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누구냐 물었다.”
바실리는 오토를 향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 글쎄. 누굴까.
오토가 싱글벙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바실리를 자극했다.
“네놈이었나.”
바실리는 그간 자신을 괴롭혀 오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원인이 오토라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1군단 사령부의 통신장치에서 제3의 인물이 튀어나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네놈은.”
- 오토 드 스쿠데리아.
“오토 드 스쿠데리아……?”
바실리는 당연히 오토를 알지 못했다.
북부제국의 정보력은 아라드 제국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최신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 몇 년은 넘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대장벽이라는 지리적인 특성 탓에 대륙에 첩보원을 보내기가 힘들었다.
또한, 기술의 발전을 이룬 뒤로는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륙을 구시대의 미개인 취급을 했다.
때문에, 첩보와 정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등한시했던 것이다.
짝짝짝!
- 역시 대단하셔?
오토가 씩 웃으며 바실리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 하긴. 그러시겠지. 위대하신 북부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미개한 대륙인 따위를 알 리가 없지.
그 순간.
‘이런.’
바실리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자신이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북부제국의 정보력이 형편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었던 것이다.
물론 애당초 정보력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 열심히 ㅈ빠지게 한번 쳐들어와 보라고.
“……뭐라?”
- 내가 딱 하나만 약속할게. 널 북부제국 로마노프의 마지막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오토가 바실리에게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히.”
바실리가 벌떡 일어나 오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
그 말은, 황가의 씨를 말려 주겠단 소리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북부제국을 멸망시켜 버리겠단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네놈이 지금 감히 누구를…….”
- 이만 끊는다.
오토의 형상이 희미해져 갔다.
- 앞으로 자주자주 통신하게 될 텐데,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고. 또 걸 테니까.
“감히! 짐과의 통신을 먼저 끊…….”
- 질척대는 남자 매력 없어.
“이 개 같은……!”
- 그럼, 수고.
오토는 정말로 바실리와의 통신을 일방적으로 먼저 끊어 버렸다.
바실리는 자존심상 차마 오토에게 통신을 걸지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분노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오토 드 스쿠데리아…….”
바실리는 오토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며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여기서 길길이 날뛰었다간 황제로서의 위엄을 잃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실리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분노하는 게 오토가 원하는 바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모욕까지 당한 마당에 더는 오토에게 놀아나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즉시…….”
바실리가 명령했다.
“키이우 왕국 전선에 대해 파악하라. 또한,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누구인지 알아 와라. 첩보원들을 풀어 알아보란 말이다.”
“예, 폐하.”
북부제국의 기사들이 즉시 오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움직였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실리가 오토의 그 얄밉도록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기필코 짐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다…… 반드시.”
바실리는 감히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사람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 *
“아이고, 무서워라.”
오토는 통신을 끊은 뒤 바실리가 무섭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괜찮은 겁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뭐가?”
“괜히 상대를 자극했다가…….”
“그러라고 그런 거야.”
오토가 소파에 몸을 뉘며 대답했다.
“그래야 병력을 더 갈아 넣을 테니까.”
“아.”
오토는 괜히 바실리를 도발한 게 아니었다.
오토는 목표는 단순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었다.
오토는 이번 전쟁을 통해 북부제국이 폭삭 망하기를 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대륙 침공을 꿈꾸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주저앉길 원했다.
그런데 북부제국이 이대로 전쟁을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병력을 철수해 버리면, 오토 입장에서는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대비해야 할뿐더러 그땐 지금처럼 잘 대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토는 바실리가 최대한 냉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일부러 도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발이 먹히겠습니까?”
“당연히 먹히지.”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화는 나는데, 그걸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해서 속으로 부들거리고 있을걸?”
오토는 바실리의 심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놈 성격상 입에 거품 물고 날뛰는 일은 없을 거야. 황제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서 겉으로나마 냉정한 척할 거라고. 근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
“그럼 뭡니까?”
“그 잘난 자존심과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 대놓고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잡아 죽이려 들걸? 큭큭.”
“원한을 사는 데 재주가 있으신 것 같아 보입니다만.”
“살 땐 사야지.”
“만약 전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미유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물론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야 모욕당하든 말든 알 게 뭐야. 실익만 챙기면 그만이지. 그깟 욕쯤 먹으면 어때. 날뛴다고 누가 입에 밥 떠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역시.”
카미유가 피식 웃었다.
‘역시 제 주군이십니다.’
카미유는 그런 오토의 성향이 좋았다.
아무리 군주라지만 개인의 분노를 해소하고자 국력을 낭비하거나 애꿎은 목숨을 희생시키는 이들보다 오토처럼 뻔뻔하고 능글맞은 게 훨씬 나았다.
위엄과 체면을 중시하는 여타의 다른 군주들과 비교했을 때, 오토가 훨씬 더 성군처럼 보였던 것이다.
“일단 전장부터 정리하자. 재정비해야지.”
“예, 전하.”
베즈도리자 평야에서 이겼고, 바흐무트 전투에서 이겼으며, 후퇴하던 북부제국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총 세 번의 대승을 거둔 상황.
이제 이오타 왕국군까지 합류했으니, 키이우 왕국은 사실상 방어에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북부제국이 이대로 키이우 왕국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 후속 병력을 보내 키이우 왕국을 점령하려 시도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대규모 공세가 펼쳐질 가능성은 없었기에, 오토는 슬슬 키이우 왕국을 떠나 북부장벽으로 가고자 했다.
이제는 야만부족, 그리고 잘츠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아라드 제국군과 함께 북부제국의 본대와 싸울 때가 다가온 것이다.
* * *
오토는 카미유와 함께 와이번을 타고 북부장벽으로 향했다.
공간도약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언제 어느 때 필요할지 몰라서 아껴둔 거였다.
북부장벽에서는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야만부족들이 북부제국군에게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그들을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었고, 곧 첫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런 만큼 장벽 안쪽의 분위기는 그 여느 때보다 부산스러웠고, 또한 삼엄하기만 했다.
“왔나.”
엘리제는 오토를 보자마자 슬며시 다가와 은근슬쩍 곁에 섰다.
보는 눈들이 있어 차마 달라붙어 있지는 못했지만…….
“이따 단둘이 봐.”
“아, 알겠다.”
엘리제가 오토의 속삭임에 얼굴을 붉혔다.
이미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기에,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단둘이 있을 때면 거리낌 없이, 마음껏 사랑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언제나 서로를 갈망하고 있기도 했고.
“험험.”
지안카를로는 그런 오토와 엘리제를 보고는 뿌듯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헛기침을 해 대며 눈치를 주었다.
“대승을 거두었다 들었다.”
지안카를로가 오토에게 말을 건넸다.
“북부제국군을 세 번이나 크게 무찌르고, 대규모 병력을 궤멸시켰다지.”
“예, 할아버님.”
“훌륭하구나.”
지안카를로는 진심으로 오토에게 감탄했다.
그 무시무시한 군사력을 가진 북부제국군을 상대로 압승, 그것도 대승을 세 번이나 거둘 줄이야.
이쯤 되면 지안카를로 역시 오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어려울 겁니다.”
오토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의 전장은 키이우 왕국처럼 유리하지 못합니다.”
“음.”
“피해가 클 겁니다.”
오토의 말은 사실이었다.
키이우 왕국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지형적인 이점이 컸다.
베즈도리자 평야와 수도 바흐무트를 무대로 싸웠기에, 북부제국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게다가 대지의 올가미가 있었고.
하지만 장벽 너머 야만부족의 영토에서는 그런 유리함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게이볼그를 사용한다 한들 트리톤들과 아예 부딪치지 않을 방법이 없었기에, 연합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을 걸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을 건 각오해야겠지. 피를 흘리지 않고 뭔가를 지켜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최대한 줄이고 이기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고요.”
“그럼 되었다.”
지안카를로가 믿음직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오토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녀석의 능력을 믿는다.”
“하하하…….”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으니 하루 이틀쯤은 푹 쉬도록 해라. 총사령관이 피곤해서야 되겠느냐. 항상 피로를 달고 사는 직책이긴 하다마는.”
“감사합니다.”
오토는 지안카를로의 배려로 하루 이틀 정도는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밤.
오토는 엘리제와 사랑을 나눈 뒤, 그녀를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엘리제와 사랑을 나눈 뒤에 꼭 끌어안고 잠든다는 건 정말이지 달콤하고 황홀한 일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만 뺀다면 말이다.
깊은 새벽.
“일어나라, 어서.”
“……음?”
오토는 엘리제의 부름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으응……?”
“괜찮은가?”
오토는 엘리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악몽이라도 꾼 건가?”
“아니?”
오토는 엘리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곤히 잠들어 있었을 뿐인데 엘리제가 흔들어 깨우며 악몽을 꾸였냐고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다.”
엘리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심한 악몽을 꾼 게 분명하다.”
“응……?”
“봐라.”
엘리제가 축축하다 못해 흠뻑 젖은 이부자리를 가리켰다.
“어……?”
오토는 이부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칼도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잠옷 역시 온통 땀에 찌들어 있어서, 당장 갈아입지 않으면 곤란할 정도였다.
‘식은땀?’
오토는 자신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몸부림이 너무 심했다.”
“몸부림까지 쳤어?”
“비명까지 질렀다.”
“……!”
“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건가.”
“난 기억 안 나는데…….”
엘리제가 이렇게까지 놀랄 정도면, 확실히 몸부림이 심했던 모양.
게다가 땀을 비 오듯 흘린 걸 보면 보통 악몽을 꾼 게 아닌 듯했다.
정작 오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체 무슨 악몽을 얼마나 요란하게 꾼 거야?’
오토는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헛수고에 불과했다.
머릿속에 무슨 먹물이라도 든 것처럼 깜깜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옷 갈아입고 다시 자자.”
“괜찮겠나?”
“옆에 자기가 있는데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헤헤헤.”
오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옷을 갈아입고, 시종들로 하여금 이부자리를 새것으로 교체하게끔 부탁한 뒤 다시 엘리제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으. 찌뿌둥해.”
오토가 개운하지 않다는 듯 투정을 부렸다.
“또 악몽을 꾸신 겁니까?”
카미유가 물었다.
“응, 어젯밤에도 악몽을 또…… 응?”
오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카미유에게 물었다.
“또라니? 내가 악몽 꾼 적 있어?”
“요즘 매일 악몽에 몸부림치시잖습니까.”
“내가?”
“설마 모르셨습니까?”
카미유가 심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