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에르제베트 왕국은 대륙 서부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대국으로서, 엄청난 경제력을 지닌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제베트 왕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영토가 대륙 서부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곳에 자리해 있어서, 무역으로 보는 이익이 가히 엄청났다.
덕분에 에르제베트 왕국은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이름이 높았다.
“에르제베트 왕국 입장에선 그럴 수 있죠.”
오토는 에고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이미 예상했으니까.
“신경 쓰이겠죠. 가뜩이나 신경 쓸 곳도 많은데, 우리까지 치고 올라오니까.”
에르제베트 왕국은 부국(富國)이었지만,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았다.
현재 세계 최강대국인 아라드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다가, 주변에 군사력이 강한 나라와 세력이 많았다.
때문에, 강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군사력을 집중시켰다간 다른 세력들에 의해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서, 소규모 국지전을 제외한 대규모 전면전을 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에르제베트 왕국은 주변국들을 압박할 때 돈을 주로 이용했다.
물류의 중심지라는 이점을 이용해 무역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주변국들을 말려 죽이는 데 능했던 것이다.
“예상된 수순이니까, 너무 걱정 마시죠.”
“하오나 전하.”
에고의 표정이 심각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에서 본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모든 물건들에 대한 관세를 올린다 합니다요.”
“그렇겠죠.”
“정말 걱정이 안 되십니까요?”
“뭐.”
오토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유통 경로를 뚫으면 되죠.”
“예에?”
“저도 에르제베트 왕국은 주의 깊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요.”
에고는 오토에게 뭔가 생각이 있음을 직감하고, 수긍했다.
에고의 경험상 오토는 늘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토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다 이거지.”
오토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입을 씰룩렸다.
“감히 내 돈벌이에 훼방을 놔?”
그 순간.
오싹!
에고는 오토의 눈에 비친 광기를 보고 그만 섬뜩해지고 말았다.
오토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피부가 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하긴. 전하께선 돈에 민감하시지.’
에고는 돈에 대한 오토의 집착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국가는 돈으로 굴러가는 집단인 것이다!
그런데 그 돈줄을 틀어막고 괴롭힌다?
오토의 입장에서 분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말입니다요.”
에고가 덧붙였다.
“에르제베트 왕국 때문에 옵시듐 수입에도 큰 차질이 빚어졌습니다요.”
옵시듐은 우주의 암흑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광물로서, 치매 치료제인 다이애닌의 주된 원료였다.
현재 이오타 왕국은 다이애닌의 대량 생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원료를 수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옵시듐의 수입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였다.
당장 쿠란의 치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 옵시듐을 수입할 수 없다는 건 이오타 왕국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
“흐으.”
오토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우리 암사자께서 내 돈벌이를 방해하시겠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오케이. 명분은 생겼고. 두고 보자.”
오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00배.
아니, 1,000배로 되갚아주고야 의지의 표현 말이다.
* * *
오토의 예상대로, 에르제베트 왕국은 이오타 왕국의 존재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지정학적인 이점을 활용해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주변에 적들이 너무 많았다.
말 그대로 사방이 적.
그러다 보니 주변 정세가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에르제베트 왕국의 입장에서, 신흥강국인 이오타 왕국의 급부상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컸다.
로우레딘·발틴·슬레인·체로키 4개국으로 찢어져 있을 때는 그다지 큰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오타 왕국이 불고 반년 사이에 그 4개국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면서, 에르제베트 왕국은 큰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오타 왕국이 성장해 강대국으로 떠오른다면, 에르제베트 왕국에게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적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왕인 바토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토리 여왕.
이른바 <철혈의 암사자>라 불리는 그녀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역대 국왕들 가운데서도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왕권은 무소불위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했고,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났으며, 외교에도 매우 능했다.
게다가 개인의 무력 또한 어마어마하게 강하다고 알려져 있기까지 했다.
일국의 왕으로서는 무엇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는, 매우 뛰어난 군주였던 것이다.
“경들은 들으라.”
“예, 전하.”
바토리의 위엄 어린 한 마디에 대소신료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현 시간부로 이오타 왕국에 가할 수 있는 모든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도록 하라.”
“예, 전하.”
바토리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물론 에르제베트 왕국의 군사력이라면, 지금의 이오타 왕국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았다.
그러나 사방이 적인 에르제베트 왕국 입장에서, 함부로 전쟁을 일으켰다간 빈집이 털릴 수도 있었다.
이오타 왕국 하나 잡으려다가 아라드 제국, 혹은 그 외 다른 세력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토리는 이오타 왕국을 경제적으로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이오타 왕국과의 국경지대의 방어를 튼튼히 해서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 놓고, 무역제재를 가해서 가난한 나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오타 왕국의 입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올 테고, 바토리는 은근슬쩍 제재를 풀어주는 척하면서 이런저런 불평등한 조약을 내걸 생각이었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이야 매우 뻔했다.
경제적으로 목줄이 잡힌 이오타 왕국은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엔 강대국은커녕 덩치만 큰 약골이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즉, 바토리는 이오타 왕국을 군사력이 아닌 돈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바토리는 어전회의를 마친 후 생각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네놈 같은 애송이가 감히 본국을 위협할 수 있을 줄 아느냐? 네놈은 아직 멀었다. 호호호.’
바토리는 오토가 가소로웠다.
카슈미르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주변 4개국을 흡수해 버린 것까지는 인정했다.
그 정도만 해도 젊은 군주들 중에서는 가히 발군이었고,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왕좌를 지키며 강대국을 경영해온 바토리의 시각에서, 오토는 한낱 애송이에 불과했다.
국가의 덩치만 불릴 줄 알았지, 그 이상을 내다볼 줄 아는 현명한 군주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만간 네놈이 과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날이 올 것이다. 호호호. 그때 많이 귀여워해 주마.’
바토리는 감히 자신을 위협한 오토를 혼쭐내주겠다고 생각하며, 정보국으로 향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의 정보국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정보력을 보유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대단히 뛰어난 첩보 역량을 지닌 기관이었다.
오죽했으면 철혈의 암사자 바토리의 진정한 무기는 군사력이나 돈이 아닌 정보력이란 이야기까지 있었을까.
“모두 들어라.”
바토리는 정보국장을 포함한 정보국 간부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이오타 왕국 내 불만을 가진 인물들과 접촉해, 그들을 포섭하라.”
“예, 전하.”
“상황은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며, 특이사항이 있다면 언제 어느 때고 과인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바토리는 경제제재뿐 아니라 정보국을 이용해 이오타 왕국을 내부에서 흔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재 이오타 왕국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이오타 왕국은 단기간에 너무나도 큰 영토 확장을 했기에, 내부가 어수선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현재 국왕인 오토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 수두룩할 수밖에 없었다.
바토리는 그 점을 노리기로 했다.
오토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지원해서 이오타 왕국을 어지럽히려는 것이다.
그건 매우 고난이도의 공작이었지만, 바토리는 자신 있었다.
바토리는 정보국을 이용해 이러한 공작들을 수도 없이 펼쳐 보았고,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괜히 에르제베트 왕국의 주변 세력들이 잠잠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 * *
이오타 왕국에 대한 에르제베트 왕국의 무역 제재가 시작될 즈음, 대륙은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선선했던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계절은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세계 각국의 마정석 소비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정석은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자원이자 에너지자원으로서, 겨울에는 생활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질 낮은 마정석 몇 덩이만 있어도 겨울을 아주 따뜻하게 보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대국일수록 마정석 이용량은 엄청나게 높았다.
나라의 경제력이 높을수록 마정석을 싸게 공급할 수 있었기에, 굳이 힘들여 벌목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에르제베트 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 마정석을 대량으로 수입하고자 했다.
그런 에르제베트 왕국의 마정석의 주된 수입처는 다름 아닌 칼리프 왕국이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아주 오랜 시간 칼리프 왕국과 마정석을 거래하며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에르제베트 왕국은 올해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칼리프 왕국으로부터 마정석을 수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뭐라?”
바토리는 어전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칼리프 왕국이 마정석을 수출할 수 없다고 했느냐?”
“그, 그러하옵니다.”
신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난방용 마정석은 겨울 필수품이라, 매우 중요한 품목이었다.
만약 공급에 차질이라도 빚어졌다간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얼어 죽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대참사가 펼쳐질 수도 있었다.
심지어 강대국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일인가.”
바토리가 분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갑자기 칼리프 왕국에서 마정석을 수출할 수 없다는 것이냐? 이유가 있을 텐데?”
“그, 그것이.”
“어서 말하지 못할까!”
바토리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움찔!
그러자 대소신료들이 벌벌 떨었다.
바토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나의 폭풍이 워낙 거세던 탓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하가 벌벌 떨면서 어렵사이 말문을 열었다.
“칼리프 왕국에서 말하기를… 이오타 왕국에 대한 무역제재를 풀지 않으면… 올 겨울에는 마정석을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