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오토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쿠란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쿠란이 곯아떨어진 밤 11시까지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고, 오토를 암컷 드래곤이라고 여기는 바람에 그저 진땀을 뺐을 뿐이었다.
“으. 으으으.”
오토는 화장실을 갔다가 뒤처리를 하고 나오지 않은 것만 같은 찝찝함에 몸서리치며 괴로워했다.
‘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그래서현실인거야아닌거야.’
마치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니, 실제로 급성 강박증에 걸린 오토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필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타이밍에 치매 증상이 도져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중에 정신 차리시면 꼭 여쭤 보고 답변 들어야지.”
오토는 답변을 듣기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쿠란과 자주,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답변을 듣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토는 치매를 앓는 쿠란에게 돌봐드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왕국 바깥으로 도는 일이 잦은 오토가 쿠란을 24시간 내내 돌봐드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시녀장 올리브가 성심성의껏 프로다운 자세로 간병을 해 드리고 있긴 했지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쿠란은 동족을 모두 잃고 누구 하나 돌봐줄 사람 없는 존재.
오토로서는 아무래도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나고.
그렇게 자신의 침실로 향하던 오토는, 마검사의 보고를 받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가이우스가 술술 불기 시작했다고요?”
“예, 전하.”
“가보죠.”
오토는 이번에 생포한 고가치표적인 가이우스를 심문하기 위해 지하에 자리한 감옥으로 향했다.
* * *
“어우야.”
가이우스는 지난 열흘 동안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얼굴이 아주 반쪽이었다.
그러면서도 몸에는 상처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고문은 주로 물고문, 잠 안 재우기와 같은 걸 주로 가한 게 분명했다.
“그간 잘 지냈냐?”
오토가 벽에 꽁꽁 묶인 가이우스 앞으로 의자를 쭉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
“여기 생활은 어때? 할 만해?”
“궁금한 걸… 물어보시오. 뭐든 대답해 주겠소.”
“으응?”
“대신 원하는 대답을 모두 얻거든… 제발 부탁이건대… 그만 끝내주시오.”
“오우. 많이 힘들었나 보네.”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이우스를 심문하는 임무를 맡았던 마검사들을 슥 돌아보았다.
얼마나 고문을 열심히, 기술적으로 했으면 불과 열흘 만에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죽여 달라고 빌겠는가?
이만하면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줘도 전혀 이견이 없을 지경!
“업무 성과들이 좋으시네요? 이번 달은 특별 보너스에 포상휴가까지 나갑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검사들은 오토의 칭찬에 한쪽 무릎을 꿇고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곤 그 새끼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환생의… 마법 덕분이오.”
“환생의 마법?”
“고대의 마법인데… 환생의 륜이라는 것을 통해 먼 훗날 후손의 몸을 빌려 환생하는 것이오. 이미 당대에 모든 안배가 끝나 있었소. 다만 그 시기는 대제국 크라레스가 멸망한 후라고 알고 있소.”
“그러니까 훗날 제국이 멸망하고 왕조가 끝날 것을 아니까, 재건을 위해 후손으로 태어나게끔 환생을 준비했다?”
“그렇소.”
“그건 좀 현명하긴 하네.”
어느 왕조든 영원할 순 없는 법.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천 년도 간다지만, 언젠가는 국운이 기울어 멸망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황가에서는 왕조의 몰락에 대비해 여러 안배를 해 두었소. 오버하우저 가문이 그 안배의 핵심이오. 제국이 멸망하더라도 혈통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던 거요.”
“먼 훗날 다시 태어날 아르곤 대제를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소.”
“아르곤 대제가 환생했으니까 계획 자체는 성공한 거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검은 십자회는 뭔데?”
“카이로스 황제의 최측근이자 책사였던 오그마는 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무사히 도망쳤다고 들었소. 그런 뒤 만든 비밀결사가 검은 십자회요.”
“그래서?”
“오그마는 카이로스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복수심이 가히 엄청났소. 크라레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이나 황가를 괴롭혔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 지금 이 순간도 대륙 어딘가에서는 황가의 혈통을 지닌 후손들을 추적해 죽이려 하고 있을 거요.”
“오그마라… 마음고생 꽤 했겠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황제 만나서 얼마나 속이 썩었겠어.”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로스의 최측근이었다면 살아생전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책사였으니까 아르곤을 경계하라고 제일 먼저 조언했겠지. 숙청하려고도 여러 번 시도했을 테고. 물론 번번이 실패했겠지만.’
안 봐도 훤했다.
딱 봐도 역적이 분명한데, 황제인 카이로스가 그리 감싸고도니 얼마나 열불이 터졌겠는가?
결국 아르곤 대제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현타가 와서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고 싶었겠지. 예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는데, 뻔히 아는 미래를 막지 못했으니까.’
오토는 오그마란 인물의 심정을 100퍼센트 이해하면서, 가이우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오버하우저 가문의 본거지는? 상단 본사는 아닐 거 아냐.”
“군사시설은?”
“비밀창고 같은 거 없어? 만약을 대비한?”
“그 새끼 향후 계획이 뭐였어?”
숱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가이우스는 묻는 말에 매우 성실히 자세하게 답변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모든 정보를 분 것이다.
그렇게 긴 심문이 끝난 후.
“좋아.”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목숨은 살려 줄게. 고문도 없을 거야. 비록 갇혀 지내기는 하겠지만, 편한 생활을 보장하지.”
“그, 그게 정말이오?”
“이렇게나 정보를 많이 줬는데, 죽이거나 고문할 수야 있나. 나는 주고받는 거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야. 니가 나를 도왔으니, 나도 너를 도와야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고맙소.”
“별말씀을.”
오토는 피식 웃고는 마검사들에게 명령했다.
“조만간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수감 시설을 옮겨 주고, 대우 잘해 주세요. 불편함 없게.”
“예, 전하.”
명령을 내린 오토가 감옥을 나섰다.
“정말로 편의를 봐줄 생각이십니까?”
뒤늦게 심문 현장에 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미유가 오토에게 다가와 물었다.
“당분간은?”
“전하께 협조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저자는 숱한 노동자들을 죽인 학살자입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아직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살려 두자는 거야.”
“예?”
“인질로 쓰거나. 여의치 않으면 율리우스에게 보내서 간첩으로 써도 되고. 정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오토가 카미유를 슬쩍 돌아보며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없애 버리면 돼.”
오토 역시 율리우스에 동조해 끔찍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던 가이우스를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 * *
침대로 돌아가 쉬려던 오토는, 마주 오는 카심을 만난 덕분에 퇴근(?)이 더 늦어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새벽 2시를 넘겨 야근이 아닌 철야(?)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어? 카심?”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뭐 하고 지내셨어요?”
순간 카심은 울컥! 솟구치는 설움에 그 자리에서 오열할 뻔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온갖 생고생이란 생고생은 다 하고 겨우 겨우 살아 돌아왔더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온 것이다.
물론 말을 안 하는데 먼저 알아주는 게 더욱 이상하긴 했지만….
“저, 전하! 크흑!”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집안에 우환이라도?”
“그, 그게 아니오라… 크흑!”
“……?”
“허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엉!”
카심은 자기도 모르게 오토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왜, 왜 이러세요?”
“흐어어어엉!”
“아니… 갑자기 왜?”
“저,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카심이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하고는 오토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광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추락했는데 하필이면 고대 유적지였고요?”
“예, 전하….”
“어마어마하네.”
어이가 없었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요?”
“어찌 어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유적지에 있던 정육면체들을 회수해 왔습니다. 흑흑.”
“아이고, 고생 많이 하셨네.”
오토는 카심을 토닥토닥 달래 주는 한편 은근히 불안해했다.
‘뒤로 넘어지면 뒤통수도 깨지고 코까지 깨질 사람이네, 이거. 이러다 나도 휘말려서 좆되는 거 아냐?’
그건 사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운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안쓰러우면서도 그 불운이 옮겨 올까 걱정되기 마련이니까.
물론 아닌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이렇게라도 살아 돌아오신 게 천만다행이에요.”
“즈언하아아… 흐어어어어엉!!!”
“아이고, 포상휴가라도 넉넉히 드려야지. 이거 원. 하하. 괜찮아요, 괜찮아.”
“흑흑흑.”
“다음에는 제가 꼭 옆에서 챙길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혹시나 그런 일이 또 있더라도 먼저 알아차리고 구조해 드릴게요.”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카심이 얼마나 소중한 인재인데요.”
그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왜?
카심은 이오타 왕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공군 1호기였으니까.
0호기가 있긴 했지만, 0호기는 치매를 앓고 있으므로 전력으로 칠 수 없었고.
“아무튼, 오늘은 늦었으니까 조만간 다시 얘기하죠. 오늘부터 한 달 동안 휴가 드릴 테니까, 쿤타치 공국으로 가서 푹 쉬다 오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흑흑흑!”
오토는 그 후로도 한동안 카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래 주느라 동이 틀 무렵까지 잠들지 못했다.
* *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오토는 쿠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한편 틈틈이 질문할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치매 증세가 심해진 것인지, 쿠란은 좀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닷새째 되던 날.
“오늘은 뭐였습니까?”
“…탐욕스러운 드래곤한테 삥 뜯기는 황제.”
오토가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카미유의 물음에 대꾸했다.
쿠란의 치매 증세는 특정할 수가 없어서, 시시때때로 아주 다양한 인격을 튀어나오곤 했다.
암컷 드래곤과 연애 중인 수컷 드래곤, 애기 드래곤, 배고픈 노인 등등등….
그럴 때마다 장단을 맞춰준답시고, 오토는 상대 역할을 연기해 주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드래곤들이 심심하면 인간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황금이며 보석이며 돈 될 만한 걸 대놓고 삥을 뜯었다나 봐.”
“예…?”
“그래서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둥지에 쌓아 놓고 감상하고 싶어서 그런 거래.”
“…….”
“드래곤들이 멸종한 것도 사실 저지른 업보 때문이 아닐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아예 몸을 푹 파묻어버렸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고가 많긴 뭘. 어르신 모시겠다고 한 건 나니까. 겸사겸사 놀아 드리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
“그럼 내일도 어르신과 시간을 보내십니까?”
“밖으로 나돌 때가 많으니까 왕국에 있을 때라도 어르신 잘 모셔….”
바로 그때.
[알림: <숙제검사> 퀘스트의 1회차 검사 시간이 3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1/30)]
지난번에는 반투명하게 희미하고 어느 부분은 지워져 있던 시스템창이 이번에는 아주 선명하고 또렷했다.
“히, 히익?!”
오토는 그제야 잊고 있던 엘리제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차.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지.’
엘리제.
무시무시한 약혼녀가 방문할 시간이 불과 3일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