌어졌던 전투는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그런 오토의 판단은 옳았다.

엘리제와 마신의 대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퍼어엉! 펑펑! 퍼어엉!

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천지개벽.

엘리제와 마신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폭발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꽁꽁 얼어붙어 있던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지진이 일어났다.

하늘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연신 번개를 토해 내었으며, 주변 공간은 일그러지고 깨어져 이게 현실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누구도 엘리제와 마신의 대결에 접근하지 못했다.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그 압력에 짓눌려 즉사하는 걸 피하지 못했다.

“크으윽!”

“으윽!”

심지어, 잘츠부르크 가문의 혈족들조차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악!”

오죽했으면 여동생 엘리제가 걱정되어 싸움에 끼어들려던 케레스가 후폭풍에 휘말려 수십여 미터를 나가떨어진 뒤 기절했을까.

그게 엘리제가 1,000년에 단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타고난 이유였다.

이계의 군주인 마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힘이 필요할 터.

그러니 우주의 법칙이 엘리제에게 세계관 최강자의 힘을 부여할 수밖에.

“혹시 모르니까.”

오토가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병력 재정비하고 대기해.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

“예……?”

“도와줘야지.”

오토는 그 말을 남기고는 엘리제와 마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저, 전하!”

“괜찮으니까 병력 재정비해.”

“하지만…….”

“누군가 끼어들지 않으면 엘리제가 죽어.”

이 대결의 결말은 양패구상이었다.

엘리제와 마신.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공멸하는 게 본래 시나리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오토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이날만을 위해.

엘리제를 살리기 위해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해 온 오토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따 봐.”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전하!”

카미유가 오토를 뒤쫓았지만, 그는 싸움의 현장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커헉!”

충격파에 휩쓸린 카미유가 피를 토해 내었다.

그로서는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싸움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건 오토도 마찬가지였다.

“……크윽!”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싸움의 현장으로부터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충격파가 덮쳐 올 때마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주르르륵!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전신 근육이 파열될 것만 같은 고통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끼어들 수 없는 싸움.

그것이 설령 초인적인 힘을 가진 오토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끼어들 수 없어.’

그렇다면…….

촤라라락!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펼쳤다.

대학살의 서는 고대의 금지된 마법들이 수록되어 있는 마도서.

그 안에는 이 무시무시한 압력으로부터 오토를 지켜 줄 주문이 하나쯤은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산 것들에 깃들어 있던 의지의 힘이여…… 가장 가치 있는 물질이여…….”

오토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스으으으으으으……!!!

뒤이어 대학살의 서에서 영혼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오토의 몸을 휘감았다.

촤락, 촤라락!

이윽고 영체(靈體)로 이루어진 물질이 갑옷의 형상을 취했다.

그것은 대학살의 서가 흡수했던 영혼 에너지로 이루어진 갑옷이니만큼, 그 강도는 충분했다.

‘기다려, 지금 가니까.’

주변의 충격파가 워낙 거세서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오토는 싸움의 현장을 향해 질주했다.

* * *

‘……강하다.’

라미레스와 공방을 주고받던 엘리제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압도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라미레스는 단순히 강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엇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기생체인 시타델 종족의 군주인 라미레스는 일생 동안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숱한 전투를 치러 온 투신(鬪神)이었다.

그는 타고난 강함은 물론,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엘리제를 압도하는 괴물 중의 괴물.

그런 라미레스의 압도적이고 무지막지한 무력 앞에서, 엘리제는 처음으로 수세에 몰렸다.

그러던 중.

“끝이다.”

라미레스가 엘리제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왔다.

‘……이건.’

엘리제는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향해 날아드는 라미레스의 검에 의구심을 가졌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격.

분명 조금 전까지 공격을 피해 내고 반격했던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치명타가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 조작?’

엘리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라미레스의 의지가 공간을 지배하고, 심지어 시간의 흐름마저 인위적으로 조작해 낸 모양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되돌려 엘리제의 회피와 반격을 무위로 만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응하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새 라미레스의 검이 엘리제의 가슴 정중앙에 다다라 있었다.

이대로라면 즉사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치명적 일격.

‘피해라도 줄인다.’

엘리제는 심장 대신 왼쪽 가슴팍을 내어 주기로 하고, 몸을 틀었다.

비록 치명상을 입겠지만, 심장이 꿰뚫려 즉사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

눈 하나 깜빡거릴 시간보다 적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로 반격을…….’

엘리제가 치명상을 입은 후를 생각할 그때.

퍽!

오토가 몸을 던져 엘리제를 밀어내었다.

쩌어어어엉―!!!

무형의 칼날이 라미레스의 검을 튕겨 내었다.

“……!”

쓰러진 엘리제가 놀라는 사이.

촤라락!

오토가 휘두른 무형검이 라미레스의 빈틈을 노렸다.

푸화아아악!

라미레스가 가슴팍에서 시퍼런 피를 뿜어내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괜찮아?”

영혼 에너지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은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엘리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오토가 했던 약속이 엘리제의 뇌리를 스쳤다.

“이젠 내가 자기를 지켜줄 거야.”

오토는 약속을 지켰다.

엘리제를 가슴 설레게 했던 그 약속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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