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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아무칸이 돌아오고, 카이로스가 전장에 나서자 전쟁의 판도는 180도 뒤바뀌었다.

연전연승을 거두던 케레이트 부족의 기병대는, 콩기라트 부족의 기병대를 만날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지며 전멸하기 일쑤.

때문에, 케레이트 부족은 불과 3일 만에 무려 14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며 점령했던 지역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비결은 카이로스의 대활약 덕분이었다.

카이로스는 전투에 나설 때마다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들을 지휘하며, 적들을 무차별적으로 부숴버렸다.

카이로스 개인의 전투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강력했지만, 더욱 무서운 건 다름 아닌 <지휘 능력>이었다.

14번째 전투가 끝난 직후.

“형님.”

아무칸이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카이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뭔데 그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냐? 벌컥벌컥!”

카이로스가 죽은 케레이트 부족의 시체를 깔고 앉은 채 마유주를 들이켜며 대꾸했다.

“저는 이곳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탔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이 끝난 이후에는 거의 20년 동안 말을 타고 전투를 치러오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우실 수 있는 겁니까?”

아무칸은 정말로 궁금했다.

대륙인인 카이로스가 초원의 전사들보다 기병 전술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도를 지니고 있고, 기병대를 훨씬 더 잘 운용한다는 건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말을 타고 살아가는 민족의 입장에서,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끌끌끌.”

카이로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놈은 짬밥이라는 것도 모르느냐?”

“예…?”

“보자… 짐이 말이다. 처음으로 검을 잡았던 게 아마… 열세 살 무렵이었느니라.”

“아, 예.”

아무칸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들의 경우 열 살 무렵이면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 하나쯤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열세 살에 집구석을 나와서… 코딱지만 한 용병단의 말단 잡일꾼으로 일했지. 열다섯 무렵부터 실전을 뛰고 쉰다섯에 뒈졌으니까…. 한 40년 정도 전쟁터에서 굴렀구먼. 끌끌끌. 그런 짐이 못하는 게 어디 있겠느냐? 한평생 말을 타고 전쟁터에서 굴러먹었거늘.”

“…….”

“서른둘쯤이었나? 그때도 네놈 같은 유목민 전사들과 싸웠던 적이 있었지. 그때 그 족장 놈 이름이… 바토르라고 했던가? 아주 강한 놈이었지. 물론 짐의 강력함에 결국 무릎을 꿇었지만 말이다. 크핫핫핫!”

“저어… 형님?”

“왜 그러느냐?”

“거짓말은 좀 그렇습니다.”

“뭣이?”

“바토르는 흔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 초원에서도 그 이름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450년 전 초원을 누비셨던 분뿐입니다. 저희 콩기라트 부족의 시조가 되시는 분이지요.”

아무칸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지만 형님의 나이라고 해봤자… 솔직히 저보다 어리실 거 아닙니까? 아무리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지만, 이건 아닙니다. 그런 거짓말은….”

“야.”

카이로스가 아무칸의 말을 끊고, 그를 잡아끌었다.

“너 잠깐 이리 좀 와 봐.”

“예…?”

“따라오라고.”

아무칸은 아무 생각 없이 카이로스를 따라 <게르>라 불리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입에 물어라.”

카이로스가 아무칸에게 웬 천 조각을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처맞을 때 비명을 지르면 부하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냐?”

“예…?”

“감히 네놈이 짐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

“형님, 그게 아니라… 악!”

아무칸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네놈 체면은 세워주는 것이지만, 그냥은 못 넘어가겠노라.”

뒤이어 카이로스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아무칸을 향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 * *

한편, 케레이트 부족의 기병대와 함께 마그리트 왕국을 칠 준비를 하던 헬무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딸 엘리스가 자신의 부하들이 아닌 제삼자에 의해 납치를 당했고, 그 덕분에 마그리트 왕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소식은 헬무트에게 최악의 사태나 다름없었다.

본래 헬무트의 계획은 딸의 구출 작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도로 진격해 이 쿠데타를 최대한 일찍 끝내는 것.

그러나 누군가 선수를 친 덕분에 마그리트 왕국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습적인 반란은 물 건너 가버린 뒤였다.

이 계획의 핵심은 구출 작전과 반란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각하, 국왕이 보낸 전령이 항복을 요구해오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각하뿐 아니라 우리 영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켜버리겠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궁지에 몰린 헬무트가 이를 부득 갈았다.

사면초가.

항복하면, 죽는다.

그렇다고 마그리트 왕국군과 싸워도 죽는다.

아무리 케레이트 부족과 손을 잡았다고 한들, 마그리트 왕국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반란 자체가 기습이 아니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싸움이라서, 계획이 틀어진 이상 승산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최악의 사태가 터진 것이다.

“설마… 국왕의 계략인가?”

헬무트는 이번 사건이 마그리트 국왕의 공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엘리스를 납치하는 자작극을 펼쳐서 헬무트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걸 명분 삼아 발데마르 가문을 쓸어버리려는 무서운 계획….

“각하, 어떻게 합니까? 케레이트 부족의 기병대가 이 사실을 알면….”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한다. 국왕의 군대가 성문 앞까지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헬무트와 케레이트 부족과의 동맹이 깨질 터.

그러면 헬무트는 케레이트 부족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마그리트 부족과 왕국군을 상대해야 할 테고,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 후안무치한 놈 같으니… 우리 가문이 네놈의 가문에게 몇 대에 걸쳐 개처럼 충성했거늘…. 이런 더러운 자작극으로 내 딸을 욕보이고… 우리 가문을….”

그때였다.

“각하!”

전령이 황급히 들이닥쳐 헬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는 자가 각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모르는 이름이다. 누구 아는 이가 있는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그자가 왜 나를 보고자 한다더냐?”

“예, 각하. 그가 말하길… 엘리스 아가씨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당장 들라 하라!”

헬무트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오토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딸을 데리고 있다는 말에 일단 오토를 만나보기로 했다.

* * *

“뭐라?”

헬무트는 어이가 없었다.

“네놈이 내 딸을 납치한 장본인이라는 말이냐?”

“그래.”

“감히!”

헬무트가 버럭 소리치며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릉!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오토를 향해 겨누었다.

서슬이 시퍼렇게 선 검을….

“감히 내 딸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뻔뻔하게 이 헬무트를 찾아왔다? 네놈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러고도 사지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가?”

“당연히 멀쩡하게 돌아가지.”

오토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날 건드리면, 네 딸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따위 협박이 이 헬무트에게 통할 것 같은가? 나는 바보가 아니다. 네놈은 분명 국왕이 보낸….”

그 순간.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오토가 폭소를 터뜨렸다.

“…….”

“…….”

“…….”

모두가 오토의 돌발행동에 당황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큭큭큭… 마그리트 국왕이 보냈대. 큭큭… 마그리트 국왕이… 자작극을… 큭…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큭큭큭… 탈… 큭큭… 이라니까… 큭큭….”

“지금 날 비웃은 것인가?”

“그, 그건 아니고… 큭… 너무 웃겨서… 큭큭큭….”

“……?”

“일리 있는 추리이긴 한데… 큭큭… 마그리트 국왕이 그렇게 똑똑한 놈이었으면…. 큭큭… 애초에 충신 중의 충신을… 개만도 못하게 대접하지 않았을걸? 큭큭큭!”

헬무트는 오토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 이어진 말을 듣고 냉정을 되찾았다.

‘트,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배은망덕한 놈이 그런 고차원적인 공작을 벌였을 리 없으니.’

지금의 마그리트 국왕은 매우 탐욕스럽고 의심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교활하기까지 한 인간은 아니었다.

교활한 인간이 되려거든 일단 머리가 어느 정도 돌아가야 하는데, 그 정도로 수완이 뛰어난 인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놈은 왜 내 딸을 납치한 것인가?”

“당신의 칼끝을 다른 방향으로 겨누게 하려고.”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은 줄을 잘못 잡았어. 손을 잡으려거든 케레이트 부족이 아니라 콩기라트 부족과 손을 잡았어야지.”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내가 콩기라트 부족과 동맹 관계니까. 당신이 케레이트 부족과 손잡은 것 때문에 교역로를 뺏겼고, 그 과정에서 우리와 일하는 상단 행렬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어. 덕분에 우리가 경제적 손실은… 어우야.”

오토가 혀를 내둘렀다.

“피해가 하도 막심하니까 계산이 안 되네, 계산이.”

“도대체 우리가 누구냐?”

“이오타 왕국.”

“이오타 왕국…?”

헬무트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주변에 물었다.

“혹시 이오타를 아는 자가 있는가?”

그러나 아무도 이오타를 안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이오타 왕국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오타 왕국이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 곳인가?”

그 결과.

주르륵!

오토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 *

오토는 헬무트에게 이오타 왕국에 대해서 한참이나 설명한 끝에 겨우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워낙에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라 미처 살피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대가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란 말인가?”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오토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그렇군. 알겠소.”

헬무트는 일단 왕족이라고 하니 오토에게 반말이 아닌 경어를 써주었다.

“나와 케레이트 부족의 동맹이 그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말이시오?”

“그래.”

“그래서 내 딸을 납치한 것이고?”

“당신이 케레이트 부족과 손잡고 마그리트 왕국과 콩기라트 부족을 박살 내면, 나는 교역로를 영영 되찾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복수도 물 건너가게 될 테고.”

“복수?”

“케레이트 부족 전사들에게 죽은 우리 측 상인들, 일꾼들, 그리고 용병들 목숨값은 받아내야 할 거 아냐.”

“그건 협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난 목숨값은 돈으로 안 받아. 피에는 피. 목숨으로 받지.”

“어찌할 생각이시오?”

“케레이트 부족을 박살 내려고. 학살에 관여한 놈들은, 모조리 죽일 거야. 도망친다면 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거고.”

“으음.”

“본보기가 필요해. 이오타 왕국을, 에고 상단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헬무트는 오토의 말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 자… 결코 겉만 번지르르한 기생오라비가 아니다. 겉보기엔 그래 보여도 그 실체는… 아주 무서운 자다. 모든 걸 손바닥 위에 놓고 꿰뚫어 보며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헬무트는 대화를 통해 오토가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내가 케레이트 부족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콩기라트 부족과 동맹을 맺기를 원하는 것이오?”

“이제 말이 좀 통하네.”

“그럼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이오.”

“만약 당신이 내 말을 따른다면….”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모든 걸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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