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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굳이 오토까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 다섯 명은 마그리트 왕국 근위기사단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해버렸다.

사망자는 없었다.

실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나다 보니, 심해도 중상을 입히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크윽.”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쓰러진 채 신음하는 마그리트 왕국의 근위기사단.

“이 무능한 놈들! 막아! 막으란 말이다! 왜 자빠져 있느냐!”

국왕은 전투불능이 되어 쓰러져 있는 근위기사단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꽥꽥거렸다.

“살찐 거위 같네.”

오토는 국왕의 행태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요.”

엘리스도 오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년은! 헬무트의 딸 아니냐! 네 이년! 내 너를 그리 아껴주었거늘! 이 매춘부 같은 것! 저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과 붙어먹고 과인을 능멸한단 말이냐!”

국왕이 엘리스를 알아보고 악에 받쳐 악담을 퍼부어대었다.

“네놈 애비도 반란을 일으키더니! 부녀가 아주 쌍으로 역적이로구나! 내 반드시 네년 부녀를… 악!”

국왕이 오토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시끄러, 새꺄.”

“끄윽….”

“거 x나게 시끄럽네.”

오토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험악하게 말하고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부상당한 근위기사단들은 무장해제 시키고, 수갑을 채운 다음에 잘 치료해주세요.”

“예! 전하!”

“그리고 쟤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속옷만 입혀서 발가벗긴 다음에 목에 목줄을 채워서 끌고 가는 걸로 하죠.”

“개처럼 말입니까?”

“개한테 실례에요.”

“예…?”

“수퇘지처럼이라고 해 두죠.”

“아, 예….”

“실시.”

“실시!”

한편, 마그리트 왕국 근위기사단장은 오토의 의도를 읽고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

다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로 자비를 베풀어줄 줄이야….

“자, 이제 왕을 잡았으니까… 판을 마음껏 주물러 보죠.”

“어떻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하겠어요. 잘 주물러야지. 마침….”

오토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굴욕적인 자세로 포박당하고 있는 살찐 거위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쟤가 판을 너무 잘 깔아줬거든요.”

“네? 판을 잘 깔다니요?”

“이 멍청한 놈이 어떻게든 권력을 안 놓겠답시고 왕세자를 포함한 왕족들을 자기 손으로 싹 체포한 다음에 가둬버렸거든요.”

“설마….”

엘리스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수재인 만큼,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국왕의 행동에 숨겨진 정치적인 노림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아!”

엘리스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래서 판을 잘 깔아뒀다고 말씀하신 거네요? 회군 중인 왕국군이 사로잡힌 국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할 수 없으니까?”

“이제 좀 말이 통하네요?”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네요.”

엘리스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국왕이 저지른 뻘짓거리로 인해 마그리트 왕국 전체가 오토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가 보죠.”

오토가 국왕과 근위기사단이 빠져나온 비밀통로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왔던 길을 이용하면 왕궁까지 들어가는데 한참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냥 비밀통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 * *

마그리트 왕국군은 수도를 방어하라는 국왕의 다급한 명령을 받고 황급히 회군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수도의 성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성벽 위에는 정체불명의 군대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총사령관은 수도가 이미 점령당한 걸 확인하고 탄식했다.

기껏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하고 달려왔더니, 이미 수도가 점령당하자 그만 현타가 온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총사령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하들에게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어찌 되셨는가? 혹시 무사히 탈출하셨단 소식이라도 있는가?”

“아직 파악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젠장.”

그때.

“총사령관 각하! 큰일 났습니다!”

부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총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구, 국왕 전하께서… 국왕 전하께서….”

“어서 보고하라!”

“그, 그것이….”

“대체 왜 우물쭈물 말을 못하는가! 귀관은 보고 하나도 똑바로 못하나!”

“직접… 보시는 것이….”

“……?”

“차마 말로 보고를 드리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총사령관님께서 직접 보시고 판단하셔야 할 사안인 것 같습니다… 예….”

“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총사령관은 부관에게 살벌한 눈빛을 날려준 후 최전방으로 나아갔다.

‘음?’

총사령관은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웅성웅성!

“저, 저런!”

“맙소사.”

“아….”

“으윽! 내, 내 눈…!”

최전방에 서 있는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무언가에 크게 동요해서 너도나도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들 조용! 뭣들 하는 짓인가! 상황이 엄중하다! 군기가 이리 빠져서야 되겠는가!”

총사령관이 버럭 호통을 내지르자 주변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의 표정과 흔들리는 동공은 단순히 불호령을 내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총사령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황을 파악하기 쌍안경을 들어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3초 뒤.

툭!

총사령관이 들고 있던 쌍안경이 땅에 떨어졌다.

총사령관이 본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성벽 위.

“꿀… 꾸울…!!!”

벌거벗은 국왕이 목줄이 묶인 채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수퇘지처럼 말이다.

* * *

국왕의 참담한 모습을 본 사령관은, 즉시 기사단을 이끌고 성벽을 향해 내달렸다.

생각 같은 걸 할 겨를은 없었다.

이건 역사서에 쓰이고도 남을 만한 대사건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한 적은 역사적으로도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듯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굴욕을 당한 케이스는 없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과 마그리트 왕국의 기사단은 겁도 없이 성벽 가까이 접근했다.

화살이 날아올 수 있었음에도 몸을 사리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다 못해 참혹해서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왕을 붙잡고 있는 적들의 우두머리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나는 마그리트 왕국군의 총사령관이다! 그대는 누구인데 우리 국왕 전하를 욕보이고 있는 것인가! 당장 그 폭거를 멈추길 바란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 목줄을 붙들고 있던 오토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더 가까이 와! 잘 안 들려!”

“알겠다!”

그러자 총사령관이 몸을 사리지 않고 성벽 바로 밑, 그러니까 오토와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만약 성벽 위에서 화살이라도 날아든다면 죽을 수도 있었음에도….

“그대는 누구인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지금 들었잖아.”

“……?”

“이오타 왕국의 왕이다.”

“이오타 왕국…?”

“그냥 알아들어. 또 물어보면 재미없을 줄 알아.”

오토가 인상을 팍! 쓰면서 총사령관에게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알겠소.”

총사령관은 괜히 오토를 자극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일단은 그러려니 했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이런 끔찍한 폭거를 저지르는 것이오? 원하는 게 있거든 왕족답게 품위와 체통을 지켜주시길 바라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런 끔찍한 인격살인까지 저질러야 되겠소?”

“품위와 체통 좋아하네. X벌.”

오토가 삼류 건달처럼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대꾸했다.

“품위와 체통 좋아해서 발데마르 가문 같은 충신 중의 충신을 가족들까지 볼모로 잡아가면서 노예처럼 감시하고 착취하셨나?”

“그, 그건….”

“하여간 이 새끼들은 내로남불이 아주 숨 쉬듯이 자연스럽다니까?”

“내로… 남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몰라?”

“꽤 적절한… 비유 같긴 하구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소이다.”

“알아들었으면, 지금부터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오토가 호주머니에서 커다란 포크를 꺼내 국왕의 엉덩이를 푹! 찔렀다.

“뀌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그러자 국왕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고통스럽다는 듯 온몸을 비틀어대었다.

“얘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을 거야. 지금은 포크지만 나중에는 뭐가 될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처신 잘하고.”

“아, 아니!”

총사령관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제발 멈춰 주시오! 내 이렇게 부탁하겠소이다! 마그리트 왕국의 국왕 전하시오! 아무리 포로라 할지언정 제발 한 나라의 왕다운 대우를 해주셨으면 하오!”

“싫다니까?”

“그대는 정녕 선이라는 게 없는 거요?”

“아까 말했지. 그건 니들이 할 말이 아니라고.”

“…….”

“내 요구사항은 간단해. 지금 당장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브르 초원의 콩기라트 부족을 도와줘. 콩기라트 부족과 연합해서 케레이트 부족을 쳐부수면 돼.”

그 순간.

“아아!”

엘리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토의 계략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국왕·왕세자·왕족들 모두 오토의 손아귀에 있으니 마그리트 왕국군으로서는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오토는 그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었다.

굳이 이오타 왕국군의 피를 흘릴 필요 없이, 마그리트 왕국군을 이용해서 손 안 대고 코를 풀려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그런다고 마그리트 왕국이 그대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 같소이까? 국왕 전하를 생포했다고 나라 전체를 꿀꺽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할 수 있지.”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총사령관의 말을 잘라먹었다.

“똑똑히 봐.”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고갯짓을 해 부하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부하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왕세자와 왕족들을 끌고 와 보란 듯 성벽 위에 세웠다.

“이러면 어때?”

오토가 총사령관에게 다시 물었다.

“설마 어디서 왕족 하나 주워다가 옹립하고 얘를 폐위시킬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

“알지? 얘가 의심이 하도 많아서 그나마 살아 있는 왕족은 모조리 수도에 모여 살게 하고 감시한 거?”

“크, 크흠!”

“마침 얘가 도망치면서 친절하게 왕족들을 다 잡아 가둬뒀더라고. 지 아들까지 말야. 내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야.”

“아.”

총사령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빌어먹을 국왕 놈이… 자기 하나 살자고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긴 셈이로구나.’

총사령관의 입장에서는 답이 없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달고 싶은 상황이었다.

오토의 말마따나 여차하면 국왕을 버리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 뒤 싸워도 될 일이었지만, 이렇듯 왕세자와 왕족들까지 싸그리 붙잡혔으니 더 이상 선택의 여지란 게 없었다.

자고로 높으신 분들의 세계에서는 명분이 가장 중요한 법.

왕가의 혈통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또 하나의 반란군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헬무트 후작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식. 이게 가불기란 거다. 후후후.’

오토는 총사령관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을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에 빠뜨린 뒤 그걸 지켜보는 것.

악마나 할 법한 악취미였지만, 오토는 그게 즐거웠다.

왜냐하면, 지금 반쯤 넋이 나간 총사령관의 표정이 오토가 짠 계략이 완벽하게 맞아 들어갔다는 일종의 작품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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