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아리엘.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오토는 기억을 뒤적여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되새겨 보았다.
그 결과.
‘형님답지 않게 짝사랑이나 하실 때부터 알아봤수! 차라리 그 엘프 아가씨가 백번 나았소!’
‘아, 아리엘?!’
‘이게 뭐요! 형님이 여자 하나 잘 못 만나서 우리까지 이 신세가 된 게 아니오!’
‘그, 그건 미안하게 됐….’
오토는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이 대화를 나눌 때 아리엘이란 이름이 언급되었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아리엘을 다시 보았다.
‘올해로 666살이라고 하셨으니까. 대충 시대도 맞잖아.’
그래서 오토는 아리엘에게 물어보았다.
“저어, 혹시.”
“뭐?”
“카이로스라고 아시나요?”
그 순간.
오싹!
아리엘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그 병신 새끼는 왜?”
엘프는 숲의 종족.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으로서, 성격이 매우 온화하고 상냥하기 마련.
그런데 아리엘의 언행과 말하는 방식, 표정을 보면 도저히 엘프 같지가 않았다.
“벼, 병신 새끼요?”
“그래, 병신 새끼.”
“그 정도인가요? 하하, 하하하하.”
“병신 새끼 맞지.”
아리엘이 딱 잘라 말했다.
“세상 멍청한 놈. 헛똑똑이. 호구. 병신. 등신. 남자다운 척은 다 하는데 실속 하나 없는 놈이니까.”
“…….”
“기껏 일군 제국을 자기 의동생이란 새끼한테 뺏긴 걸로 모자라 어디서 뒈졌는지….”
아리엘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부들부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 지경이었다.
“잠깐.”
“네?”
“뜬금없이 그 새끼 얘길 나한테 꺼내는 이유가 뭐야?”
아리엘이 수상쩍다는 듯 오토에게 물었다.
“너 뭐 아는 거 있니?”
“어. 그게. 그러니까.”
오토는 우물쭈물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말을 꺼내긴 했는데, 아리엘의 반응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이걸 말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카이로스 얘기를 꺼내 버린 마당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댈 수도 없는 노릇.
아리엘의 성격상 대충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면 늘어졌다.
“뭔데? 나한테 대뜸 카이로스 그 새끼 얘길 꺼내는 이유가?”
“잠깐 따로 뵐 수 있을까요?”
오토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르곤 대제랑 한 공간 안에 있는데 여기서 얘기할 수 없지.’
카이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할 만한 게 못 되었다.
특히, 아르곤 대제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장소라면 더더욱.
“조용한 데서 이야기하자는 말이니?”
“네.”
“그래.”
그렇게 오토와 아리엘은 잠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제국에서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들을 마련해 놓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는 차고 넘쳤다.
* * *
같은 시각.
카이로스 일당은 로우레딘 왕국에서 열심히 반란(?)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은 과거의 경험을 밑천 삼아 매우 빠르게 로우레딘 왕국을 장악해갈 수 있었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영주들과 왕국군을 무찌르고, 식량을 나눠 주고, 그들을 규합해서 군대를 만들고.
이건 카이로스와 영혼기사들이 전생에 밥 먹듯이 하던 일이었기에,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장군!”
“장군 오셨습니까!”
“장군이야말로 저희의 희망이십니다!”
점령지의 백성들은 카이로스를 장군이라 부르며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보냈고, 또한 따랐다.
오랜 기근과 왕실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에게 있어 카이로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같았던 것이다.
“내 약속하지.”
카이로스가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올 겨울에는 따뜻한 집에서 고소한 빵과 고기를 마음껏 먹으며 보내게 해 주겠다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카이로스 장군님! 만세!”
“만세!”
백성들은 카이로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환호를 보냈다.
“자. 다들 전쟁은 잠시 잊고 같이 즐거운 시간들이나 보내세. 뭣들 하느냐! 술과 고기를 대령하지 않고!”
“예! 폐하!”
카이로스는 백성들과 더불어 격의 없이 술과 고기를 즐기며,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껄껄껄! 자네 아주 남자답구먼! 자! 한잔 받게!”
“감사합니다! 장군!”
그런 카이로스의 모습은 결코 민심을 얻기 위해 꾸며낸 사탕발림 같은 게 아니었다.
카이로스란 인물의 성격 자체가 술자리를 좋아했을뿐더러, 소탈하고 탈권위주의적이었다.
그러니 백성들, 혹은 말단 병사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즐기는 건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맙소사! 장군님께서 우리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시다니!’
‘어찌 저런 훌륭하신 분이 우리 같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신단 말인가! 아아!’
백성들은 카이로스의 서민적(?)인 행보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를 더욱 따르게 되었다.
덕분에 카이로스가 장악한 지역의 민심은 매우 좋았음은 물론이었고, 군의 사기도 매우 높았다.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카이로스가 이끄는 군에 입대해 로우레딘 왕국군과 싸우기를 원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입대자가 너무 많아서, 그중에서 당장 전투에 투입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입대를 허락했을까.
그만큼 카이로스의 민심 사로잡는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워낙에 호탕한 쾌남인지라, 저절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으! 좋다! 역시 술은 빌어먹을 전쟁터에서 마셔야 제맛이로다! 껄껄껄!”
오늘도 그렇게 병사들과 더불어 한바탕 술판을 벌이던 카이로스는, 불현듯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오싹!
아무리 밤이라지만, 한여름에 오한이 들다니?
‘뭐지?’
카이로스는 순간 왜 자신이 떨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감기라도 든 것인가?’
그러나 카이로스의 사전에 감기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감기에 단 한 번도 걸려 본 적이 없는, 감기의 ㄱ자도 모르는 인물이 바로 카이로스였던 것이다.
‘허허. 왜 이리 몸이 떨리는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군! 팔 떨어지겠습니다!”
“헉! 미안하다! 한 잔 따라보거라!”
“예! 장군!”
카이로스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술자리에 집중했다.
오토가 아라드 제국의 황궁에서 누굴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 * *
자리를 옮긴 직후.
“이제 얘기해 보렴.”
아리엘이 어디 얘기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오토에게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오토가 대답했다.
“카이로스랑은 어떤 관계이시죠?”
“어떤 관계냐니?”
“제가 들은 게 있어서요.”
“네가 뭘 들었는데? 기껏해야 몇 살 먹지도 않은 새파랗게 어린 애가.”
“그 몇 살 먹지도 않은 새파랗게 어린놈이 뭔가를 알고 있으니까 카이로스를 언급하지 않았겠어요?”
“흐음.”
아리엘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말했다.
“무슨 관계라고 할 것까진 없어. 아무 사이 아니었으니까.”
“네…?”
“옛날에 카이로스를 사랑했어. 그 자식이 내 마음을 안 받아주고 피해 다니기만 해서 맺어지진 못했지만.”
“아.”
“멍청한 새끼! 나 같은 여잘 두고 베아트리체 그 집안 말아먹게 생긴 년한테 순정을 다 바치다니! 결국 그년한테 뒤통수 맞아서 인생 말아먹었지!”
아리엘이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는 듯 몸을 벌벌 떨었다.
‘이 누님 진짜 어마어마한데?’
분노에 치를 떠는 아리엘을 보고 있노라니 오금이 저렸다.
“하하. 하하하하.”
“그래서 카이로스에 대해서 말한 이유가 뭔데?”
“그게….”
오토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카이로스가 살아 있습니다.”
“뭐?”
아리엘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자식이… 살아 있단 말야?”
“예.”
“거짓말.”
아리엘이 오토의 말을 부정했다.
“450년이나 흘렀어. 근데 그 자식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어?”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오토가 아리엘에게 카이로스와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니? 카이로스 그 자식이 살아 있다는 게?”
아리엘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오토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살아 있는 거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그럼요.”
“카이로스… 카이로스가 살아 있다니….”
아리엘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흑흑. 흑흑흑.”
아리엘이 오열했다.
‘맙소사.’
오토는 그런 아리엘을 보고, 그녀의 순정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것인지 느꼈다.
벌써 45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저렇게 눈물지으며 카이로스를 그리워할 줄이야.
“진정하세요.”
오토가 아리엘을 위로해 주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잖아요. 옛날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다를 겁니다.”
“흑흑.”
“괜찮아요, 괜찮아. 제가 다시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ㄹ….”
“죽여 버릴 거야.”
“……!”
“진짜 죽여 버릴 거라고.”
아리엘이 으르렁거렸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카이로스를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가는데, 그 모습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
‘시, 실수한 건가?’
오토는 그 모습을 보고, 어쩌면 아리엘에게 카이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노하는 아리엘을 보니, 카이로스는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했다.
‘아니지. 걔 나 심심하면 놀려 댔잖아. 흥.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오토는 카이로스가 자신을 놀려대었던 걸 떠올리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내새끼가 약혼녀에게 잡혀 사냐는 둥, 평생 기 한번 못 펴고 살 것이라는 둥, 찍소리도 못할 거라는 둥.
카이로스는 그간 매우 충실하게 업보(?)를 쌓아 온 상황이라서, 아리엘에게 탈탈 털린다 한들 딱히 오토에게 따질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 한번 죽어 봐라. 흐흐흐.’
오토는 카이로스가 고통받은 걸 생각하고 벌써부터 즐거워했다.
“아무튼 이 사실은 혼자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오토가 아리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같은 자리에 아르곤 대제가 있다는 거, 명심하시고요.”
“알겠어.”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빌어먹을 아르곤 새끼, 지금 당장 찢어 죽이고 싶지만 일단은 참지 뭐.”
“생각 잘하셨습니다.”
“카이로스 그 자식부터 먼저 찢어 죽이는 게 우선이니까.”
“그, 그렇죠? 하하, 하하하하.”
아리엘의 살기에 짓눌린 오토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요.”
“응?”
“카이로스가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오토는 그게 궁금했다.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실 줄이나 알지, 실속 하나 없는 꼰대 아저씨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걸 몰라서 묻니?”
아리엘이 피식 코웃음 치며 오토에게 되물었다.
“x나 섹시하잖아.”
오토는 대답을 듣고 아리엘과 이 문제에 대해 두 번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한편, 오토가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무도회장에서는 여전히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춤췄다.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문화 자체가 그러했기에 이런저런 사람과 춤추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등 사교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사교활동이 이루어지는 무도회장 속에서, 아르곤 대제는 엘리제의 곁을 맴돌며 호시탐탐 접근할 기회만을 노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아르곤 대제는 엘리제가 쿤타치 가문의 가주인 콘라드와 춤추는 게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콘라드 대공 전하.”
아르곤 대제가 콘라드에게 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를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 자네 율리우스 아닌가. 여기서 보니 반갑구먼. 그래, 내 손주며느리와 춤을 추고 싶다고?”
“하하! 그저 이번 기회에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허허허.”
콘라드는 아르곤 대제의 정체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엘리제와 춤을 출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레이디.”
기회를 잡은 아르곤 대제가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오버하우저 상단의 율리우스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제가 답하길…….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