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이오타 왕국을 탈출한 오토는 즉시 쿤타치 가문에 자리한 성역으로 들어갔다.
“앗!”
“전하!”
성역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오토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쉿.”
오토는 콘라드에게 붙잡히기가 싫어서,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렸다.
“비밀입니다, 아시겠죠?”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시달리는 오토 입장에서, 콘라드에게까지 붙잡힌다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가문의 미래가 어쩌고저쩌고.
하루빨리 후손을 보아야 한다.
쿤타치 가문의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
기타 등등등.
콘라드는 오토만 보면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온종일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곤 했다.
물론 오토도 콘라드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콘라드는 이제 늙었고, 머지않아 가주 자리와 공국의 왕위를 오토에게 물려주고 은퇴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오토는 콘라드의 유일한 혈육.
그러다 보니 콘라드가 오토를 붙들고 하소연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당하는 오토의 입장에선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성역에 권능을 얻으러 온 거니까, 비밀로 해 주세요.”
그러자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예, 전하.”
그렇게 오토는 기사들을 지나쳐 성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섯 개의 석상 중 어릿광대의 석상 앞에 섰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어릿광대의 석상.
저 뒤에 봉인되어 있는 힘은, 무적황제의 다섯 가지 권능 중 가장 활용도가 높았다.
‘가자.’
오토는 망설임 없이 어릿광대의 석상을 지나쳐 던전 안으로 입장했다.
* * *
어릿광대의 석상 뒤에 자리한 던전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새하얀 바닥.
새하얀 배경.
온 세상이 온통 새하얬다.
그러다 보니 공간감각과 원근감이 완전히 무력화되어서, 상하좌우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릿광대는 그런 무의 공간에 홀로 우두커니 자리하며, 오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어릿광대가 오토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넌 누구냐?”
“오토 드 스쿠데리아.”
오토가 대답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그냥 오토라고 불러.”
“그렇군!”
어릿광대가 훌쩍 공중제비를 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놈은 아닌 모양이네? 여길 다 들어오고. 그거 알아? 여기 들어온 존재는 네가 처음이라는 거.”
“그렇겠지.”
이곳 성역에서 권능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마지체를 이룬 사람뿐.
오토는 성역이 생긴 뒤 신마지체를 이룬 최초의 인물이라, 던전에 처음 들어온 존재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나랑 놀아주러 온 거야?”
어릿광대가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
오토는 순간 움찔! 놀랐다.
‘어느 틈에?’
어릿광대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라서, 언제 곁으로 다가왔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렇지? 나랑 놀아주러 온 거지?”
“…….”
“어떻게 놀아줄 건데?”
어릿광대가 이번에는 오토의 코앞에 나타나 물었다.
오토는 이번에도 어릿광대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했다.
“근데 너 그렇게 느려서 나랑 놀아줄 수 있겠어?”
“…….”
“그렇게 느려 터지면….”
다음 순간.
퍽!
어릿광대가 손날로 오토의 콧잔등을 내리쳤다.
“악!”
오토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오토의 코에서 코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눈 뜨고 코 베인다?”
“크윽!”
“잘생긴 얼굴에 코가 없으면 곤란해질걸? 히히히!”
“이 새끼.”
오토가 검을 뽑아 들고 어릿광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화났어?”
어느 틈에 오토의 등 뒤에 나타난 어릿광대가 히죽 웃으며 익살을 부렸다.
“화내지 마. 난 그냥 같이 놀려는 것뿐이니까. 헤헤헤.”
“…….”
“진짜 화난 거 아니지?”
그 순간.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진짜 화난 거 아니지?”
수십여 명의 어릿광대가 일제히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릿광대는 엄청나게 빨라서, 그 움직임을 도저히 쫓아가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분신술까지.
“이제부터 우리가 술래야.”
“이제부터 우리가 술래야.”
“이제부터 우리가 술래야.”
어릿광대들이 몽둥이를 슥 꺼내 들더니 오토에게 말했다.
“힘껏 도망치라구? 안 그러면 흠씬 두들겨 맞게 될 테니까!”
“힘껏 도망치라구? 안 그러면 흠씬 두들겨 맞게 될 테니까!”
“힘껏 도망치라구? 안 그러면 흠씬 두들겨 맞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어릿광대들이 오토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토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어릿광대의 분신술은 파훼법, 그러니까 공략법이 매우 명확했다.
스으으!
오토의 두 눈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보인다.’
오토는 수없이 많은 어릿광대들 가운데 본체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투시 능력은 어릿광대의 분신술을 카운터 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촤라락!
오토가 수십여 명의 어릿광대들 중 본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악!”
본체가 나가떨어지고.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나머지 가짜 어릿광대들이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으윽!”
어릿광대가 피를 철철 흘리며 오토를 향해 이를 갈았다.
“칼립소는 언제나 날 감시하곤 한단 말야. 크윽. 너도 칼립소의 눈을 가지고 있구나?”
“물론.”
“그럼 어쩔 수 없지. 내 친구들은 못 부르겠네.”
어릿광대가 말하는 친구들이란 다름 아닌 분신들을 뜻했다.
그 말은, 오토에게는 분신술이 통하지 않으니 더는 사용하지 않겠단 말이었다.
“상관없지. 훗.”
어느 틈에 오토의 등 뒤에 나타난 어릿광대가 히죽 웃었다.
“너랑 놀면 되니까.”
“……!”
“얍!”
어릿광대가 몽둥이를 휘둘러 오토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퍼억!
오토는 어릿광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어릿광대의 움직임은 단순히 속도가 빠르다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속도였다.
사실 직접 움직였다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어릿광대는 그냥 자신이 원하는 지점으로 순간이동했을 뿐, 두 발로 뛴 게 아니었다.
즉, 이동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캐스팅 없이 무호흡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토로서는 어릿광대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참는다.’
오토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어릿광대의 무호흡 텔레포트 역시 공략법이 명확했기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여기도 비었네?”
어릿광대가 슬쩍 오토의 곁에 나타나 또다시 정수리를 노리던 순간.
번쩍!
오토의 눈에서 회색 섬광이 빗발쳤다.
“……!”
어릿광대의 두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쩍!
쩌억!
석화 광선에 노출된 어릿광대는 더 이상 무호흡 텔레포트를 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오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촤라라락!
오토가 어릿광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툭! 툭! 툭! 툭!
어릿광대가 네 조각이 나 허물어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마치 장난감 인형이 네 조각이 난 모습이었다.
“…너.”
어릿광대가 두려움에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다음 순간.
어느새 몸을 이어 붙인 어릿광대가 저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만 화내!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해 줘!”
오토는 즉시 어릿광대를 뒤쫓았다.
‘이게 마지막 패턴이지.’
경험상 어릿광대는 무호흡 텔레포트와 분신술이 파훼당하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도망치는데, 그런 어릿광대를 해치우는 것이 이 던전의 공략 조건이었다.
문제는 어릿광대가 엄청나게 빨랐다는 것.
굳이 무호흡 텔레포트가 아니라도, 도망치는 어릿광대의 속도는 시속 200킬로미터는 가뿐히 넘어 보였다.
제아무리 오토라 할지라도 도저히 쫓아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오토조차도 지금 상황에 대한 공략법을 몰랐다는 것.
‘패턴이 있어야 하는데?’
게임으로 플레이했을 때는 어릿광대가 도망치는 방향이나 경로에 패턴이 있어서, 타이밍만 잘 잡으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망치는 어릿광대에게는 패턴이랄 게 없었다.
게다가 속도도 들쭉날쭉 개판이라서, 잡힐 듯 말 듯 교묘하게 오토를 약 올리는 것 같았다.
빠를 때는 엄청나게 빠르고.
느릴 때는 곧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이 거리가 좁혀지고.
‘어떻게 해야 하지?’
오토는 어릿광대를 잡을 방법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골머리를 앓았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오토는 어릿광대를 끝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기를 무려 3일.
“헉, 허억!”
오토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3일 내내 어릿광대를 쫓아다녔지만, 끝끝내 붙잡지 못한 것이다.
* * *
“히히히! 그만 쫓아와! 넌 날 잡을 수 없어! 히히!”
어릿광대가 저 멀리서 오토를 약 올렸다.
“그만 포기해!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날 못 잡아!”
“…….”
“히히! 히히히히! 나 잡아 봐라! 히히히히!”
어릿광대는 끊임없이 오토를 놀려대며, 그를 자극했다.
“너 진짜 잡히면 뒈질 줄 알아라.”
오토가 어릿광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지난 3일 내내 그림자조차 잡지 못했고, 체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다.
‘포기하고 물러나야 되나?’
오토는 공략법을 찾아낼 때까지 어릿광대 공략을 미룰까도 고민했다.
도저히 답이 없어서, 이대로라면 시간만 낭비할 뿐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닌데. 분명히 공략법이 있을 텐데.’
그러나 공략이 불가능한 던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법.
아직 미처 알아채지 못한 실마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만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뭘까.’
오토는 나 잡아 봐라! 하고 외쳐대는 어릿광대로부터 신경을 아예 꺼 버렸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기를 쓰고 잡으려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칼립소의 눈이 분신술과 텔레포트의 카운터. 근데 야만용사의 함성은 안 먹히던데. 대학살의 서는 영혼에너지가 없어서 사용할 수 없고.’
대학살의 서는 사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어디엔가 힌트가 있어. 뭘까.’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이곳은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무의 공간.
하늘, 땅, 전후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다.
‘뭘 어쩌라는 거지? 주변에 딱히 지형지물이나 오브젝트 같은 것도 없는데. 필드에서 힌트를 찾을 수 없다면… 잠깐.’
불현듯 어떠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이 공간 전체가 힌트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의 크기는 얼마나 크지? 무한대인가? 아니면 유한한 공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중.
‘설마 빠르게 달리는 게 아니라… 공간을 자유자재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 건 아닐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줄어들어라.’
오토는 정신을 집중해서, 이곳 무의 공간의 크기가 줄어든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에에에에에?!”
어릿광대가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오토가 어릿광대의 코앞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